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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전통과 정체성

Monday, September 8th, 2003

얼마전 있었던 미국 성공회 관구 의회 General Convention 2003 에서 첫 공개 동성애자로서 주교로 선출된 진 로빈슨 신부에 대한 주교 인준이 있었다. 이를 둘러싼 미국 성공회 및 세계 성공회의 논란과 갈등 속에서 성공회의 전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자료를 번역하여 나누고자 한다. 아래에 내가 공부하는 버클리 성공회 신학교 CDSP 의 신약학 및 영성신학 교수이신 빌 컨츄리먼 신부님의 글을 허락을 받아 싣는다.

성공회 전통과 정체성 – 최근의 갈등에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윌리암 컨츄리먼 신부(The Rev. Dr. William Countryman)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성공회 신학교 (CDSP)
신약학 및 영성신학 석좌 교수.

많은 교회들이 우리 시대에 직면하는 많은 갈등 속에서 갈라지고 있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우리 성공회 신자들이 이러한 분열하는 다른 교회들의 신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특별히 성공회 신자로서 겪는 우리의 갈등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은 이러한 갈등에 대한 우리의 처신이 어때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이 질문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우리 성공회 신자들이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성공회 정신이 아니라, 이와는 전혀 다른 개신교 전통에 의해 형성된 종교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안의 갈등을 이 사회의 문화에 의해 지배되고 있은 어떤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공회적인 길을 통해서 다루려 하고 있는지를 묻고 성찰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이란 종교개혁을 통해서 형성된 성공회 정신의 광범위한 흐름을 뜻한다. 이 전통은 16 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스스로 하느님의 뜻을 명백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 형태의 그리스도교에 대해 반대하면서 등장했다. 그 하나가 반종교개혁의 로마 가톨릭 정신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이른바 제네바 전통이다. 그리고 제네바 전통의 영국식 표현은 청교도 정신이었다. 대부분의 성공회 신자들은 스스로를 이러한 두 부류의 전통에서 구별하였으며, 특별히 이 두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

이것은 과거에 대한 현대적인 재해석이 아니다. 성공회 신자들은 여러 문제들을 이런 방식으로 살폈으며, 앞서 말한 다른 두 전통에 대응해서 성공회 신학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반종교개혁을 통한 로마의 도전은 존 주웰(John Jewel)로 하여금 “영국 교회에 대한 변증”을 저술하게 했으며, 청교도의 도전 때문에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는 “교회 정체의 법에 관하여”를 쓰게 됐다. 후커는 매우 간결하게 이러한 양쪽의 신학적 도전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에 골칫거리로 남아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즉 로마 교회는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제네바 교회는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제1권, 91쪽). 다시 말해 한 쪽은 원칙상 오류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오류가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성공회는 성공회 자신을 포함해서 두 전통 모두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은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매우 세밀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간결하고, 고대로 이어오는 어떤 공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교리는 완전한 정통성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앙 공동체가 그 삶과 대화 속에서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둔 것이다.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세밀하고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고 믿고 있다. 다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교회의 일치 (획일성이 아니라) 안에서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고 믿는다.

로완 그리어(Rowan Greer)는 4세기의 교부 니사의 성 그레고리(St. Gregory of Nyssa)에 대한 연구 속에서 성공회 신학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신학적 성찰을 전해주고 있다.

”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레고리 성인은 어떤 교리의 체계를 만들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란 헤아리기 힘든 것이었으며, 이 세상은 그것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진리로 향해가는 길들을 마련하고, 하나의 진리에서 드러나는 여러 현상들을 서술하고자 했다. 그 총체적인 진리는 우리 손에 잡힐 수 없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Christian Hope and Christian Life: Raids on the Inarticulate, p.69).

이것이 바로 성공회 신학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우리를 형성시킨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후커는 실제로 칼빈과 청교도들에게 동정적이었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그들의 단호한 확신이었으며, 그에 대한 어떤 오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이와는 달리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은 종종 매혹적으로 까지 보이는 이러한 교리적 확실성보다는, 신앙 공동체의 지속되는 삶과 대화에 가치를 두고 있다. 때로 자신 없어 보이기도 하고, 급기야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면들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이러한 확실성이 그릇된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정직하고 신앙적인 방법으로 함께 기도하고 협력하기를 계속한다면, 하느님의 도우심을 얻어 우리가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려고 하는 성공회의 관심 때문에 우리는 매우 큰 방을 갖게 되었다. 하나의 방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우리의 신학적인 실마리를 로마 (혹은 중세 서방 가톨릭 정신)에서 찾기도 했으며, 어떤 이들은 제네바에서 얻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성공회를 함께 유지시켜 왔던 이들은 성공회 가톨릭주의 자들이나, 청교도 혹은 그 후예인 복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그 동안 성공회를 분열시키고 파편화시키는 주역들이었다. 우리를 함께 모아 주었던 것은 신앙 공동체의 삶과 대화를 지속시키는데 관심을 두었던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이었다.

반 문화 전통

우리가 이러한 고전적인 성공회 정신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시도가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는 하나의 반문화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국의 문화적 종교는 제네바 종교요, 청교도의 종교이다. 특별히 이 말은 특정한 방식의 성서 읽기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서는 잘 위장된 규칙서라고 가정하는 방식이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왜 이처럼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규칙을 마련해 놓으셨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다만 설교자들만은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어서, 행복하게도 우리에게 그것을 안겨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체로 성서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을 갖고 자라왔다. 그리스도교를 접해보지 못한 미국인들도 이것이 교회의 본래적인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특별히 이것은 성공회적인 태도가 절대 아니다. 성공회는 성서를 어떻게 보았는가? 성서에 대한 우리의 고전적인 접근 방식은 기도 속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이것을 세세한 규칙으로 보고, 하느님께서 성서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를 만나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인생에 대한 하느님의 청사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혹은 우리 사이에 지속되고, 늘 새로워지는 대화를 기대한다.

이것이 바로 17세기 말의 성공회 사제요 시인이었던 토마스 트라헌(Thomas Traherne)이 그의 시 “성서”(The Bible)에서 아름답게 노래했던 기대이다. 시는 감격에 넘쳐 숨조차 쉴 수 없는 심경으로 시작된다.

1.
그, 그거 말이야, 나 이렇게 들었어.
그러니까, 내가 하느님의 아들로 지어졌다는 거야.
그분의 모습을 따라서, 아 그 거룩하신 분, 그 멋진 금빛.
그 어떤 즐거움도 여기선 모두 기죽고 말지,
그 지극한 기쁨에 비하면, 그건 장난이야.
천상의,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2.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왕인거야.
그리고 죽어 없어질 껍질로 옷을 입긴 했지만,
그 안은 천사 케루빔이야, 천사의 날개도 있고,
천사의 사랑, 그 마음도 들어 있다는 거지. 천상과 지상의 모든 경계들까지 날아올라 볼까?
이 우주의 행복까지 함께 만끽할 수 있는 거야.

하느님과 그 피조물이 누리는 이러한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전망이 바로 우리에게는 성서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목적은 우리를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회 신자들에게 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으로 내리신 이 전통을 지켜나가고, 발전시키며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미국 그리스도교가 청교도에게서 물려받아 이 사회를 지배하는 율법주의에 항복할 수는 없다.

만약 성공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성공회의 풍요롭고 존경스러운 그 대화에 계속해서 참여하기 위해서, 그리고 완전한 동의 없이도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신앙 공동체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고전적인 성공회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 전통을 희생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뻔하다면서 우리를 떠나간 사람들이 그전에도 있었다. 청교도들이 그 첫째요 가장 분명한 사례이다. 아마도 미래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떠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떠남을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책임과 권한은 우리가 받은 이 전통 안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축하하고 나누는 것이다.

(주낙현 신부 역)

Copyright 2003 by L. William Countryman. Translation in Korean by Nak-Hyon Joo with permission.

하느님의 여성성에 주목하라

Sunday, September 15th, 2002

영국성공회의 저명한 주교 가운데 한분인 옥스퍼드 교구장 리차드 해리스 주교는 최근 하느님은 남성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해리스 주교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자 광적인 배타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이제 이러한 생각은 이 세상에 설 땅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여성적인 면모”에 대해 좀더 깊이 자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성을 초월해 계시는 분”으로서 하느님의 여성적인 면모를 깨닫지 못한다면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했던 여성들의 분투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책 [상자를 벗어난 하느님]에서 그는 하느님을 “막강한 남자 보스”라고 보는 태도는 사회적 권력 지배를 위해 만들어낸 생각이지, 성서에 대한 바른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영국성공회 사회적 책임 위원회의 의장이기도 한 해리스 주교는 교회 내 여성운동가들이 하느님의 여성성에 관해 주장한 내용들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하느님은 남성도 아니요 여성도 아니다. 그분은 완전한 분으로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모두를 아우르는 분이시다”고 말했다. 그는 하느님에 대해서 지금까지 “남성적인 면모로 표현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런 전통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다”고 말한 뒤에, “역시 좀더 여성적인 면모를 통해 하느님을 기술하는 것 또한 교회의 정통 교리에 완전히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리스 주교의 주장은 교회의 여성 운동가들에게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이미 지난 30년 동안 “여성적인 하느님 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해리스 주교는 각 세대마다 그 세대에 필요한 하느님 상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여성의 참여를 격려하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언어와 이미지들을 바꾸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와 성령도 여성적인 면모를 가진 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영국성공회 내의 보수주의자들, 특히 성공회에서 영국 로마 가톨릭 교회로 전향한 사람들은 해리스 주교의 이런 주장을 위험하며 잘못된 지침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보수 그룹의 한 관계자는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해야 하며,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허무맹랑한 소리에 더 이상 논박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또 영국성공회 내 복음주의 계열 “주일 성수 운동 모임”의 총무이자 설교가인 존 로버츠는 “이러한 주장은 또 하나의 쓰레기에 불과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주교 자신이지 성서가 아니다”면서 “이런 주장이야말로 영국성공회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매일 사라지는 이유”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야말로 남성이라는 신앙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런 주장은 책을 팔기 위한 논쟁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영국성공회에 사람을 모을 만한 어떤 힘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성사제 서품 반대에 진력하고 있는 “신앙 전진 운동”의 한 대변인은 “성서의 어디를 보아도 이런 주장을 지지할 만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며 “남성과 여성은 창조되었지만, 하느님은 그 창조 너머에 계신다”고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최근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며 지속되고 있다. 지난 1996년 요크의 한 극단이 마련한 연극 공연에서 하느님 배역으로 여성을 기용하자 많은 논란이 일었다. 3년 뒤 유명한 가수인 알라니스 모리셋이 미국 영화 “도그마”에서 하느님으로 연기하자 비슷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특히 로마 가톨릭 진영에서는 이 영화 상영과 관람 반대를 주장하는 캠페인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해리스 주교의 생각은 여러 교회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작년 영국의 리폰-리즈 교구 150명의 성직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하느님을 자동적으로 남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해리스 주교는 민감한 주제에 과감한 주장을 펴서 논란에 휩싸이곤 했다. 특별히 그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반대와 같이 국제 정치와 사회 정의 문제에 분명한 의견을 피력해 왔다. 해리스 주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일일이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과학자이자 성공회 사제 템플턴상 수상

Sunday, June 3rd, 2001

영국성공회 사제이자 과학자인 아서 피코크(72세) 신부가 종교 발전의 공로로 수여되는 2001년도 템플턴 상을 수상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피코크 신부는 1986년 성직-과학자 협회(the Society of Ordained Scientists)를 설립하고,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상금을 주는 이 템플턴 상의 역대 수상자는 마더 테레사와 알렉산더 솔제니친 등이다.

아서 피코크 신부약력에 따르면 피코크 신부는 전통적인 성공회 집안에서 자라났으나, 대학 시절에는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져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암 템플의 설교를 들은 후에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대량학살의 공포를 통해서 악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한 그는 옥스퍼드에서 박테리아 연구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1952년 DNA 구조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을 때, 그 연구팀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며, 세계 유수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1962년 옥스퍼드 최고의 학위인 과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버밍햄 대학교에서 종교와 과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1971년 신학사 학위를 받고 영국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82는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박사와 과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피코크 신부는 “과학은 전 지구적인 언어이며 우리 시대의 재산”이라며 “새천년이 시작된 지금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사상가와 관련자들에게 과학의 보편적인 전망을 창조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 때”라고 말했다.

(Anglican Journ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