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삼위일체의 삶과 연중시기
Saturday, June 9th, 2018삼위일체의 삶과 연중시기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과 관련하여 <1965년 공도문>과 <2004년 기도서>의 큰 차이 하나는 성령강림주일 이후 시기의 명칭이다. <공도문>은 이 시기를 ‘성삼후’(성 삼위일체주일 이후)로 불렀지만, <기도서>는 뜻이 불분명하고 밋밋한 ‘연중시기’라고 이름 붙였다. 1960년대 천주교의 전례력 개정을 그대로 따라 한 결과다. 천주교 내부에서도 말 많은 명칭을 성공회가 한참 후에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다. 1960년대라면, 우리 <공도문>이 나온 바로 그즈음인데, 우리 전통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천주교는 ‘연중’이라는 말은 라틴어 ‘오디나리우스’에서 번역했다. 그러나 같은 말인데도 쓰임새가 서로 달랐다. 교회에서는 ‘전례의 질서’를 뜻했지만, 세상에서는 ‘그저 보통’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전례의 시간과 주일은 모두 특별하고 뜻깊기 때문에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이 문제를 알아차린 몇몇 성공회 기도서는 ‘연중-보통’이라는 용어 대신에 ‘특정’(Proper)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지만, 교회의 깊은 전통에서 보면 여전히 부족한 표현이다.
서방교회에서 성 삼위일체 주일 관습은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위일체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이 세력을 얻자, 지역 주교들이 정통 교리를 되새겨 강조하는 뜻으로 제안했다. 그러나 이 축일을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로 공식 확정한 때는 14세기이다. 이러한 결정에는 그 4백 년 사이에 영국교회에 뿌리내렸던 전통 때문이라는 주장이 높다. 후에 순교자로 잘 알려진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케트(1118-1170년)는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에 성품됐고, 이후로 이 주일을 성삼위일체를 기리는 주일로 지키게 해서 널리 퍼졌다. 그런 탓인지, 영국교회 전례 전통인 ‘사룸 Sarum 전례’는 이후 주일을 모두 ‘성삼후 주일’로 불렀다. 아무래도 우리 <공도문>은 이 전통 아래 있다고 하겠다.
동방교회는 사정이 다르고 울림이 더 크다. 성령강림주일과 성삼위일체주일이 같다. 부활절기의 절정으로서 성령강림사건을 되새겼고, 부활 사건 안에서 구원을 완성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과 행동에 감사하고 경배하려는 뜻이었다. 부활절기에서 똑 떼어 성령강림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교회의 탄생’이라고 풀이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교회는 부활로 얻은 새 생명의 공동체가 성령으로 축성되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고 일치하면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정교회가 그 다음 주일을 ‘모든 성인의 주일’로 지키는 관습은 이러한 신학적 일관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미 채택한 ‘연중시기’라는 표현은 언젠가 바로 잡았으면 한다. 그 전에 우선 ‘성삼후 시기’는 ‘연중’ 내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펼치신 구원 행동을 우리 신앙인과 교회의 몸에 되새기는 시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이 시기는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시고, 사랑과 희생을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며,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에 우리 삶을 포개는 훈련의 시간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처럼 세상이 겪는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서로 참아주고 환대하며, 함께 시련을 이겨내며 희망을 만들어 가는 실천의 시간이다. 푸르른 생명의 상징인 ‘녹색’을 입고 장식하여 생명을 향한 수고와 땀으로 그 열매를 맺어가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전례력의 막바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를 만날 수 있다.
- 성공회신문 2018년 6월 9일 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