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성탄 편지 2011

Thursday, December 15th, 2011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벗들에게,

“나는 이제 곧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뒤흔들고, 뭇 나라도 뒤흔들리라.” (하깨 2:6-7)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뭇 나라”가 흔들리는 시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들, 유럽과 미국을 덮친 경제 위기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구조들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되새겨주었습니다. 정치적 동일성이나 재정적인 안정성도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만 흔들리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여러 사상가가 최근에 사용했던 한 문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흔들리는 이들의 연대”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가 얼마나 상처입기 쉬우며, 이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달은 이들이 함께 이루는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서로에게서 같은 연약함을 깨닫는 일은 정말로 깊은 의미의 연대입니다. 이 연대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 연대는 인간이 지닌 조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전략을 세우든, 진실은 인간은 변화에 종속된 존재이며, 고통의 위험에 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깨지기 쉬운 우리 인간이 본질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그리고 모든 나라가 흔들릴 때, 우리가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진리는 우리의 궁핍과 우리의 가난입니다.

성탄의 복음은 사회 개선 정책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이 인간의 공통 숙명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하는 이들 위에 내리는 심판입니다. 그 복음은 사람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복음은 또한 이러한 연결과 연대는 겸손과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한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형태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탄의 복음은 인간 역사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을 거듭하여 지적하며 그 점을 우직하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힘이 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대 세계의 현자들과 정치가들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이성,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 안에서 참된 인간성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가난한 아기를 참된 인간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나요? 우리의 연약함을 보면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태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 않나요? 이 점을 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 하느님과 같은 자유, 사랑을 주고받는 자유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이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터전에 서게 됩니다. 그 터전 위에 우리의 희망, 정의와 자비를 위한 우리의 행동을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이 터전 위에 우리를 새롭게 세우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우신 교회를 보살피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기도의 인사를 전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zfczX

캔터베리 대주교 짐바브웨 방문 설교

Sunday, October 9th, 2011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전한 설교를 우리말로 옮겨 싣는다. 약 1만 5천여 명이 운집한 경기장에서 열린 성찬례에서 윌리암스 대주교는 짐바브웨의 폭압적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짐바브웨 하라레 교구의 모든 시설을 사적으로 가로채서 파직된 주교 쿠농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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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짐바브웨는 독재자 무가베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인적 인플레로 고통 받고 있다. 게다가 이 독재자를 옹호해 온 하라레 성공회 교구 전직 주교였던 놀버트 쿠농가는 은퇴를 거부하고 하라레 교구의 모든 교회와 교회 부속 재산을 사유화했다. 하라레 교회 성공회 신자들과 새로운 주교가 이를 정상화하려 했지만, 쿠농가는 무가베 정권을 등에 업고 예배드리는 신자를 교회에서 쫓아내거나 교회를 폐쇄했다. 아직도 많은 성공회 신자들이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 길거리에서 미사를 드려야 한다.

그동안 성공회 여러 지도자들은 무가베 정권의 폭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례로 영국 성공회 요크 교구의 센타무 대주교는 방송에 나와 자신의 성직 칼라를 자르면서, 무가베가 퇴진할 때까지 성직 칼라를 하지 않겠다고도 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설교이지만, 윌리암스 대주교의 설교는 세계와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한다. 그의 외침은 지구 반대편의 우리 땅과 교회에도 해당한다. 나를 포함한 우리 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선교 사명을 잘 기억하며 늘 되새기고 있는가? 우리 삶에 그것을 비추어 성찰하고 있는가? 그저 립서비스와 수사에 우리의 부정직을 숨기고는 있지 않은가? 혹은 사회의 정의를 위한 주장을 맥락이나 내용 없이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들이대며, 재갈을 물리려 하지 않는가? 돌아볼 일이 꽤 많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짐바브웨, 하라레, 2011년 10월 9일)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이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다. 구원해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리던 우리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이 들려준 큰 혼인 잔치 이야기는 정말로 흥겨우면서도, 가장 도발적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에게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야기는 어느 큰 임금이 자신이 마련한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려 한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잔치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와서 먹을 만큼 음식도 넉넉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손님들이 흥겹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육과 영으로 모두 말이죠.

이제 반응이 하나 둘 돌아옵니다. 임금이 기대한 손님들은 임금의 관대한 초대를 거절할 핑계를 찾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관심에 너무나 몰두해서 이 멋지고 공적인 축하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임금은 모든 문을 완전히 열어서 잔치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두 다 초대합니다. 고픈 배를 움켜쥔 이들도 문지방을 넘어오고,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사람도 오도록 하고, 누구나 와서 그 잔치를 즐기라고 합니다. 임금이 바라는 것은 그가 준 선물을 사람들이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우리가 받아서 기뻐하기를 원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이 세계에 부어 주셨습니다. 천연자원이라는 선물, 인간의 기술이라는 선물, 인간의 사랑과 이해라는 선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선물을 써서 우리가 모두 함께 기쁨을 누리길 바라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성숙하기를 바라시고, 우리가 모두 함께 기뻐하고 서로에게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정의입니다. 그것은 공정함에 대한 어떤 추상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정의란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어떤 만족감을 갖는 상황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걸어 잠그려는 사람들의 방해가 없는 상태입니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마태 23:13)고 주님께서는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과 너그러움을 나누라는 그분의 초대에 어떤 이들이 거절하는 상황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도 쉽게 이러한 사랑을 가로막고, 다가오는 사람마저 막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아시지요? 여러분 얼굴 앞에서 그 문들을 막아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입네, 성공회 신자입네 하는 사람들인 것 말이죠. 그들의 탐욕과 폭력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거절하는지, 그래서 여러분이 드리려는 예배를 막고, 이 나라의 교회와 학교와 병원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선교적 증언을 훼방하는지, 여러분은 잘 아시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이 비유 이야기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압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그분의 잔치에 초대하시려는 의지는 강력한 것이어서 상식도 없고 하느님을 무시하는 이러한 공격들을 종내에 이기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의심으로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오셨듯이, 여러분을 짓누르려는 온갖 획책이 있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여러분을 부르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보이셨던 계시처럼, 주님께서는 이제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문이요, 자비의 문이요, 그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여러분의 교회 문이 닫히는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은 신앙과 인내를 가지고 열린 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여러분은 참된 교회를 만드는 것이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초석을 둔 영적 기반이 바로 교회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서 열어 놓으신 문을 두고 감사하는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대적자들과 박해자들에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은 너희에게도 열려 있다.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가져오는 우둔한 폭력을 그만두고 돌아오라.”

하느님의 교회가 선포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이러한 선물을 망가뜨리고 훼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비를 향한 약속과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잘못과 죄를 인정하기 그토록 어렵단 말입니까? 도전과 비판의 목소리를 침묵시키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처럼 행동하는 일들이 잦습니다. 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합니다.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땅에 정말로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먹이기도 넘칠 만큼 주셨습니다. 이 땅의 광물 자원은 엄청납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이 땅은 사람들을 먹이는 데 쓰이지 않고, 쓸모없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광물 자원이 어떻게 저주로 바뀌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곳에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싸움에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공동체가 파괴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에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몇 달 전, 콩고에 갔을 때 광물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생겨난 비극적인 일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울부짖는 우리 창조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나요? 아벨의 피가 땅 밑에서 울부짖는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준 선물을 가지고 피를 뿌리는 전쟁을 일으키는가? 어찌하여 너희가 가진 것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그것을 사리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저 역시, 과거에 이 천연자원을 둘러싸고 식민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이 탐욕을 부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 선임 마이클 램지 대주교님처럼 분명하게 인정한 유럽인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들의 지배가 몇 대에 걸쳐 지속된 후, “우리 유럽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아프리카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불안에 떠는 지배 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원주민들을 이용하면서 그들의 권리와 존엄의 희망과 정치적 자유를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이 권력이 또 다른 형태의 무법적 권력으로 대치되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요. 권력을 가진 이들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공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연의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는 함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하느님은 또한 우리에게 외부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연대의 선물과 자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일어서서 정치 지도자들과 지배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들어라!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가 파괴되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들어라.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어라. 주님의 백성이 정의와 평화와 자비에 마음을 열기를 갈망하는 그 목소리를 들어라.”

이 성찬례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모든 사람의 배를 불리는 잔치입니다. 여기에는 인종도, 부족도, 정당의 구분도 없습니다. 이 공동체에는 폭력과 보복이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은총을 바라는 죄인들로서 우리는 함께 일어나 이 세계에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평등하게 마련된 하느님의 식탁에 빈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해야 할 일은 정치적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창조의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와 기쁨의 공동체적 관계, 이 우주적 잔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전망 속에서라야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폭력에 반대하라고 촉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년에 선거를 앞둔 이 나라에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람이 저마다 가진 깊은 존엄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의 안녕을 내팽개치는 일, 사람을 박해하고 공격하는 일을 완전히 멈출 수 있습니다.

이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려 합니다. 우리는 이 유혈의 공포 속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길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도 막고 닫을 수 없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에 모든 이들을 환영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 지독한 우리의 대적자들에게도 그분의 평화 속에 앉을 자리가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 길을 돌이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서신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지요?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한 말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 우리는 이런 것들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런 것들로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위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붙잡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폭력과 유혈의 갈등, 그리고 과열된 정치적 갈등의 수사가 만드는 거짓 전율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화해의 희망으로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이는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무이기도 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의 관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도움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교회는 희망의 원천이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근간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 개인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의 시선과 봉사가 그들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교회는 그 충일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이 나라에서는 최근에 여러분과 같은 성공회 형제와 자매들이 그 실천적인 봉사에서 더더욱 적극적인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이 사회 전체에 되새겨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한 한 세대를 파괴하는 HIV/에이즈의 확산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곳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여러분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악화시키는 문제들과 이 현실을 정직하게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도전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내하고 있는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들의 가치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사회의 문제, 편견, 그리고 미신을 분쇄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벗된 여러분. 여러분은 세계 교회와 이 위대하고도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 사는 이웃들에게 이미 많은 것을 선사했습니다. 하루하루 여러분은 불의와 직면하고 있으며, 바울로 성인이 말씀하신 “타락한 형제들”의 오만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편 기자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멸시를 받았습니다. 배부른 자들에게서 비웃음 소리를 들었고, 교만한 자들에게서 모멸을 받았습니다”(시편 123:3-4). 그러나 알아주십시오. 여러분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는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내와 너그러움과 끈질김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불확실성과 계속되는 공격의 위협으로 고문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세계 성공회의 모든 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하시어 그분 아들의 자리에 사람들을 앉게 하시고, 우리 주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서 이뤄진 하늘과 땅의 혼인을 축하하도록 하려는 그분의 뜻은 절대로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고 기다렸더니,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오늘 우리는 이 성찬례 안에서 그 구원과 천상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치유를 위한 하느님의 초대는 폭력과 불의의 길을 멀리 떨쳐 버리고, 우리 모임 속에서 다시 한번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전 세계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울부짖어야 할 말과 더불어, 이제 우리가 기도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원문: http://goo.gl/2btrR
번역: 주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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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대주교는 ‘좌파’? – 공동체와 민주주의

Thursday, June 9t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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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의 New Statesman 지(紙)에 쓴 글을 두고 영국 내 정치와 언론에서 논란이 거센 모양이다. 그의 글과 논란을 읽고 얻은 생각을 정리한다. 모처럼 긴 글이어서 차례를 먼저 적는다.

  1. 세속 정치와 성직자, 그리고 ‘정교분리’
  2. 성공회 전통 안에서 사회에 대한 시각과 실천
  3. 캔터베리 대주교들의 대(對) 사회 발언과 실천
  4.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좌파’? – 공동체와 민주주의

1. 세속 정치와 성직자, 그리고 ‘정교분리’

성직자는 ‘세속’ 정치에 관하여 발언하면 안 되는가? ‘정교분리’는 성직자의 ‘세속’ 정치에 대한 발언을 막는 논리인가?

다른 교단의 입장은 차치하더라도, 성공회 전통에서 보자면, 성직자가 세속 정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성공회 전통과 역사와 신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진심이다.

한편, ‘정교분리’라는 논리는 성직자의 세속 정치 참여, 혹은 그에 대한 발언을 막는 논리가 아니다. ‘정교분리’는, 한마디로, 특정 종교의 이념과 신념 체계를 정치에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발전된 것이다. 종교가 세속 정치에 발언하는 것을 반대하는 논리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정교분리’ 논리가 악용되는 사례는 미국과 한국의 보수적 교회에서 뚜렷한데, 실제로는 보수 교회들과 지도자들이 이 논리를 특유의 성속/영육 이원론과 섞어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질 나쁜 정치 참여를 한다.

세계 성공회의 최고 지도자요, 영국 성공회를 치리하는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최근 UK 연립 정부(보수당-자유당)의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게 비판해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대정부 발언을 두고 정치인들과 언론이 찬반으로 다투고 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소리는 없다. 그의 비판 내용과 논리가 바른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서로 논쟁할 뿐이다.

2. 성공회 전통 안에서 사회에 대한 시각과 실천

그 내용을 살피기 전에, 한국 성공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대정부 비판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동안 한국 사회와 정치가 거의 60년대 수준으로 뒷걸음치면서, 교회 역시 보수화 물결에 올라타고 있다. 성직자들이 특정 정당과 정부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두고, ‘정치 발언’을 그만두라는 불평의 언성이 높다고 한다. 나 자신이 한 명의 신자요 사제로서, 이 현상을 바라볼 때, 두 가지 근거를 두고 생각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인 됨의 시작인 세례 언약이요, 둘째는 성공회의 경험과 전통이다.

첫째, 모든 신자는 세례 언약을 한다. 부활 밤 전례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세례가 있을 때면, 우리는 이 세례 언약을 갱신이다. 그 마지막 질문과 다짐은 이것이다.

여러분은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힘쓰며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겠습니까?
예, 하느님의 도우심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자인 성직자는 이 세례 언약에 근거를 두고, 성직 서품을 받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권고와 다짐을 받는다.

부제는… 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세상과 교회를 섬기며 봉사해야 합니다.

그대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한 이웃을 돕고 보살피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며 이 세상을 지키는 파수꾼과 청지기로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새 언약의 성사를 거행하여 이 세상이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도록 힘쓰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서 다짐하는 언약이 세상의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둘째, 성공회의 역사적 경험과 전통은 세상 정치에 대한 무관심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참여가 각별했다. 성공회가 시작된 ‘영국’ 성공회가 여전히 국교이다(현재 세계 성공회에서 영국 성공회만이 영국의 국교일 뿐,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교파 교회로 존재한다). 그 역사적인 발전에서 나타난 관계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이는 교회가 세속 정치와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대표적 사례이다. 종종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국교'(Established Church)는 원래 ‘국민 교회'(National Church)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다. 나중에 이것이 ‘국가 교회'(State Church)로 변하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성공회는 이 ‘국민 교회’라는 생각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 특히 예언자적 참여의 경험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경험 탓에, 성공회의 신학과 영성 전통 어디를 봐도, 일상의 삶, 사회 정치적인 삶과 동떨어진 주장이 없었다. 발생 당시의 영국 복음주의가 얼마나 사회 참여와 그 개혁에 적극적이었는지, 성공회-가톨릭주의자들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실천을 통해서 그 신학과 영성을 얼마나 깊이 발전시켰는지를 보면 안다. 성공회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3. 캔터베리 대주교들의 대(對) 사회 발언과 실천

이런 점에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대정부 비판은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그동안 왜 주저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역대 캔터베리 대주교 가운데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사목적으로 훌륭했노라고 기억되는 분들은 대체로 세속 정치에 대한 발언이 더욱 강했다.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 대주교는 2차 세계 대전 중인 영국 국민을 위로하면서, 전후 UK 복지 국가 모델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Christianity and Social Order, 1942). 그는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한때 노동당 당원이기도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교회는 자기 내부의 일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지상의 유일한 사회이다.”

최근 예로,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마가렛 대처 총리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영국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며, 대처 정부의 강압적인 노동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대처 총리는 당시, 런시 대주교의 정치적 비판을 두고 “그러면, 광부들과 석탄을 먹고 살던가” 라고 대꾸하여 사회적인 공분을 샀다. 또, 영국이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대처 총리가 ‘승전 기념 미사’를 드리자고 제안하자, 런시 대주교는 하느님 앞에서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없으며, 오직 전쟁의 희생자들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는 양국 ‘희생자들을 위한 기억의 위령 미사’를 드렸다.

4.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좌파’? – 공동체와 민주주의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번 대정부 비판에서는 ‘좌파’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뜻이 비친다. 이 말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 정치 세력들이 역사 속에서 좌파가 추구했던 가치를 무시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 가치는 바로 그리스도교 전통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잇닿는다. 이 가치를 위해서라면 당신 자신이 논쟁을 일으키겠다는 각오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현재의 UK 연립 정부(보수당-자유당)가 추구하는 ‘큰 사회'(Big Society) 정책이 매우 모호하며, 이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검토를 거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다. 검토되지 않고 모호한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지난번 정권이 잘못해서 그렇다,” “경제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만 둘러댄다고 비판한다. 특히 교육 정책, 복지 정책 등에서 가난한 이들의 삶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 사회가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만들어 온 바른 가치, 즉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좌파’적이라면, 그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현 정부를 성토하겠다는 의지마저 읽힌다.

윌리암스 대주교가 문제라고 지적한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나는 그 정책에 대해 평가할 능력이 없다. 다만, 윌리암스 대주교가 지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공동체에 대한 가치 회복은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점을 우리 안에서 성찰하여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면, 우리 사회나 교회는 계속해서 가난의 희생자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세례 언약에서 다짐한 “정의와 평화”는 고사하고, 맛을 잃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소금 처지가 될까 두렵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종교와 신학을 온정주의라는 차원에 말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우리가 되새겨야 할 신학 전통이 있다. 이 전통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온정의 대상이 아니라, 지탱 가능한 공동체의 본질로 본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몸을 도는 피와 같은 존재이며,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 내는 힘이다. 이 전통은 다른 사람들과 집단의 능력을 세워준다. 그리하여 이들이 다시 사회에 생명과 책임을 가져다주도록 한다. 놀랍게도 이것이야말로 성 바울로 사도가 생각했던 공동체이다. 하느님은 이런 공동체를 원하신다

민주주의는 이런 이상을 평가하는 잣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정책에서라도 민주주의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즉, 민주주의를 통해 한 사람과 집단이 얼마나 넉넉하게 참여하는가,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다른 사람과 집단에 풍요로운 복지를 제공하도록 하느냐는 문제이다. 초기 생디칼리스트의 말을 빌자면, 국가를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나 다수결주의를 넘어서며, 지역이기주의를 초월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공유하는 필요와 희망과 진정한 포용을 위한 실질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후원: 한누다 교우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