스테파노의 순교와 5.18

Sunday, May 18th, 2014

사도 7:55~60 / 시편 31:1~5, 15~16 / 1베드 2:2~10 / 요한 14:1~14

2014년 5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오후 3시 성찬례, 주낙현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 
내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 우리는 성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을 목격합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순교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루가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역사가입니다. 루가 복음서 기자는 스테파노의 증언과 선포가 어떻게 그의 순교와 연결되는지를 서술하며, 역사를 읽고 바라보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베풀었던 보살핌과 동고동락의 역사를 차분하게 요약합니다. 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분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있었던 무리와 더불어 그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는 경험과 약속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이들은 자신 종교와 정치의 특권을 이용하여 보통 사람을 얕잡아 보고 율법으로 사람을 옥죄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마련해 주셨는데도, 자신들의 업적인 양 떠벌렸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결국에는 황금으로 만든 소를 섬겼습니다. 돈과 권력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의를 비판한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의 입을 빌려, 이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말한다고 다 신앙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도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의 불편한 진실 선포에 귀를 막았습니다.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을 진실로 여기고, 불편한 진실을 못 들은 체했습니다. 귀를 여는 대신에 그들은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진실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폭력이 등장했습니다. 결국,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한편, 사람을 죽이고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이들은 그저 수수방관했습니다.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성서는 이 세밀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록합니다.

진실에 귀를 막고, 불편한 마음이 들자 돌을 들어 생명을 앗아가고, 참담한 불의와 폭력의 현실을 수수방관하는 상황, 이것이 스테파노의 순교가 일어났던 무대입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 제대 위 정면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는 순교자 스테파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그는 슬픈 얼굴입니다. 슬픈 표정의 그는 자신을 죽인 돌을 자신의 옷에 주워담고 있는 모습입니다. 알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상한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습을 어떻게 보나요?

이 모자이크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눈을 돌려 성당 밖 세상을 둘러봅니다.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그 향기를 품은 바람이 참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사람들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바로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4월은 통째로 잔인했습니다. 세월호의 참극이 벌어진 4월은 5월로 연이어 있고 우리는 그 세월을 살아갑니다. 올해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시인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 안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 되풀이하기 때문에 더욱 잔인합니다.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980년 5.18 광주 민중 항쟁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외부 세력의 선동과 개입으로 이뤄졌다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이미 조사가 끝나서 확인된 사실과 진실을 세월의 망각을 이용해서 호도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수주의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인 조갑제 씨는 80년 당시 기자로서 5.18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5.18에 대하여 허위와 거짓말을 퍼뜨리는 현상을 보며, 자신이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이런 사실과 진실 왜곡만은 인정하기 어렵노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조갑제 씨마저도 좌파라고 몰립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시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34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5.18 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침묵)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러면 보통 사람들은 제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부터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 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밥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피를 나누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신비하게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이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닷새는 거룩한 날들이었습니다.

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聖事)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5.18의 진정한 꿈이 아닐까요? 여기에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34년 동안 이 실험과 꿈을 우리 몸으로 훈련하며 그 실험을 우리 사회 속에서 계속했던가요?

오늘 베드로서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람들에게 구박받고 버림받았다가 머릿돌이 된 돌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는 오해와 손가락질의 대상이고 버림받은 돌이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영적인 건물을 튼튼히 받치는 귀한 머릿돌이 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돌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러 쉴 곳을 마련하는 기초, 사람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지켜주는 집을 짓는 돌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돌입니다.

베드로서의 기자는 압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돌은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인 돌”입니다.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죽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돌을 만들려는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계속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다시 대성당 모자이크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스테파노 성인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의 신비로운 표정과 몸짓의 비밀이 풀립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던 미움의 돌을 자기 품에 주워담아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주춧돌로 쓰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의 역사가 되풀이되는데도 수수방관하는 이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아픈 시선을 우리에게 보냅니다.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뜻은 ‘왕관’입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서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신 예수님의 관을 받아드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테파노가 당한 ‘순교’(martyria) 본래 뜻은 ‘증언과 선교’입니다. 그는 세상에 나가 진실을 증언하는 일이 순교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순교가 바로 우리의 선교 사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역사에 담긴 아픔과 상처, 고통과 희망을 함께 기억하며, 역사를 새로 바라보고 진실을 알아내며, 새로운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그 생명의 길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

Saturday, May 17th, 2014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학살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세계의 신앙인들은 이 참혹한 인간의 행태를 교회와 신학 역사의 전환점으로 새겼습니다. 그 학살 이후로 모든 신학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눈을 감는 자기만족의 종교심을 수술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를 인간의 죄를 편안하게 용서하는 희생의례쯤으로 생각하던 신학을 넘어서서, 그 십자가가 인간 예수의 고통이자 인류의 고통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고통인 것을 깊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회와 세계는 이를 다시 망각했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계속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아랍의 전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20세기의 남은 시간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동안 사람의 영혼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이런 학살 전쟁을 제각기 정당화하는 이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날로 두드러졌습니다. 사람과 인생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그윽이 바라보며 깊은 연민과 연대로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내는 종교심은 사라지고, 미움을 부추기는 근본주의가 많은 종교를 먹어치웠습니다.

미국의 많은 신앙인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지던 날, 9.11을 기점으로, “9.11 이후의 종교”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동서 냉전을 마감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고 주름잡으며 스스로 ‘위대한 나라’로 일컫던 미국이 자국민 3천 명을 순식간에 자기 안방에서 잃었습니다. 온갖 전쟁을 자기 영토가 아닌 남의 영토에서 치렀던 미국은 자국 내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그 비극적인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든 종교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망쳐놓은 종교의 욕망, 시쳇말로 ‘삼박자 축복’(영혼, 물질, 건강 축복)은 이런 깨달음이 주는 변화의 희망을 여전히 더디게 만듭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에 고통스러운 이정표입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스스로 괴물이 된 어른들은 아이들마저도 학교 감옥에서 괴물 훈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지만, 우리만 모릅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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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이 가능할까요? 가슴을 찢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내 삶에 디엔에이(DNA)처럼, 아니 원죄처럼 새겨진 삼박자축복, 기복신앙, 특권의 남용과 오용을 찢어서 걷어내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이러다가는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긴 3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하느님 곁에 우리가 앉을 가능성은 참으로 낮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염려에 행여 “이 세상 안락을 등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라고 진짜 믿었어?” 하는 ‘속된 종교인’의 비웃음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간 [복음 닷컴] 162호, 2014년 5월 18일 []

예은이를 눈물로 보내며…

Tuesday, April 29th, 2014

진도 앞바다에 침몰한 세월호 안에서 친구의 딸도 목숨을 잃었다. 참사를 지켜보면서 동동 구르던 마음이 친구 딸의 소식과 더불어서 거의 무너져 내렸다. 며칠 후에 찾은 아이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나서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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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던 어제 아침, 아침 미사를 마치고 서둘러 친구인 유경근 님의 딸 “예은이”를 만나러 수원 연화장에 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연화장 올라가는 길에는 안산 단원고의 상징색인 초록 리본에 달린 슬픔과 아픔, 미안함과 분노가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내 몸도 이미 흔들리며 젖었습니다.

근 십여 년 만에 얼굴로 만난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땅바닥에 닿을 만큼 지친 모습이었지만, 나를 안고 손을 잡을 때는 오히려 거목처럼 든든하게 섰습니다. 예은이가 휘청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 아빠, 언니 동생들을 앞세우고 한 줌의 재, 그러나 여전히 예쁜 꽃가루로 우리에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통곡은 땅 속 깊은 곳을 적셨고, 하늘 끝까지 사무쳤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예은이를 먼저 온 친구들 옆방에 나란히 안치했습니다. 그 꽃가루를 담은 함들을 보니 불교 신자 친구, 그리스도교 신자 친구, 종교 없는 친구가 모두 사이 좋게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어른들보다 나은 세상을 이미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 화엄 세상이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치 예식 때에, 친구는 내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가족 앞에 섰을 때, 내 울음 섞인 기도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로 서니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에게서 선물을 거둬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께라도 따지겠습니다…” “남은 언니와 동생들이 남은 삶 동안 터럭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의 찢어진 가슴을 사랑과 위로로 평생 채워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이든 누구든 우리 원망을 받으실 것 아시라”고 하느님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악과 그 사슬을 끊어내도록 당신 백성을 다그치라”고도 하느님께 부탁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아들을 잃으셨던 그 고통과 슬픔의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겠다”고도 다짐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우리는 눈물을 담아 하느님께 올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제 예은이에게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꽃 같은 아이들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되어달라고. 못나고 나쁜 어른들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 하늘에서 함께하는 친구들과 함께 낡고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는 일곱 천사가 되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