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에게 – 로완 대주교

Wednesday, April 27th, 2011

Lulu_letter.jpg스코틀랜드에 사는 여섯 살 ‘룰루’라는 아이가 하느님께 쓴 편지를 아이 아빠가 여러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냈단다. “하느님께.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나요?”라는 질문이었다. 스코틀랜드 국교(장로교)에서는 답이 없었고, 스코틀랜드 성공회도 답이 없었다. 스코틀랜드 천주교에서는 답장하긴 했는데, 너무 어려운 신학으로 가득 차 있더란다.

아이의 편지는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에게도 전해졌고, 로완 대주교는 아래와 같은 답장을 룰루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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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룰루에게,

네 아빠가 나한테 네 편지를 보냈단다. 답장해 줄 수 있는지 물으시면서 말이야.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어! 그래도 하느님이라면 이렇게 답장을 쓰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사랑하는 룰루에게

누구도 나를 만들지는 않았어. 그래도 많은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놀라기는 했지. 사람들이 세상을 둘러보면서, 아 세상이 정말로 아름답구나, 정말로 신비하구나, 정말로 놀랍구나, 생각하고, 이게 어디서 왔을까 생각할 때 나를 발견했지.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아주 조용히 침묵을 지킬 때,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평화와 사랑을 느낄 때 나를 발견했어.

그리고 나에 대한 어떤 생각을 지어냈지. 어떤 건 그럴 듯하고, 어떤 건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생각들 말이야. 때로는 내가 사람들에게 몇 가지 힌트를 주곤 했어. 특별히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정말 어떻게 생겼는지 좀 쉽게 알려주려고.

나보다 먼저 있어서 나를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책에 있는 어떤 이야기를 쓴 사람과 같을 거야. 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썼고, 마침내 너처럼 나에게 아주 곤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들었단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답장하시고는 사랑을 듬뿍 담아서 서명해서 네게 보내셨을 거야.

그래, 하느님께서는 이런 편지를 안 쓰신다는 것도 나는 알아. 하느님을 대신해서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써본 거야. 나도 너한테 사랑을 듬뿍 담아 보낸다.

로완 대주교

출처: http://goo.gl/IGGMe
번역: 주낙현 신부

일치 – 신적인 긴박성과 인내심 사이에서

Tuesday, April 26th, 2011

복음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들라면, 주저 없이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의 고별사를 들겠다(요한 13장~16장). 뒤따르는 예수의 청원 기도는 그리스도교 영성 신학의 핵심이다(17장).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란 무엇인가? 그 선언을 교회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할라치면 예수님의 일치 청원 기도 같은 간절한 깊이는 쉽게 사라지곤 한다.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동안 일치를 추구했으나, 늘 자신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맞섰다. 로마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교회는 정통 신조를 진리인 듯 내세우며 그에 합의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가시적 일치는 필요 없으며 영적이며 내적인 진리를 개인적으로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개신교에는 편만하다.

세계 성공회는 여성 성직 문제, 동성애자 성직 문제를 두고 분열을 거듭한다. 지난 20세기 스스로 선두에 섰던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의 노력과 성과를 무색케 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진리’를 손아귀에 잡은 것 마냥 행세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저마다 진리의 ‘파편’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성공회 전통의 겸손함도 엿보기 어렵다.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어 다급하게 정죄하느라 바쁘다.

지역 교회 차원에서는 어떤가? 교구의 전례 행사는 그 본뜻에서 성직자들과 신자들, 즉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성 목요일 성유축복미사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사제 서약 갱신”도 그 서약의 되새김으로 양보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권위에 대한 ‘순종’을 위한 행사로 비치는 동안에 그 일치의 뜻도, 원래 예식의 뜻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뒤에는 어떤 불신이 자리하고 있을 텐데, 희미해지는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 모종의 으름장이 뒤따른다면, 그 조직의 앞날이 걱정스러울 테다.

교회 역사를 들춰보면 억압적 권력의 행사는 대체로 ‘일치’라는 이름 아래서 진행되었다. 예수님 고별사와 청원 기도에 담긴 일치의 근본인 사랑이 희미해지고 조직과 특권을 위한 다급한 일치가 앞서면서 그 본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급기야 일치를 빌미삼아 통제가 자리 잡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례도 그 본래 넓은 뜻을 잃고 교회 조직의 언어와 행동을 획일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참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토막을 읽는다. 그 자신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교권의 최고 위치에 있으며,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에 획을 그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치는 ‘신적인 긴박성과 신적인 인내심’ 사이에 자리 잡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마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치. 요한복음 17장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일치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알도록 기도하셨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와 진리와 거룩함.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 일치는 진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교 일치는 신학적 얼버무림이나 무관심에 근거할 수 없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일치는 진리의 회복과 더불어 가야 하고, 우리 삶을 다시금 거룩하게 하면서 가야 한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긴급한 일이다. 그 어느 것 하나를 먼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거기엔 신적인 긴박한 요구가 있고, 신적인 인내가 있다.

in Introducing the Christian Faith, SCM,1964. 76.

부활절 설교 2011 –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25th,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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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이 사회의 번영과 성장보다는 행복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도 있어서 인간의 웰빙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려 합니다. … 사람들이 국민 경제의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또, 기업의 번영이 개인과 공동체의 성취와 안정과 관계없이 이뤄진다면 그 어떤 의미도 없음을 분명히 말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추구할라치면, 금세 복잡한 것이 되고, 나쁘게는 더욱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곤 합니다.

지극히 깊은 행복은 우리가 바라보지 않을 때 슬며시 다가옵니다. 옛날을 회상하며 말하곤 합니다. ‘그래, 그땐 행복했지.’ 그러나 그 행복은 다시 만들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행복은 밖에서 옵니다. 우리가 맺는 관계와 환경과, 아름다움이 주는 뜻밖의 자극에서 옵니다. 행복은 우리가 열거할 수 있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오지 않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세계가 우리가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상상력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부활 사건은 우리 생각과 지식의 껍질에 싸인 세계를 깨뜨려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이겨내는 자비와 스러지지 않는 사랑이 새로운 법이 되는 새롭고 신비한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현실 그 자체의 지극한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 기쁨은 그냥 지나가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 기쁨은 그 핵심에서 모든 것의 근본으로 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우주에 대한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마련해 놓은 그 기쁨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 기쁨과 영원한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가 지녀야 할 존재에 대한 감각이 항상 거쳐야 할 통로입니다. 그동안 이기심과 두려움이 이 통로를 막았습니다. 때로는 이런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는 탁월한 사람과 그런 이야기, 열정적 사랑의 경험이라는 폭발적인 만남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보통’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로를 청소하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통해서 그리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둘러싼 어떤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다른 사람들도 이런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늘 물어야 합니다. 특별히 가난과 장애와 다른 여러 불리한 처지 때문에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 부활절의 기쁨은 사회의 긴장과 고통, 실망이 없는 이른바 영원한 행복 사회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기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 속에서도 그 현실에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확인해 줍니다. 그것은 사랑과 화해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 속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 세계는 좀 더 정직하고 용기 있게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수행할 때 만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부활 첫날 아침, ‘그 지극히 깊은 원천’이 터져서 열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목격한 것처럼, 우리도 잠시 그 어둠을 직시하고, 이내 우리 세계가 전복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 기쁨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원문: http://goo.gl/Xkvfq
발췌 및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