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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목요일: 켜켜이 쌓인 시간들

Thursday, March 20th, 2008

성삼일(Holy Triduum)은 교회력 혹은 전례력에서 경첩점(hinge point)이라 하겠다. 구속사의 모든 사건들이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부활 밤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사건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성 목요일은 이런 전환의 시작점이다. 사순절의 끝나는 지점에서 성삼일이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 날은 예수와 함께 했던 세월들이 다다르는 수렴점이자, 그 수렴의 끝에서 새로이 드러나는 또다른 시간이다. 이 날은 그래서 켜켜이 쌓인 시간들, 혹은 시간의 중첩이다. 예수께서 공들인 삶은 오늘 있은 두 사건에 집적되어 있다. 세족과 마지막 만찬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종의 일을 주인의 일로 전복시켰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는 그들도 그렇게 섬기며 살라고 당부하셨다(Do This!). 그게 없으면 예수와는 상관 없는 삶이다. “주의 종”이란 말이 오염되어 어처구니 없는 “교회 권력”의 표현이 된 이율배반은, 곧 이 신앙 전통에 대한 배신이다.

세상을 섬기로 온 자신을 드러낸 예수께서는 아예 자신의 몸을 주어 먹고 마시라고 한다.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는 분부가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이것은 내 몸 혹은 피” “이다”(is)에 집중하며 교리적인 논쟁을 벌여 왔다. 어떻게 떡 혹은 포도주가 예수의 살”이고”(is) 피”이냐”(is)를 두고 지금도 갈라져 싸운다. 자기 식대로 믿지 못하면, 자신의 성찬례에도 초대할 수 없다는 게 법이 되었다. “이 일을 행하라”(DO THIS)는 말씀은 안중에 없다. 이 역시 이 신앙 전통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인류학자 기어츠(Geertz)는 삶에 대한 해석과 기술은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지사 그건 삶이 투텁기 때문이다. 이미 한껏 두터운 사건(thick event)인 성 목요일의 예수 사건들은 교회 역사 안에서 더욱 복잡해졌다. 오물로도 역사는 쌓여가듯 역설과 아이러니가 범벅이 되어 천연덕스럽게 오늘의 전례 행사를 이룬다. 이 역시 또다른 시간의 중첩을 만든다.

전통적으로 성 목요일에는 성유 축복 미사(Chrism Mass)를 드린다. 기름은 그 복잡한 용도에서 다양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는데 쓰였고, 연고의 원료인 탓에 기름 자체가 치료제로 사용되었고, 요즘 식으로 향수로 쓰이기도 했다. 기름의 제의적 사용과 의미 부여가 이어졌다. 세례식에서는 작은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사람)가 되는 상징으로, 병자들에게는 치유 성사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직 서품식에서는 어떤 특권의 전이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기름을 성 목요일에 축성했던 것은 부활 밤에 있을 세례식과 견진에 쓰도록 하려는 편의에서 비롯했다. 더구나 주교가 축성하는 이 기름을 다 받으러 와야 하니 교회 일치의 상징으로도 보기 좋았겠고,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지역 교회로 돌아가 성찬례 제정 기념 미사를 드리는 것도 의미가 컸겠다. 여러모로 성 목요일은 다양한 전례와 그 의미로 한층 두터워졌다.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발명은 이를 더 두텁게 한다. 성유 축복 미사와 함께 하는 “사제 서약 갱신”이라는 것이다. 성공회에서도 어느 틈엔가 일반화되다시피 한 이 순서는 사실 1970년대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6세가 강력히 권장하여 퍼진 것이었다. 교황은 이 날을 “사제들의 축일”로 보았다. 지역 교회에서 성유를 받으러 사제들이 모이는 날인데다, 성찬례 자체가 제정된 날이니, 이 날처럼 교회의 일치(혹은 주교와 사제의 일치)와 사제들의 분명한 권위를 세우기 좋은 날이 어디 있으랴. 이 무렵은 성공회와 천주교가 갈라진지 400여년 만에 대화와 협력을 강력하게 모색하는 시기였으니(교황 바오로 6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마이클 램지), 이게 성공회에 흘러드는데 별 무리가 없었을게다.

그러나 이게 성유 축복 미사를 원래대로 잘 드러내는가? 내 경험에서 보나, 교황의 확신에서 엿보이는 생각은 이 날은 “사제들의 축일”이지, 성유의 여러 용법들과 의미들,그리고 사목적인 교회의 일치가 다시 확인되는 것 같지는 않다. 풍요로운 축복과 치유의 상징은 성유의 빈약한 사용도에서 보듯 축소되고 위약해진다. 그 틈 사이로 한편에는 사제들의 자의식 확인이, 다른 한편으로 주교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확인하려는 위계 질서의 기대가 끼어든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의 한 층일뿐, 나무란다고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다. 성 목요일 자체의 두 사건에 대한 아이러니이되 시간은 이를 삼켜서 오늘을 남기니까.

다시 말해 시간은 이러한 배반과 아이러니 안에서 축적된다. 그리고 현재의 전례 행사와 우리의 삶을 일구어 나간다. 시간 안에서 드러내고 숨기는 일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성 목요일은 켜켜이 쌓인 시간들로 촘촘히 박혀서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이룬다. 이 시간의 중첩은 한무더기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순된 우리 삶의 자화상을 비춘다. 계몽을 위해 이 날 전례 행사의 어떤 통일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이미 빗나간 욕망이며, 시간이든 역사이든 단번에 뛰어넘어 본질을 정화해내서 보여주겠다는 단언은 광신이다. 오히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포장하려는 속셈이 빈번하다. 그러니 이 시간의 중첩 앞에서 다만 우리를 비추어 성찰할 일이다.

성 목요일 전례 행사의 마지막은 제대의 모든 장식을 벗기는 일이다. 제대보를 걷으면 제대는 화려함 뒤에 숨겨왔던 몸을 드러낸다. 예수의 몸이 벗겨진 상징이라고 단답형 답을 들이 밀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 시간의 중첩 안에서 스스로를 발가 벗기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 그래야 비춰 볼 수 있을테니까. 그 비추인 나신이라야만 역사와 그에 깃든 상처 사이 사이에 박혀 관계하는 예수의 세족과 성찬례가 흐릿하게나마 다시 돋아나리라.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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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테네브레 Tenebrae

Tuesday, March 18th, 2008

 

Tenebrae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께 돌아오라.” 

테네브레 Tenebrae는 “어둠” 혹은 “그늘”이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이름을 딴 촛불 예배를
성주간 마지막 3일 동안에 드렸습니다.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비롯하여,
다른 여러 개의 촛불들이 마련되어 있는 둘레에 혹은 그 앞에 모여,
탄식의 시편들을 읽고, 예레미야 애가를 노래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담은 복음을 읽으면서,
차례로 촛불들을 꺼나가며 드리는 기도 예식입니다.

마침내, 하나의 촛불을 제외한 모든 불들이 꺼지고,
그 마지막 촛불마저도 어딘가로 사라져 가서,
우리는 모두 침묵이 지배하는 어둠에 묻힙니다.

그 어둠 속에서 울려나는 굉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고,
어둠이 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제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아무 말 없이 흩어질 뿐입니다.

정말 이렇게 속절없이 끝나고 마는 걸까요?
(200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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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성사 – 두 단어, 혹은 한 단어?

Monday, March 17th, 2008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소식지에 보내느라 쓴 글인데, 여기에도 실어서 나눈다.

“말씀과 성사” – 두 단어인가, 한 단어인가?

(이야기 전에 한가지 넋두리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는 일의 고달픔입니다. 그 깊고도 오래된 전통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회를 설명하거나, 우리의 신앙 생활 형태를 다른 이들과 쉽게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마디면 ‘파박~’하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리저리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명쾌한 단답’을 바라던 사람들은 금새 지치고 맙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회가 겪는 현실입니다. 또 특정한 신앙적-신학적 흐름이 지배하는 바람에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적-신학적 언어들이 그 틀에 갖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수정되기까지는 우리의 전통을 자세히 공부하고 설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당연한 두 단어를 두고, 이런 제목을 붙이는 건 좀 튀어버려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이 비추듯이, 그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교회는 오랜 동안 “말씀과 성사”를 한 단어로 이해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를 서로 대립되는 다른 두 단어로 이해된 데는 사연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사연을 잠시 훑어 보면서 “말씀과 성사”가 결국인 하나인 이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말씀과 성사에 대해 구구한 말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개신교는 말씀 중심의 교회, 천주교는 성사 중심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연장 선 상에서 우리는 성공회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한마디씩 평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짐짓 성공회의 훌륭한 균형 감각 찬탄하는 결론을 내면서도, 개신교나 천주교에 대한 비아냥과 부러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찜찜’한 평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해놓고도 개운치 않습니다. 혹은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명확히 가야한다는 대범한 주장을 펴는 경우도 왕왕 듣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을 잘 살피면, “말씀과 성사”가 서로 대립하게 된 연유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자기 주장 때문이라는 것과, 또 “말씀과 성사”에서 성공회와 정교회 같은 신앙 전통이 이해하는 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게 드러납니다.

우선 쉽게 이해하는 대로 “말씀”과 “성사”를 떼어 놓고 이야기해 봅니다. 당장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신-구약 성서를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설교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도 아니면 성서를 읽거나 설교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감동의 물결을 말하는 것인가요? 어느 것도 시원한 대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시다(창세기 1장).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선언입니다(요한복음 1장). 여기서 “말씀”은 성서도 아니요, 설교도 아니요, 우리의 감동도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어떤 분, 바로 하느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항상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사건들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은 “성사”의 원칙과도 같습니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정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그 원초적인 성사의 사건은 무엇보다도 창조의 은총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육신의 은총이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눈으로 보이는 성사의 사건입니다.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 교회들은 말씀을 성사요,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을 뇌에서만 작용하는 어떤 의사 소통 수단이나, 지식 정보의 전달 수단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머리” 중심의 그리이스 철학 전통과 교류하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노라고 말합니다. 이 탓에 말씀과 사건(성사)의 연결점이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교회 전례의 발전 속에서 “말씀”은 설교로 축소됩니다.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고 만지는 경험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는 지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설교보다는, 겉으로 분명히 보이는 성사의 행동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잊혀졌던 “말씀”의 위치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많은 경우 “성서”와 그에 대한 짐짓 “올바른 해석”(교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사와 전례 안에서 그 위치와 관계를 되살리기보다는, 다시 성사와 대립하고 대결하는, 그리고 성사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흐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다른 극단입니다.

성공회 전통은 이 행복하지 못한 관계를 세 가지 방법으로 화해시켜려 했습니다. 첫째로, 먼저 기도서의 전례문들을 성서의 근거에 따라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례와 성찬례뿐만 아니라, 다른 사목적인 성사들에도 해당합니다. 둘째로, 성찬례 안에서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두 부분을 대등하게 배치하려 했습니다. 물론 유기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양적인 균형잡기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로는 매일기도(성무일도)를 수도자나 성직자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되살려서,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잔치(성서 독서, 찬양, 중보 기도)를 회복하도록 했습니다.

성공회 전통은 다른 전통들, 특히 정교회 전통들과 대화하면서 말씀과 성사의 관계를 좀더 깊이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이 활성화된 20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이 말씀과 성사에 대해서 좀더 일치된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잠정적인 결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과 성사는 하나인 전례의 두 축입니다. 한 축이라도 빠지면 온전한 전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없는 성사는 없습니다. 성사는 말씀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가시화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성사없는 말씀도 없습니다. 말씀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고 선포되어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의 구조는 그 관계를 아주 잘 드러냅니다. 말씀의 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 주를 이룹니다. 독서(구-신약, 시편, 복음서)는 그 자체로 설교와 대등할 만큼 중요한 말씀 선포의 사건입니다. 독서 자체가 말씀 전례의 핵심입니다(이런 점에서 독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전례 행동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는 독서에서 읽은 말씀을 우리의 상황 속에서 가져다 주는 길잡이이며, 이를 통해서 뒤에 이어질 성찬의 전례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비추어 줍니다. 그래서 설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가교입니다. 앞에서 일어난 말씀 듣기와 길잡이가 우리 몸에서 살아나는 까닭은 성찬이라는 살아있고 구체적인 상징 행동때문입니다. 성찬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말씀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성체를 통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십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다른 성사들에도 저마다의 특징 속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참에, “말씀”과 “성사”에 대한 분리된 강조점을 각각 “저교회”와 “고교회”의 틀에 대입시키려는 흐름을 잠깐 짚었으면 합니다. 이런 대입법이 그렇듯하게 보이지만, 그 역사적인 기원과 속성을 따져서 쉽게 말하자면, “저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지 않는 교회 흐름이고,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는 교회의 흐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구분짓는 것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요즘 개신교의 여러 교회들이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말씀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새로운 말씀 선포와 그 경험의 영역을 성사 안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말씀 중심의 예배라고 했던 것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사 우위를 고집했던 교회들은 말씀의 성사성을 다시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전통은 지금 “말씀은 성사를 비추고, 성사는 말씀을 구체화하여 우리 몸으로 느끼게 한다”는 고대 교회의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말씀과 성사”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사의 전례인 성찬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뤄집니다. 총체적인 전례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성서를 말씀으로 해석하고 이를 구원의 사건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사는 그런 말씀 경험의 틀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과 성사의 의미와 관계를 이렇게 거듭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말씀을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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