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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Wednesday, February 25th, 2009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V

잃은 말을 잃고, 써버린 말을 써버렸다면,

들려지지 않은, 말해지지 않은

말씀은 말해지지 않고, 들려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말, 들려지지 않은 말씀은,

한마디 없는 말씀, 그 말씀은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위해 있으니;

그리고 빛은 어둠 안에서 비췄고

말씀에 대역하여 불안한 세계는 여전히 흘렀으니

침묵하는 말씀의 언저리를 돌아.

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느냐.

어디서 말씀을 찾을 것이며, 어디서 말씀이

다시 들려질까? 여기는 아니리, 충분한 침묵이 없으니

바다도 섬도 아니리, 아니리

육지도, 사막도, 습지도,

낮 시간과 밤 시간에 함께 깃든

어둠 속을 걷는 이들에게

여기는 옳은 시간도 옳은 공간도 아니니

은총의 공간은 없으리, 그 얼굴을 피하는 이들에게는

기쁨의 시간은 없으리, 소음 속에서 걸으며 그 목소리를 부인하는 이들에게는

베일을 쓴 여인은 기도할까,

어둠 속에 걷는 이들을 위하여, 그대를 선택했으나, 그대를 적대하는,

계절과 계절,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며 찢겨진 이들을 위하여,

순간과 순간, 말과 말, 힘과 힘 사이에서, 기다리는 이들을 위하여

어둠 속에서? 베일을 쓴 여인은 기도할까

입구에 서 있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떠나지 않고 기도하지 못하는:

선택했으나 적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느냐.

베일을 쓴 여인은 연약한

주목(朱木) 사이에서 그녀에게 상처입힌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까

그리고 무서움에 떨며, 항복할 수 없는

그리고 세상 앞에서 우겨대며, 바위 사이에서 부인하며

마지막 사막에서 마지막 푸른 바위 앞에서

말라버린 정원의 사막 사막의 정원

말라버린 사과씨를 입 밖으로 내뱉는 이들을 위하여.

아, 내 백성들아.

(번역: 주낙현 신부)

이미지와 이콘 사이에서 –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3

Monday, February 23rd, 2009

이미지와 이콘에 대한 생각과, 우리 교회의 허명(虛名)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밀려든다.

1.
한동안 “이미지 정치”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가? 2mb도 어떤 성공 신화와 삽질하는 이미지때문에 당선됐나 하는 생각이지만,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그 삽질은 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만큼 자기 편한대로 조작가능한게 이미지다. 이게 앞에 언급한 천주교에도, 우리 성공회에도 해당이 되지 않나? 문제는 이미지가 무엇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요즘 이미지는 위선과 동의어로 들린다.

2.
이미지와 말뜻이 같은 다른 말로 “이콘”(icon)이 있다. 특히 정교회 전통의 신학적 영성적 그림을 말하는데 쓰일 때다. 이때 이콘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성사(sacrament)와 그 정의가 가깝다. 감춰져 있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진리의 신비는 감춰져 있는데, 이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이콘이 보여주는 상(이미지)은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를 감상하려면 색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그 첫걸음은 먼저 기이하고 불편한 상을 깊이 응시하여, 그것이 내게 말걸고 도전하는 것을 음미하는 일이다.

Rublev's_saviour.jpg

진리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진리를 드러내는 이콘이 우리 지각을 불편하게 할 것은 당연한다. 반면에 “이미지 정치”는 우리를 낭만으로 초대한다. 우리의 욕망이 실현되는 어떤 환상을 비춘다. 우리가 드러내야 할 감추인 것은 무엇인가?

5.
남들 탓하자고 일련의 글을 올린 게 아니다. 결국은 제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 질문은 대뜸 이렇다. “그럼 우리 (혹은 ‘느네’) 성공회는?”

좋은 이미지를 가졌다고들 한다. 가난하고 청렴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그렇고, 내 동료 선후배 사제들의 삶을 생각하면 속 상해서 말이 안나올 정도다. 그러나 더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가난하고 작으니, 청렴하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속에 여전히 “중산층 욕망”이 가득한데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조건에서 비판의 우위에 선 것뿐은 아닐까 하고. 그게 혹 허상은 아닐까? 허명은 아닐까?

천주교 주교회의는 성명서라도 내고 있는데, 그나마 그 입에 발린 말도 성공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 몸으로 보여주겠다고? 우리 성공회의 정의평화사제단(예전에는 정의실천사제단이었다)은 어디에 이름을 팔아 먹었는지, 그 안에서 애쓰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모르겠다. 천주교 주교회의의 성명서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신학적 반성의 언어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어떤 신앙적 실천의 면모가 성공회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걸핏하면 87년도 6.10 항쟁의 구심에 성공회가 있었네 하고 짐짓 추억한다. [유월민주항쟁 진원지]라는 돌덩이 하나 구석에 박아두고 ‘왕년에 이랬네’하는 것인가? 왕년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왕년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없다. 그 왕년을 이야기한다 쳐도, 전체로서 교회가, 우리 성공회가 유월 민주화 항쟁에 얼마나 깊이 참여했는가? 아니, 그때 열심히 참여했던 이들을 지금 우리 교회 어느 자리에서 찾아 볼 수 있는가?

이 허명을 팔지는 말 일이다. 그 허명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라면, 치욕과 굴욕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우리를 더 온전하게 세울 수 있다. 불편함을 대면할 때라야, 그저 보이는 것 너머로 감춰진 것들이 환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2

Monday, February 23rd, 2009

1.
나는 “성공회” 사제다. “신부” 혹은 “사제”라는 호칭 앞에 굳이 “성공회”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사기치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천주교 신부를 사칭했다는 죄목을 가장 먼저 쓸 공산이 크다. 정교회(Orthodox Church) 신부 혹은 사제도 굳이 그렇게 해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수식어가 붙지 않은 “신부”나 “사제”는 천주교만의 전유물로 당연시된다.

긴 말 필요없이, 천주교가 수적으로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숫자에 껌벅 죽게 된지라, 정당한 이유나 근거에 기반한 설명이 먹히질 않는다. 소수에 대해서는 ‘저리 찌그러져 있어!’라는 호통이 우세하거나, 그들이 한소리라도 낼라치면 ‘가난한 놈들은 질시와 불평만 많다!’라는 찬소리를 되받기 일쑤다. 우세한 목소리와 숫자들이 부각되어, 그저 작은 것들은 가려지고 감춰지고 만다.

왜 이런 허튼 소리로 시작했나? 한국 천주교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하려는데, 혹시 사칭한다고 할까봐 미리 켕켜서다. 제 것 아닌 다른 교단 전통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적지 않게 부담스럽다. 천주교라는 거대 무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천주교 전통에 기대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내 성소 식별의 과정 안에서 인간의 연으로나 공부의 맥락에서 빚진게 크거니와, 지금도 여러 천주교 사제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으니 한마디 보탤 수는 있다는 생각이다. (아, 콩만한 간덩어리여! – 도입이 길다는 건 벌써 쫄았다는 거다!)

2.
일전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면서 그분의 30여년 전 말씀을 인용한 바 있으나, 현재 한국 천주교는 스스로를 “담장 안에서” 성명서나 발표하는 무리가 되어가는 듯하다. 사실 그 성명서라는 것들이 내내 그럴싸하게 들린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촛불 정국 때나 용산 참사 사건에서도 보여준 성명서에 나타난 “말”들은 좋다 못해 자못 훌륭하다.

그런데 이를 내놓는 “주교회의”(산하 정의 평화 위원회) 내 주교들의 행동들은 이 “말”과는 판이하다. 작년 8월에 있은 서울대교구의 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사제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보면 분명하다. 흥미롭게도, 주교회의의 성명서는 일이 다 끝나갈 무렵,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과 주장들을 하나 마나 한 소리로 요약한다. 문제는 이게 마치 어떤 행동의 신호처럼 해당 사건에 관련된 이들에 대한 조치가 따라 나온다는 것이다. 용산 참사에 대한 성명서도 그런 인상이 짙다. 이게 다시 시국 미사를 주도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작은 무리를 향한 또다른 조처에 대한 신호일까? 시국 미사, 참사를 당한 이들을 위한 위령 미사를 드리는 이들의 주축이 이번에는 수도회 소속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이어서 그 조처가 미치지 못할까?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추모 열기로 천주교는 다시 전국민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 참에 신자들도 더 늘어나지 않을까 점치는 수준이라 한다. 그런 호기를 잡지 못한 다른 교단이나 종교들은 아쉬워 하는 바가 없지 않다고들 한다. 이 참에, 이렇게 보이는 것들과 감추인 것들 사이의 간극을 다시한번 돌아다 본다. 조명을 받은 물체는 곧장 어둔 그림자를 남긴다. 그 덩치가 클 수록 드리운 그림자 더욱 크고 깊다.

3.
이쯤 적어놓고 생각을 삭이고 있는 참에, 오마이뉴스의 기사가 보인다 (적으려던 여러 생각을 접게 해주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김수환 추기경 추모와 더불어 생각한 한국 천주교의 보수화에 대한 걱정어린 분석 글이다. 대체로 공감한다. 개인적인 관찰뿐만 아니라 천주교 쪽 지인들에게서 들었던 걱정들과 대체로 일치하는 내용이다. 등록 교인 수는 많아지는데 실제로 주일 미사 참석수는 줄고 있다는 관찰도 보인다. 주위에서 듣기로 젊은 세대의 냉담률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종교의 “심리적 중산층화”가 아닐까 한다. 말인 즉, “중산층”의 욕망, 그리고 “중산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종교 선택에서도 확연하다. 개신교인들이 줄고 있다고는 하나, 이른바 강남 대형 교회들이나 그 밖의 “중산층”을 선교 대상으로 한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장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 천주교는 그동안 비판적이면서 지적인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개신교의 그것과 차별화되기도 해서 더 유효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짐짓 뻐기는 “중산층 욕망”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에서, 성장하는 개신교 대형 교회와 천주교의 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는 동안 이 ‘이미지’ 뒤에 가려진 힘없는 목소리는 더욱 힘을 잃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