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고 영적인 게걸스러움

Tuesday, July 9th, 2013

지성주의든 반지성주의(cf. 리차드 호프스태터)든, 신학을 학문으로 천착하든 영성으로 해결을 보려 하든, 지난 십여 년간, 이런 흐름을 살피면서 눈에 선연하게 잡힌 현상 하나는 어떤 ‘게걸스러움’이었다. 몸에 좋다면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으려는 유혹이 지성이나 영성을 입에 담거나 훈련하는 이들에게서도 눈에 띄었다.

지성은 정보의 과잉에 유행의 과잉까지 더해 그 수사학과 속도가 현란하기만 하다. 현실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 지성의 핵심이겠으나 유행하는 이론과 학자의 말에 올라타 자신을 치장하여 호객하는 모습이 비친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이론을 통합하거나 꿰뚫는 초월적 인문 멘토를 자처하며 ‘인문학적 교양’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반지성을 부추기는 아이러니를 자행하기도 한다.

영성은 관심의 대상이 된 순간 상품화와 소비주의의 그늘에서 허덕인다. 영성의 핵심은 ‘비움’이다. 그 비운 공간을 넉넉하게 채우는 자비심과 측은지심이다(텅빈 충만!). 다시 말해, 사랑이다. 이 애틋한 공간을 마련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든 들어온 것을 소화하든 할 테지만, ‘도통’하겠다는 욕심이 지나쳐서 영적인 게걸스러움마저 느끼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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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나시” – 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곳곳에 넘쳐나는 인문학 강좌니, ‘탈’자 붙은 신학 포럼이니, 무슨 영성이나 피정 프로그램이니 하는 것들이 이 게걸스러움에서 자유로운지 살펴볼 일이다. 유행에 뒤져 초조해하듯,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제목이라도 주워섬기지 못하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을까 봐, 시대에 동떨어진 사람이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무슨 영성 프로그램을 수료하지 못하거나 특정 기도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단계 뒤처진 신앙인이 될까 봐 좌불안석인 처지와 겹친다. 그리하여 명석하고 재치있고 도통한 이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이 모양이다.

내 단견이고 오해이길 바란다. 게다가 이마저 없으면 겁도 없이 날뛰는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의 세상에서 견디는 일마저 힘들기 때문이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 권력의 부자들은 값싸고 푸짐한 연쇄점 햄버거로 사람들을 비만으로 만드는 동안(동시에 그들은 거기서 판매 이익도 얻는다), 자신들은 간추린 최고의 식단을 차려 받고 자기 건강을 관리한다.

그런데도 지성을 성취하고 영적으로 도통한 이들은 자신의 설익은 경험과 지식으로, 실제 권력을 향해서 비판하기보다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핀잔하기에 바쁘다. 이는 그들이 원하는 ‘도통’에도 근접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지적이고 영적인 게걸스러움이 지적/영적 비만과 교만을 만든다.

45년 전, W. H. 오든은 이렇게 적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제 사람들이 과거의 걸작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 더는 부자일 필요가 없으니 큰 축복이라 할 만하다. 값싼 책이나, 수준 높은 복제 기술, 그리고 스테레오 레코드를 통해 이 모두를 쉽게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쉽게 접하면서 오용이 되면(실제로 우리가 오용한다), 그것은 저주가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더 많은 책을 읽으려 하고, 더 많은 사진과 그림을 보려 하고, 더 많은 음악을 들으려 한다. 실제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폭식은 정신을 키워내지 못하며, 오히려 정신을 소비하게 한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을 곧장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그저 어제의 신문에 난 흔적보다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제직 – 그늘에 핀 작은 꽃을 품는 일

Thursday, June 6th, 2013

아침 침묵 중에 슬며시 떠오른 회고를 옮긴다. 사제로서 지난 십수 년 동안 다양한 공동체와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며 성서와 복음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주된 초점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고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해당 공동체의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일 터이나, 나이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 초점은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2) “용서, 사랑, 환대의 가치와 실천”, 3) “측은지심의 공동체”로 나뉜다. 그러나 같은 성서와 복음을 읽고 살피며 기도하는 처지인지라, 시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이 초점들은 언제나 겹친다.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전통적인 수도공동체에 초대받아 함께 주일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며 나누던 복음 해석의 렌즈였다. 그 수도회가 갓 서품받은 사제를 불러 채플린으로 삼은 이유라고 믿었기에 젊은 혈기에 상당한 객기를 부렸고, 수도자들답게 늘 너그럽게 들어주셨다. 고정관념을 이겨내자고 말했지만, 수도자들의 너그러움과 공동체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2. 용서/사랑/환대의 가치와 실천: 풍비박산이 난 공동체를 타국 타향에서 만나서 돌보는 일은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다. 공동체의 내력을 들춰보니 온갖 비난과 미움의 상처가 엿보였고, 사람이 떠난 텅 빈 쓸쓸함에 짓눌려 있었다. 이런 처지에 복음은, 우리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환대하는 일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가진 것 없이 남은 쓸쓸한 이들의 겸손이 마련한 작은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내 소리 내며 살기고 했고, 종내에 내력이 지닌 하릴없는 쓸쓸함에 나 자신이 짓눌리기도 했다.

3. 측은지심의 공동체: 복음을 들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복음이 특정한 형태의 정치-이념적 주장의 외피가 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20년 넘게 지켜봤고 성찰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거기서 얻은 배움은 신앙 공동체의 이상은 ‘측은지심의 공동체’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에 깊이 흐르는 마음은 ‘측은지심’이다. 종교는 새로운 시선을 얻는 훈련이다. 이런 생각은 나이 드는 탓일까? 이런 공동체를 ‘리버럴’ 사이에서 마련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과 초점의 변화는 하느님의 이끄심이리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돌멩이처럼 여기까지 왔다. 다시 차여 어디로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내 의지로 하느님의 자유를 종종 거부하지 않았는지 돌아다 본다. 그 기도 공동체를 통해서 만났던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러 얼굴과 표정이다.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다. 지금 스스로 위로와 힘을 얻는 말은 이것뿐.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감동을 줬는지,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깊이 어루만졌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 행동이 어떻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가 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언제 적었듯이, 그림자 짙은 그늘이 많은 내 삶. 다만, 그 안에 수줍은 작은 꽃들이나마 품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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