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윌리암 템플

Thursday, November 6th, 2008

예배는…

예배는 우리의 본성 전체를 하느님께 따르도록 내어 놓는 것이다.
예배는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우리의 양심을 회복하며,
하느님의 진리로 우리의 생각을 자라나게 하고,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화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뜻에 우리의 의지가 따르도록 내어 놓는 것이다.
예배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모아질 때,
이기심이 물러나고 우리 본성의 가능성인 무아가 드러날 것이다.

William Temple, Readings in St. John’s Gospel, 1939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 1881-1944) 캔터베리 대주교는 현대 성공회 신학과 정신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가운데 한 분이다. 또한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의 산파였던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그리고 “생활과 노동”(Life and Work) 위원회를 이끌었다. 열린 사고와 분명한 정치적 입장 때문에 성직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그리고 성직자가 되어서도 여러 곤욕을 치렀다. 그리스도인 학생 운동을 적극 지원했으며, 노동당에 가입한 몇 안되는 성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맨체스터 교구의 주교였을 때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면서 노사 간의 대화를 이끌었다. 신학자로서 하느님의 내재와 초월의 긴장을 성사적인 세계관으로 풀이하려 했고, 윤리학자로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책임과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전망을 나누며 사회 개혁에 앞장 섰다. 전쟁 중에 방송 연설가로 국민들을 위로했고, 나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의 피난을 도왔다. 1944년 10월 26일, 캔테베리 대주교직 재임 30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빛과 사랑이신 하느님, 주님의 종인 윌리암 템플의 증거를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비추셨습니다. 기도하오니, 그의 가르침과 모본을 통하여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신비에 대한 신앙과 용기와 확신을 갖게 하시고, 정의에 기반하고, 사랑을 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세워나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이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Lesser Feasts and Fasts, The Episcopal Church, 2006

캔터베리 대주교, 성령 강림, 람베스 회의

Friday, May 16th, 2008

세계성공회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가 올 여름에 열린다. 이 회의가 이미 벌어지는 교회의 분열을 멈출 수 있을까? 성공회 계약(the Anglican Covenant)은 그 분열의 치유책이 될까?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을 둘러싼 논쟁이, 세계의 가난과 질병, 불의와 같은 산적한 주요 선교 과제를 부차적으로 만들고 있는 처지이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일치는 세계를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 사명(창조-구원-자유)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수구파들이 벌인 람베스 회의 보이코트는 성공적이지 못한 듯하다. 그게 안되니까 여기저기서 불참을 선언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이들에게 대화를 바라기는 힘들다. 그런 와중에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령강림 축일을 기하여 세계 성공회에 서신을 보냈다. 람베스 회의의 목적을 성령께서 주시는 불과 은총에 마음을 열고, 성령에 대한 식별 속에서 선교 사명을 다하자는 것이다.

거칠게 번역한 서신 전문을 싣는다. 함께 기도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세계 성공회 주교들에게 전하는 캔터베리 대주교 성령강림일 서신

성령강림 축일은 성령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뤄진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세상 전체에 알릴 수 있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는 람베스 회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하느님께 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어, 그 은총을 입고 그분의 이름으로 용감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하기에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미 저는 이번 람베스 회의가 예전과는 다른 모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식의 의회 토론식 모임에 대해서 어려움을 표명한 분들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의 준비 모임은 새로운 방식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던 성령 강림 사건을 좀더 반영한 방식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핵심은 “인다바”(indaba)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인다바는 아프리카 줄루 족의 말인데, 서로 평등한 가운데서 토론한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떤 결정문을 타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따라야 할 하느님의 길을 구하기 전에, 어떤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서, 진정한 도전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 그 상응한 예를 발견하거니와, 베네딕트 수도자들이나 퀘이커의 모임에서 모두 함께 하느님께 귀울이면서 이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사귐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서로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회의 기간 매일 우리는 사려깊은 조정과 준비를 통하여 모든 목소리들(또한 모든 언어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함께 하는 두 주간 동안 이 모임들을 통하여, 세계 성공회 안에서 서로에게 반목해야만 했던 벽들을 무너뜨리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뢰의 수준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집중적인 기도와 작은 성서 연구 모임을 결합하여,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가 할 일에 대한 좀더 선명한 전망과 식별을 가져 올 것입니다.

지난 대림절기 서신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이를 위해서는 람베스 회의에 참석하는 분들이 윈저 보고서와 성공회 계약 과정이 계획하는 좀더 친밀한 일치를 향하여 기꺼이 온전히 참여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자신만의 어떤 제안이나,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지역적 우선성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여 본 분들은 알겠지만, 분열적이고 논란이 되는 행동이 있는 상황 속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몇몇 주교들과 공동의 전망과 과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논의했습니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양떼를 보살피는 사목자로서, 우리는 어떤 낮은 단계의 합의를 찾으려거나, 서로 정중하게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동의를 구하자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성령의 불을 구합니다. 그 불은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 제공된 하느님의 은총을 신실하게 선포하기 위하여 서로를 위하여, 서로에게 책임있게 행동하고, 그리고 하느님께는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더해 줍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길은 고통스러울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즉 가난과 폭력과 불의로 각인된 세계에 도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 드러날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잠재력은 매우 큽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바는 우리 세계성공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려는 것이고, 모든 주교들이 선교에 좀더 효과적으로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영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길 안에서 우리를 묶어 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불어 기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이러한 열매의 가능성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를 준비한 사람들은 함께 일하면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한가지, 우리를 위해 계획한 것들을 통해 우리의 사귐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쇄신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회의는 갈망이 가득한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갈망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갈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와 그 성령의 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쇄신하고 부흥하는 것 뿐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날마다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http://viamedia.or.kr
원문: http://www.aco.org/acns/news.cfm/2008/5/13/ACNS4403
일자: 2008년 5월 13일 (번역: 2008년 5월 16일)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Wednesday, April 30th, 2008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