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공회' Category

[전례력 연재] 숫자의 상징과 신앙생활

Saturday, July 1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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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상징과 신앙생활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그리스도교 안에서 숫자는 여러 상징으로 쓰이고 다양한 뜻을 지닌다. 숫자 자체는 뜻이 없지만,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드러내는 의미로 쓰였다. 수는 달력과 셈법처럼 생활에 밀접하다 보니, 신앙의 뜻을 더해 중요한 일을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데 도움이 됐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성서의 숫자 상징을 적절히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따라 새롭게 배열하고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

뜻을 붙이기에 따라 모든 숫자가 의미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대표 숫자 상징은 1, 2, 3, 6, 7, 8, 40, 50 등이다.

일 (1) – 첫 시작과 기원을 뜻한다. 성서에서 창조의 시작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는 다른 ‘잡신’을 넘어선 유일한 하느님을 상징하고, 신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일치를 뜻한다.

이 (2) – 성서에서는 대립하는 여러 성격과 사건을 비교할 때 쓰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에 자주 쓰였다. 제대에 촛불을 두 개 올려놓은 관습과도 관련이 있다.

삼 (3) –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한다. ‘삼’은 고대 사회와 종교, 철학과 수학 등에서도 자주 쓰여 ‘온전한 완성’을 뜻한다. 성서의 사용은 더 다채롭다. 예수 변모 사건을 증언한 세 제자, 그리스도의 십자자 수난 세 시간, 셋째 되는 날의 부활을 생각하게 한다.

육 (6) –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 ‘인간’이 만들어진 날의 숫자다. 그 탓에 인간과 그 연약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 연약함이 자기중심으로 흐르면 큰 악이 된다. 묵시록에 나오는 악의 숫자 ‘666’이 그것이다.

칠 (7) – 삼(3)처럼 완전함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창조가 완성된 날로 하느님의 거룩함을 상징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 위 예수의 일곱 말씀, 성령의 일곱 열매를 말할 때도 쓰인다. 역사에서 마리아의 일곱 슬픔과 인간의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목록에도 쓰인다.

팔 (8) –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팔’은 새로운 시작이다. 시간은 과거 역사의 쳇바퀴인 일(1)로 돌아가지 않는다. 부활은 새로운 시간, 새로운 창조인 탓이다. ‘팔’은 구약에서도 할례 날짜로도 쓰였지만, 신약 이후 ‘새로운 할례’인 세례의 뜻으로도 변화했다. 세례대나 세례당을 팔각형으로 만든 이유이다. 전례력에서 대축일을 작은 절기로 지키는 ‘팔일부’도 여기서 비롯했다. 또한, 팔은 칠 더하기 일(7+1=8)이라는 셈법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부활 은총은 기존의 완전함(7)에 하나를 더한 풍요로움을 드러낸다.

사십 (40) – 시험과 고난을 상징한다. 이 숫자는 성서에 빈번히 등장한다. 사십일 밤낮 비와 홍수,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 년, 모세의 시나이산 사십일 거주, 그리고 예수님의 광야 사십일 생활 등이다. 여기서 사순절의 절제와 극기 관습이 나왔다.

오십 (50) – 부활의 완성과 새로운 몸의 탄생이다. 부활절은 부활주일부터 성령강림에 이르는 시간이다. 부활은 성령 하느님이 내려서 신자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만드는 일로 완성된다. 구약의 희년(50년마다 해방과 안식) 사상을 이어받았다. 예수의 부활은 이제 교회가 예수의 몸이 되어 세상에서 펼치는 희년 실천이라는 말이다. 다시 여기에 사십 더하기 십(40+10=50)의 셈법이 등장한다. 부활은 고난보다 더 길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별세를 불교 관습의 49재가 아닌 부활의 50일째 자주 기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7월 14일 치 []

오래된 미래 – 성공회

Sunday, June 24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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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성공회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성공회신학)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 라는 책은 1991년 출간되어 현대인의 삶에 깊은 성찰을 제시했습니다. 히말라야 자락 ‘라다크’ 사람들의 전통과 변화를 살피며 새로운 삶의 대안을 고민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자주 잊거나 잃은 가치를 되새겨 줍니다. 불행하고 절망하는 삶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를 넘어서는 방법에 관한 고민과 지혜를 나누려 합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전통’의 지혜 안에서 생태 친화적인 공동체로 살았습니다. ‘전통’은 혹독한 자연환경을 견디며 터득한 선조의 지혜와 가치입니다. 세대 간 협력과 공동 소유, 검소한 생활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관광 개발이 시작되어 실제로 생활 편의는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더 가난하다고 느끼고 공동체 문화도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현대화의 홍수에 몸을 맡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전통의 가치와 현대의 흐름을 새롭게 접붙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래된 미래’는 성공회의 전통과 고민에 딱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성공회 신자이자 예배학자로서 개신교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로버트 웨버 교수가 이 말을 교회와 전례에 적용해서 반성을 이어갔습니다. 교회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예배와 신학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변화에만 눈을 돌렸습니다. 전통을 시대와 관습에 가두어 기득권을 휘두르는 세력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의 근거와 성찰의 거울이 부족한 채 시도하는 ‘새로운 변화’는 매혹적일지 몰라도 자주 위태롭습니다. 교회를 성사(sacrament)와 역사의 실체로서 살지 못하면 친목 단체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개혁과 대안의 실상이 의도와는 반대로 개인주의와 영성주의로 미끄러지는 이유입니다. 그 결말은 대체로 종교 상품화과 소비주의입니다.

성공회는 신앙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초대교회 전통에서 길어 올린 예배와 신앙의 가치로 사려 깊게 자신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교리에만 얽매이지 않고, 현대 학문에서 배우고 대화하며 오늘의 문제들과 정직하게 씨름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예배는 오랜 신앙의 선조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초대합니다. 켜켜이 쌓인 역사를 전례 안에서 체득하고 음미하여 새로운 시공간을 상상하고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교리와 신학은 신앙의 가치를 오늘에 되살리려고 정직하게 흔들리며 배웁니다. 그 흔들림이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와 배움 안에 모인 사람들이 부족하나마 함께 모여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미래인 성공회는 당장 시원하지만 갈증만 더하는 ‘사이다’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맑은 정직한 생수를 나누려 합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생색내기 성과로 사람을 탈진하게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 곰삭아 빚어진 맛과 영양의 잔치를 널리 나누려 합니다. 음식을 내는 오래된 그릇이 조금 답답하고, 시중드는 걸음이 흔들려 조금 못 미더워도, 서로 받아주고 견디어 순례의 잔치를 이어갑니다.

오래된 미래의 잔치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1.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복음닷컴 2018년 6월 24일 치 []

[전례력 연재] 6월의 아픔과 한국 성공회 순교자

Saturday, June 23rd,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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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세실리아의 순교 – 스테파노 마데르노, 1600)

6월의 아픔과 한국 성공회 순교자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화해와 평화의 기운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다. 분단 70년 이후 이어진 대결과 긴장, 갈등과 위협의 어둠이 걷히리라는 희망이 크다. 몇몇 정치 권력자가 만든 일이 아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권력도 제대로 설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역사의 질곡을 통과한 이들의 삶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땀과 눈물과 피를 겹치고 포개어 기억하는 신앙 위에서 참된 평화가 싹 튼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희생을 따라 목숨을 바친 일을 순교라고 했다. 순교의 본래 뜻은 복음의 증언이다. 예수의 희생과 성인의 순교가 짝을 이룬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까지 초기 삼백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인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붉은 피를 흘렸다. 공인 후 피의 순교는 멈추었으나, 신앙인들은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기도와 노동으로 땀을 흠뻑 흘렸다. 후대에 이르러, ‘피의 증언’을 ‘적색 순교’로, ‘땀의 증언’을 ‘백색 순교’로 이름 붙였다. 교회 역사에서 피와 땀의 순교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번갈아 일어났다.

대한성공회는 한국 전쟁 중에 피의 순교자들을 냈다. 6월의 상처와 아픔이 우리 교회에도 깊이 새겨졌으니, 이 순교를 기억하며 예수의 희생에 드러난 사랑과 희생, 용서와 화해를 살아갈 책임이 크다. 교회 역사가 성인의 축일을 피와 땀의 순교일에 지정하고 기념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한성공회의 순교자 축일은 역사적 사건에서 동떨어져 있다. 현행 기도서에 나온 9월 26일 ‘모든 한국의 순교자들’은 한국 전쟁 중 성공회 순교자들과는 관련이 없다. 이 날짜는 <1939년 공도문>에 ‘조선인 치명일’로 처음 등장한다. 그 기원은 1925년 조선천주교가 같은 날짜에 지정한 ‘조선 순교 복자 대축일’이 분명하다. 당시 성공회는 다른 교단을 존중하여 ‘조선의 순교자들’을 기념했고, 전쟁 후에 나온 <1965년 공도문>에도 같은 날을 ‘한인 치명일’로 새겼다. 이 때문에 다시 2004년에는 ‘모든 한국인 순교자들’로 잘못 표기했다가, 수정판(2018년)에서 ‘한국의 순교자들’로 바로 잡았다. 그런데 정작 천주교는 1984년 ‘복자’들을 시성하면서, 이 축일을 폐기하고 9월 20일로 옮겨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을 지킨다.

한국 전쟁 중 성공회 순교자 명단과 순교일도 논란이다. <대한성공회 100년사>(1990년)는 이원창, 윤달용, 조용호, 리도암, 홍갈로 신부와 마리아 클라라 수녀를 순교자로 명시하지만, 같은 해 함께 나온 <선교 백 년의 증언> 중 ‘6.25 동란의 순교자들’ 부분에는 임문환 모세 신부(1900-1950?)의 이름이 나온다. 전쟁 후 북한 지역 성직자의 생사를 파악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빼거나 단순 실수로 빠뜨린 모양이다. ‘납치 연행’의 날짜도 기록이 제각각이고, 홍갈로 신부의 순교 날짜 기록도 엇갈린다.

우리 신앙의 역사 속에 새겨진 ‘피의 순교자들’을 다시 확인하고, 순교자 후손과 상의하여 순교자 개인의 별세 날짜를 바로 잡거나 새로 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대한성공회의 순교자들’ 축일을 따로 지정하여, ‘피의 순교’를 기억하고, 역사에서 잊힌 이들의 아픈 ‘눈물의 순교’를 되새기며, 우리 신앙인이 이어갈 ‘땀의 순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

  1. 성공회신문 2018년 6월 23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