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Tuesday, March 24th, 2009

오늘은 로메로 대주교(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1917~1980)의 축일이다. 그는 미사 봉헌 중에 군부의 총에 암살당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봉헌하는 미사 동안에 죽임을 당한 대주교는 역사에 두 사람이 있다. 영국의 베켓트 대주교와 엘 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다. 권력은 이들을 재갈 물리고 싶어했다. 그를 순교의 성인으로 만든 이들은 따로 있었다. 엘 살바도르 해방신학과 실천의 상징이었던 루틸료 그란데 신부의 죽음이었고, 대주교를 따랐던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들 안에 그란데와 로메로는 살아 있다. 예수처럼.

San_Romero.jpg

아메리카의 성인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 Pedro Casaldáliga 주교

하느님의 천사는 그날 밤에 선포했지…

엘 살바도르의 심장에 새겨진
3월의, 고뇌의 24일.
당신은 빵을 봉헌하고
살아 있는 몸
– 당신 백성의 부서진 몸
그 몸이 흘린 승리의 피
– 살육당한 당신 백성, 그 무지랭이들의 피
그것은 기쁨의 포도주로 물들어야 했다, 축마(逐魔)의 새벽!
하느님의 천사는 그날 밤에 선포했지,
그리고 말씀은 죽음이 되었네, 다시, 당신의 죽음 안에서
죽음이 되었네, 매일, 당신 백성의 헐벗은 육신 안에서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네,
우리의 낡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시 증언할 준비가 되었다.
아메리카의 성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로메로, 온 대륙의 무구한 희망의 자색 꽃
로메로, 라틴 아메리카의 부활절.
가난하고 영광스러운 목자, 돈과 달러와, 외환으로 암살당했으니.

예수처럼, 제국의 명령으로
가난하고 영광스러운 목자,
버려졌다.
교회의 권좌에 있는 당신의 형제들에게서
(교권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잘난 회당도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듯이.)

당신의 가난한 이들이, 그렇지, 당신과 동행했으니,
신앙 깊은 분노로,
당신의 예언자적 선교의 풀밭과 양떼로,
민중들이 당신을 거룩하게 만들었으니.
당신 백성의 시간은 당신을 축성하여, 하느님의 시간에 거하게 했으니.
가난한 이들이 당신을 가르쳐 복음을 읽게 했으니.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으로 상처받은 형제처럼
당신은 어떻게 울부짖을 줄 알았지, 그 동산에서.
당신은 두려움을 알았지, 전장에 있던 한 사나이처럼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말씀을 전할 줄 알았지, 자유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당신은 제대의 잔과 민중의 잔을 마실 줄 알았네,
두 손을 모아 예배인 봉사에 헌신했으니.
라틴 아메리카는 이미 베르니니의 영광 안에 놓였으니
그 바다의 거품으로 된 후광 속에
놀란 안데스의 성난 하늘 안에
그 모든 거리의 노래 속에
그 모든 감옥의 새로운 갈보리 안에
그 모든 참호의,
그 모든 제대의…
그 자녀들의 잠들지 않는 심장의 견고한 제대 안에서!

아메리카의 성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그 누구도 당신의 마지막 강론을 침묵시키지 못하리!

Monthly Review

마지막 강의: 죽음에 대한 태도

Wednesday, May 7th, 2008

간 밤에 읽은 랜디 포쉬 교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니, 아내가 눈물을 보인다(함께 유투브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두 살이 채 안된 딸에게 남겨준 말을 전해 주자 아침 밥 숟가락을 놓는다. (못됐다, 밥 먹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가만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밥 먹을 때 가장 커진다.)

랜디 교수는 그 “마지막 강의”에서 경이로운 평정심을 보여 주었고, 그 자리에서 그걸 지켜보던 아내의 모습을 보는게 눈물겨웠다. 이제 그는 가족들과 함께 사랑의 기억을 남기는 마지막 강의를 살고 있다.

결고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니, 결국 죽음 앞에 선 태도가 문제겠다. 일찍이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M.D. 1926-2004)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아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다섯 단계 감정 반응을 살핀 적이 있다(부정-분노-타협-의기소침-인정). 랜디 교수가 보여준 평정심은 타고난 낙천적 성격에서 비롯했을 몰라도 역시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런 죽음에 깊이 관여한다. 그 가르침들의 차원을 어떻게 보든 간에 그 가르침들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태도를 준비시키고 이를 맞이들이기 위한 훈련으로 들린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단계이다. 이 가르침의 변주들이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졌다. 때로 이미지는 신학의 총화이기도 하니, 두 가지 이콘과 성화가 떠오른다. 성모 마리아의 안식(Dormition of the Theotokos)과 프란시스 성인의 전이(Transitus of St. Francis)이다.

성모 마리아의 안식 성 프란시스의 트란지투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강보로 싸인 아기로의 탄생이다. 성모가 안았던 아기 예수의 전복이다. 저 하늘의 질서는 이 세상의 전복이다.

이 세상에서 이미 전복적인 삶을 살았던 탓일까, 프란시스 성인의 죽음에 대한 표현은 “전이”(Transitus)이다. 성인은 죽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로 옮아 갔다.

이런 가르침들로 그리스도교 전통은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도록 사람들을 도왔다. 심지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사귐(communion of saints)을 공언했고, 이것이 전례 상에서, 특히 성찬례 안에서 여전히 이뤄지는 것으로 가르쳤다. 모두 죽음에 맞선 인간의 태도를 위한 것이다.

삶에 대한 낙관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보고,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오지만,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보고, 다른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한국의 몇몇 교회는 죽음에 대한 이런 신앙을 가르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삼박자 축복(영혼구원, 건강, 재산)에 몰두하고, 저 세상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여기는 욕망을 부추긴다. 삶에 대한 집착을 나무랄 것이 없겠으나, 그걸 강화하고 그 너머를 보여주지 않으니 여타 사이비 종교와 다름 없겠다. (교회는 사람들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야 한다. 병상에 가서 큰소리로 안수하고 찬송하며 뻔히 아는 허망한 치유의 약속은 좀 삼가고.)

랜디 교수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 어떻게 죽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비주의의 고상한 기치가 된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의 본 뜻을 몸소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 “멋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마지막 강의는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에게 “멋진 존재”로 기억될 것이고, 그 기억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며 남은 생을 이끌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희망에 대한 설명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을 당장 위로하지는 못한다. 지금 할 일은 같이 울며 그 슬픔에 동참하는 일이다.

전례 운동 Liturgical Movement

Tuesday, June 29th, 2004

“기도가 전복적이지 않다면,
기도가 냉혹함과 증오와 기회주의와 허위를
무너뜨리는 일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의미 없는 일이다,

전례 운동 Liturgical Movement 은 혁명적 운동이어야 하며,
약속과 희망과 전망을 끊임없이 파괴하려는
모든 권력을 무너뜨리는 일을 추구해야만 한다.”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