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그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

Friday, May 29th, 2009

우리는 결국 그 사람을 보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 직전에 여러 사람들과 추모의 시간을 마련했다. 헤아리거나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먹먹함때문에 작은 시간과 공간에 함께 모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주위의 성직자들과 신학생들 몇몇이 모여 급히 생각을 모았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지역 한인 사회나 교회의 보수성에 짓눌려 슬픔도 울분도 잘 나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 급하게나마 자리를 마련하고, 지역 신문과 인터넷 게시판에 광고를 내어 초대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찾아 주셨다.

무거운 마음에 서로 처음보는 이들끼리 서먹한 인사를 나눴다. 헌화도 하고 분향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들었다. 고인의 흔적을 돌아다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한편으론 나눈 이야기들에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중계되는 영결식을 함께 보며 분노했고, 눈물 흘렸고, 마음마다 어떤 다짐도 했다. 함께 하는 이런 시간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없는 살림들에 보잘 것 없는 차와 쿠기 몇조각을 준비했는데, 수박이며 샌드위치며 다른 음식을 싸오신 분들이 있어 제법 풍성해졌다. 그 마음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사회하는 일에 서로들 손사래를 치며 떠미는 통에 나이 한살 더먹었다는 이유로 책임을 맡았다. 그럼 그저 모임을 여는 말만 하겠노라 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맡기자고 했다. 그렇게 했다. 참석자들 모두가 훌륭한 사회자들이었다.

다만 여기에 그 여는 말 하나만 담아 놓는다. 이 “잔치”가 새로운 삶을 여는 축제의 시작이길 바란다.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을 나누기 위해 찾아주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지난 며칠여 동안 우리는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어지는 슬픔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을 맞으면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가만 생각했습니다. 저마다 따로 장례와 영결식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입니다만, 저처럼 시골에서 자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식을 보고 겪은 처지로서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장례는 그저 슬픔에만 휩싸여 있는 이별의 시간이 아닙니다. 장례식은 고인이 살아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초대하여 베푸는 낯선 마지막 환대의 잔치입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의 장례에서는 음식이 풍요롭고, 떠들썩하며, 이야기가 넘쳤습니다. 심지어는 노름판도 벌이고, 노래도 춤도 추곤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고인이 우리에게 베푸는 환대의 잔치로 이 시간을 바라 보았으면 합니다. 가까이 살면서도 멀었던 친구들이 모이고, 나누지 못했던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 이 자리에 내어 놓았으면 합니다. 그것이 고인이 되신 대통령께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이 조촐한 모임은 어떤 특정 종교나 정치적인 이념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그저 우리 삶이 녹아들어서, 우리 한국 사회가 좀더 상식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의가 숨을 쉬고, 자유의 춤이 어우러지는, 그런 꿈들이 잊혀지지 않아야 된다는 소박한 생각때문에 마련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연스러움에 맡기려 합니다.

순서의 형식과 통제에 여러분을 끼워 넣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것을 몹시도 싫어했고, 그런 것이 자칫 갈등의 해소라는 미명 하에 또다른 억압이 될 것을 늘 염려했던 고인의 뜻에도 맞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과 이 공간은 고인이 마련한 마지막 환대의 잔치입니다.

여러분이 잔치를 채워 주십시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술도 없으며, 화투짝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로 채워주십시오.
우리가 함께 읽는 시로 물들여 주십시오.
꽃 한송이를 바쳐서 자유로운 영혼이 가는 길을 축복해 주십시오.
향 하나를 피워서 그 영혼이 자연의 숨결로 녹아들게 해 주십시오. 혹은,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 우리가 이뤄가야 할 세상에 대한 꿈이라도 나눠 주십시오.
그도 아니라면 침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이 순간 자신의 다짐을 살펴보아 주십시오.

이것이 여기에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종종 고인을 추억하는 동영상도 나눌 것입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나와서 헌화와 분향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촛불 하나를 켜실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누구든 시 하나를 읽거나, 이야기를 들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몸짓 사이에서, 그리고 사이 사이의 공간 속에서,
고인이 바라마지 않고 이루려 몸부림쳤던 그런 꿈이 새로운 한 발을 내디게 될 것입니다.

이 환대의 잔치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잔치는 끝나지 않았다. 슬픔과 사랑과 꿈을 기억과 마음에 묻는 순간, 비로소 잔치는 시작된다.

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

Wednesday, May 27th, 2009

1.
매일 기도하고 있으나, 부끄러움과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에서 어떤 말도 잘 터지지 않았다. 충격을 어찌하지 못하여 한국에 계신 몇몇 신부님들께 전화통을 붙들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분들과도 깊은 한숨을 나누었다. 모두들 경악했고 슬퍼했다.

이 공유하는 충격 속에서 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결을 달리했다. 나 역시 그 사람 노무현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몸담고 있는 사목 현장에 따라, 혹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와 교단에 따라 어떤 분기점들도 보였다. 특히나 교회와 같은, 어떤 집단을 이끄는 경우일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들 했다. 그것이 자신이 처지를 변호하는 것이든, 한탄하는 것이든, 답답해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제 생각들을 속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럴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누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이야기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이라고들 한다. 이미 수구 꼴통들은 교회의 가르침입네 하면서, 자살이니 무책임이니 하는 말로 정치적인 언변을 설교랍시고 묵상이랍시고 교활한 정치적인 선동을 뿌려 놓는다. 많은 이들이 신자랍시고 그 말들에 부하뇌동한다. 그리고선 이 죽음에 대해 그저 인간적인 애도만 표명해도, 교회에 정치를 끌어들인다느니, 좌파라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는 말로 응수하고 공격하기가 일쑤란다. 움추릴 만하다.

2.
그런데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고 사목하고 목회하는 일은 신앙적인 언어도단이 아닌가? 신앙은 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진댄, 교회의 현실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탓에 어떤 반성과 성찰을 위한 도전을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면, 아니 하더라도, 한참이나 김빠진, 맥없는, 하나마나 한 입발린 말들은 나 같은 사목자들 스스로를 그 심연에서 비참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 비참 속에서 우리 교회는 “끼리끼리의 사교 클럽”이 되고 말 뿐이다. 물론 등급이 명확하게 매겨진, 강력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런 사교 클럽. 그러니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하다는 말도 다들 헛소리이다. 아직 다양하기라도 하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을 터.

그러니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슬기와 순결이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경륜이라고들 한다. 젊은 것들은 거기에 좀 머리 좀 숙이라고 다그친다. 모나게 살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경륜을 가장한 타협과 기만과 위선과 노회함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위로도, 격려도, 조언도 아니다. 또 다른 억압의 기제일 뿐이다. “순결”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고, 공동번역에서 “양순하라”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뜻대로라면 ‘순결’도 억지는 아니겠지만, 말 그대로라면 “단순/단호하라”는 말이겠다. 때묻지 않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살면서 어찌 모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고민 속에서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우회”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그 “우회”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숨기며 짐짓 뻐기고 있는 태도에 허를 찌르라는 말로 들어야겠다. 내 폐부를 찌르고 가르는 그 날카로운 도전이 이 슬기로운 우회의 과정에서 무디어지지 않는지 돌아보면서.

3.
나 같은 신앙인들에게 돌아오는 수술용 칼날은 우리 안에 꼭꼭 숨겨진 위선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가없은 욕망을 치장한 이 위선으로, 우리는 몇년 전 대단한 위선의 흉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우상은 한때 권좌에 있던 이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런 그 탐욕의 우상이 보통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감추려는 위선은 우리의 눈도 가린다. 눈먼 우상은 살아 있는 이가 이미 벼랑 끝에 내몰렸는지를 가늠할 길이 없다. 우리의 뒤틀리고 벌거벗은 욕망이 이 무소불위의 눈먼 권력을 낳았고, 지금 우리가 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물이 나의 위선을 씻어내리는 회개와 세례가 되지 않고서는, 이 슬픔에 찬 분노도 이미 거만하게 우뚝 서버린 흉물스런 우상 앞에서 맥을 쓸 수 없다.

4.
이런 거친 심정때문이었다. 마음 깊으신 한 신부님의 “말-씀”에 토를 달며 투정을 했다. 그것 말고는 침울하게 산란한 내 마음을 다스릴 도리가 없었다. 침묵해야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공이 얕고, 도에서 먼 지라, 털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투정을 고쳐 옮겨 놓는다.

이 참담한 사건에 직면한 마음의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도 잘 안나오고, 한편으로는 참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이끄시는 사목자이신 신부님의 처지를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슬픔에 기대어 투정을 좀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별사 부분인 오늘의 본문(요한 17:6-19)을 요약하는 말씀은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 주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신부님께서는 “우회적”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좀더 분명한 표현은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다만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속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의식 속에서, 훨씬 예언자적인 표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많은 경우에는 세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들을 제가 명민하고 사려깊으신 신부님의 글에서 – 글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하는 걸 알지만 – 쥐어 잡을 수 없다는게 아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너머’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즉 우리의 위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별사가 예고하고 있는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어떤 위대한 구원에 대한 결과와 그에 대한 해석 이전에, 우리에게 편만한 위선의 폭로였습니다. 그 폭로인 그의 죽음에 우리를 비춰보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위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죽음은, 그래도 그나마 인간적이어서 정직하려고 몸부림쳤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신앙인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말고라도 신앙인들은 이 점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변화를 맞이하는 시점의 성찬례에서 신앙인이 가슴을 쳤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살아가려는 용기를 얻고, 그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이 용기와 기쁨을 훈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는 그동안 우리의 위선을 포장하거나 치장하는 메이크업 가게가 되었고, 우리의 음란한 욕망의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흉물이 바로 2mb와 그 졸개들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종교인, 게다가 대형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어떤 공동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한, 어떤 “우회”가 빈말의 핑계가 되지 않을까, 이 참담한 비극을 맞이하면서, 성직에 든지 10년이 되는 해에, 그리고 그 기념일에, 제 자신에게, 제 동료 성직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교인들과 바닷가에 나와 거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입에 들쳐오는 모래를 씹으며 거듭 되뇌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노무현 前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Wednesday, May 27th, 2009

노무현 前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마음 깊이 애도합니다.

지금 우리는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분함으로 그분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모든 제도가 사람의 사람다움을 위해 존재한다는 그분의 신념과 노고가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고인께서 겪고 있었을 외로움과 아픔을 멀찍이 떨어져 방관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한 인간을 몰아가 결국 죽음의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린 어둡고 거대한 세력들에게 분노를 느낍니다.

언제나 죽음은 남겨질 사람들에게 새로운 몫을 선사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는 시작이고, 보다 성숙한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순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가 지녔던 바른 신념과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이어받아 사는 것입니다.

참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망이, 남겨진 우리들의 삶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이어져가기를 빌며,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평화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9년 5월 27일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