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역사' Category

‘종교 공장’의 정화 – 캔터베리 대주교 사순절 설교

Thursday, March 15th, 2012

세계 성공회의 맏 어른이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께서 로마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전하신 설교를 번역하여 올린다. 로완 대주교께서는 베네딕트 전통의 갈마돌리 수도회 설립 1천 주년 기념 강연에 초청받은 참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며 강연과 강론, 설교를 펼치셨다.

한편, 천주교의 한복판 로마에 성공회라니? 로마에는 성공회 두 개 교회와 교회 일치 대화 연구소인 성공회 로마 센터가 있다. 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유럽 교구 소속이고, 다른 한 교회는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 유럽 교구 소속이다. 이 두 교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을 맞아 사순 3주일 미사를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미국 성공회 소속)에 모여 함께 드렸다.

대주교께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담긴 뜻을 고금의 우상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개인의 안위와 위로를 위한 ‘종교 공장’이 되어버린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과 극복으로 풀어내셨다. 하느님과 인간이 아니라, 그 형색만 갖추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지니스로 전락한 종교의 행태, 특히 그 비지니스(business)에 바빠(busyness) 정작 헤아리고 살펴야 할 것은 돌아보지 못하고 대량 생산 공장이 되어가는 종교 비지니스에 대한 성서의 경고를 되새겨 주셨다. 원래 신앙이 가진 이 대안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이 여전히 절실하다. 그뜻을 널리 나누려고 동영상을 링크하고 설교 전문을 졸역하여 올린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설교

사순 3주일
로마,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 St. Paul’s ‘Within the Walls”
2012년 3월 11일

출애 20:1-17 / 시편 19 / 1고린 1:18-25 /요한 2:13-2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시 한번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성공회의 형제자매들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 위대한 도시에 있는 성공회 교회들을 향한 사랑과 기도를 전해주길 바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들의 연대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증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아침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제가 주교로 있던 남부 웨일스 지방의 여러 공장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철강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큰 공장에 들어가면 귀를 먹게 하는 소음이 감쌌습니다. 실제로 공장 어느 부분에서는 꼭 귀마개를 하고 안전모를 써야 했습니다. 소음과 활력, 그것도 귀를 먹게 하는 강한 것들이죠.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이랬다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철강 공장에 들어가는 것과 더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만들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철강 공장에서 철을 만들 듯이, 성전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아주 강하고 바쁜 활동을 온종일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큰 명절이 되면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제사장들이 희생제의에 바칠 동물들을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적절하게 표현할 상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독서 세 본문의 주제는 실제로 우리가 종교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종교’와 참 하느님, 즉 참 하느님의 사랑과 섬김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시작부터 우리는 참 하느님의 자리에 어떤 것도 가져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하느님을 가장한 ‘우상’, 우리를 만족하게 할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기도를 채우곤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선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채웁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틈을 막는 데 사용합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참 하느님께 깃든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 대신에,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끌어내어 그것을 천국의 화면에 투사하고, 그것을 지상에 끌어내려 예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공장’입니다.

똑같은 경고를 제2독서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은 세상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과는 너무도 낯설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발짝 물러선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지혜와 능력에 만족한다면 말이죠. ‘어떤 이들은 기적을 찾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이 마술처럼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철학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참 하느님의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사랑 속에서 알려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아침 성서 독서의 도전은 분명합니다. 우상이냐, 진리냐? ‘종교 공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냐? 우리의 유혹은 너무도 강력하여 늘 종교 공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은 아마도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느라 바쁘고, 좋으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쁘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속에서 가져온 그림을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능력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요,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을 치우라고 합니다. 이것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세계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 살고,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들로도,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으로도 절망하게 하거나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을 묵묵히 보여 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순간의 하느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사순절기 동안 우리가 대면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 ‘종교 공장’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든 도전에도, 그리스도인은 꽤나 잘 이 종교 공장을 운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십자가 자체는 종교적인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삶의 쇄신에 대한 부르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종교인이 그저 장식처럼 걸고 다니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순절기는 어쩌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력의 성주간 동안 교회의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 그 시기는 십자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매년 우리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거나 치웠다가,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충격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충격을 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 안녕에 대한 모든 것들을 뒤엎으십니다. 멋진 레저 활동이 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그리고는 종교 공장에서 우리를 끌어내시어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고, 누구도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신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신뢰가 우리를 움직여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전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완전히 잊혀진 사람들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종교 공장을 나와 섬김으로 가는 길로 이끕니다. 섬김과 사랑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세상을 향한 활동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후한 너그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순절기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신을 우리 안에 짜맞추어 생산하고 있지 않나 살펴 봐야 합니다. 사순절기는 우상숭배를 넘어서 한 발짝 더 나가는 시간입니다. 우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죄수로 묶어놓고 옛 세상으로 끌어당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종교 공장에 연루된 이들을 내치시고, 당신의 벗들과 더불어 거대한 침묵과 거대한 공간에 우뚝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집으로 여길 곳입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붐비지 않는 넉넉한 공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이곳이 모든 인간의 집이 되어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함께 예배하러 모일 때, 성찬례라는 성사를 거행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그 거대한 공간에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바쁘지 않습니다. 조바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과 성취해야 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 서서, 가만히, 듣고,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밉니다. 무엇을 움켜쥐고 우리 생각대로 쥐어짜서 만들려는 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생명과 사랑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성사 속에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께서 정화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전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리하셔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만드신 공간입니다. 크고도 경건한 철강 공장 같은 ‘성전 종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21세기 어느 곳에도 널려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동안 ‘종교를 만드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마음을 열어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봄날의 대청소를 시도해 봅시다. 조금이나마 정적과 열림을 위해 노력해 봅시다. 그때야 비로소 생명의 기적, 하느님의 생명이 그 열린 빈손에 다가올 것입니다. 신비와 경외,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최은희-유상신 신부님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

케네스 리치 “하느님 체험” – 새로운 영성 선언

Thursday, February 16th, 2012

‘성공회에는 조직신학이 없다’는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용감하게 내뱉는 이들이 있다. 누군가 근거도 없이 얕은 생각으로 떠든 말을 주워듣고 되뇌다 퍼진 말일 테다. 조직신학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한 여러 사안을 성서와 전통과 인간의 하느님 경험에 기대어, 그 이해를 인간의 언어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좀 더 보편적 소통의 틀과 훈련으로써 조직신학이라는 하나의 신학 방법이 존재한다. 이런 노력과 방법이 없는 교회와 신학이 있겠는가?

다만, 성공회는 특정한 교리적 주장이나, 몇몇 신학적 거장의 주장에만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경험의 지평을 넓고 다양하게 본 탓에, 좁은 의미에서 ‘특정 교리 체계에 갇힌 서술로서 조직신학 혹은 교의학’과는 거리를 둔다. 신앙적 사안들에 대한 오랜 논의에서 배우고 숙고하며 대화하되, 이를 역사의 전통과 경험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성공회가 조직신학을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이런 고민 탓에 요즘은 조직신학이라는 말보다 ‘구성(constructive) 신학’이라는 말을 쓰자는 이들도 있다.

무책임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신앙 전통에 흐르는 면면한 근거와 삶에는 애써 눈감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변명하려 하지 않는지 살필 일이다.

이 참에 몇 달 전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떠올라 정리하고, 그 뒤에 동료와 나눈 번역 하나를 덧붙인다.

케네스 리치 신부의 <<하느님 체험>>(Epxeriencing God, 1985)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우리말 제목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2011). 이 책은 웬만한 조직신학과 영성신학 입문서보다 훨씬 낫다. 갖추어 신학사전으로 쓸 만큼 내용과 색인이 풍요롭고, 영적 독서집으로 쓸 만큼 엄선된 인용이 빼곡하다.

서방 교회 전통의 편향을 넘어서서, 교부 전통과 정교회 신학의 목소리를 회복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에서 전통이 풍요로움이 되살아난다. 당연히 교부들 및 정교회 전통의 사고방식, 즉 그 영성과 신학, 전례와 실천에 대한 입문서 역할도 충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오랜 현장 사목 경험 탓에 그가 풀이하는 교회의 영성 전통은 늘 일상과 현장 바닥에 닿는다.

성공회-가톨릭(Anglo-Catholic) 전통, 특히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 전통에 깊이 자리 잡은 저자이기에, 성공회 신학과 전통에 대한 해방신학적 근거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성공회 독자라면, 8장 “육신 속의 하느님”, 9장 “성찬례의 하느님”에서 큰 도전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케네스 리치 신부는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참된 신학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 참된 하느님과 만남 안에서, 그 만남을 통해서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관한 것이다”(서문).

친절하게도 리치 신부는 책 끝에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후기를 마련하여, 이 책에 담긴 새로운 영성 회복의 방향을 선언한다. 이 훌륭한 ‘매니페스토’를 아래에 옮긴다. (출간된 한국어 번역본과 별개다.)

후기: 쇄신된 영성을 향한 선언

1. 쇄신된 그리스도교 영성은 하느님의 비전을 현대 세계에 회복하는 일에 관심한다. 이 영성은 현재의 상황에 의미있는 방법들을 통하여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영의 깊은 차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겸손하고 신중하게 마르크스주의와 심층 심리학, 풍요로운 자각을 향한 사회적 탐구에서 얻은 통찰을 고려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2. 이 영성은 유대 백성의 삶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에 근거한다. 구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광야에서 순례하는 백성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정의에 대해서 말하며, 개인과 사회의 삶 속에서 그 거룩함과 정의를 추구한다.

3.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며,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충만함을 본다. 이 영성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과, 동지인 인간, 즉 드러난 신성과 들어 올려진 인성을 함께 본다.

4. 이 영성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의 신앙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류에게 일치를 주시는 하느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화해를 이루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요, 빛과 사랑의 하느님, 자유를 주시는 성령의 하느님,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고 세우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연구를 통하여 이 영성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한다.

5. 이 영성은 사막의 영성이다. 사막의 경험을 통하여 교회의 관상적 삶을 그리워하며 이를 굳건히 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성 생활에 똑같이 중요한 홀로됨과 함께함을 같이 추구한다.

6. 이 영성은 구름과 어둠의 영성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신비와, 인간과 하느님의 만남 속에 있는 신비를 증언한다. 이 영성은 손쉬운 답변만 내놓는 종교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신앙의 어둔 밤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관상적인 영성이다.

7. 이 영성은 물과 불의 영성이다. 즉 씻어내는 영성, 정화하는 영성, 쇄신하는 영성, 영적인 따스함의 영성이다. 세례의 물과, 성령의 불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 영성은 지속적인 거듭남과 삼키는 불이신 하느님에게서 매일같이 도전받으라는 부르심을 본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영성이다.

8. 이 영성은 육신이 된 말씀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 영성은 성육신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붙잡고, 하느님 자녀의 살과 피 속에 있는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섬기려고 노력한다. 하느님의 선물인 물질과 인간의 성을 즐거워하고, 인간적인 것 안에서 하느님께 이르는 관문을 본다. 이는 유물론적 영성이다.

9. 이 영성은 성찬례의 영성이다.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인 성찬례 거행이 있다. 이 영성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나누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이 영성은 세상 속에서 나눔과 평등의 성찬례적 삶을 선언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이는 공동 생활의 영성이요, 거룩한 나눔의 영성이다.

10. 이 영성은 고통의 영성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서 복음의 핵심을 찾기 때문이다. 이 영성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선포하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 한다.

11. 이 영성은 신비주의 저자들에게 배우면서 하느님이 모든 실재와 우리 존재의 근거임을 본다. 이 영성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필수 요소로 회복하고 증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성은 영적 지도와 내적 생활을 심화하는 사목을 발견하여 증진하며, 신앙생활의 신비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을 함께 묶으려고 노력한다.

12. 이 영성은 여성의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 경험, 성서와 전통 속에서 하느님에게 여성의 이름을 붙였던 일, 그동안 잊혀지고 무시당했던 여성적 방식으로 하느님을 경험하고 묘사한 저자들의 통찰 등을 진지하게 다룬다. 이 영성은 현대 여성 운동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고 노력한다.

13. 이 영성은 정의와 평화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며, 인종 차별을 비롯한 여러 지배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세계평화와 핵무장 해제 군축을 도모하는 운동 속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없애는 캠페인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 좀 더 인간적인 세상을 만드려는 투쟁 속에서, 이 쇄신된 영성은 하느님의 얼굴을 알아보며,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눈다.

Kenneth Leech, Experiencing God, 1985, 421f.

후원: 구균하 신부, 민김종훈 부제

신앙 멘탈리티의 틀, 그리고 마커스 보그

Thursday, February 9th, 2012

십수 년 전, 동료와 한국 개신교의 여러 문제, 그리고 여러 근본주의 ‘기독교’ 교단들이 성공회를 비난한다는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소위 근본주의적 개신교는 아예 우리와 다른 종교라고 여기고 접근해야 해요. 실은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보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려울 거에요.”

지금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본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한다. 근본주의라는 종교 안에 기독교 근본주의, 이슬람 근본주의, 유대교 근본주의 등의 내부 분파가 있을 뿐이다. 누구를 규정하고 구획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병증, 혹은 환부라고 분명히 진단했을 때는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 근본주의는 종교인 탓에 다른 여러 건전한 종교들과도 친연성을 나누기에 독버섯처럼 퍼지기 쉬운 탓이다.

시선을 내부로 돌려, 몇 해 전부터는 성공회 전통을 스멀스멀 좀 먹고 있는 ‘개신교 멘탈리티’의 폐해를 몇몇 분들과 계속 나누고 있다. 물론 이때 ‘개신교 멘탈리티’란 영미에서 발전한 독특하고 배타적인 복음주의와 연결된다. 그 특징은 전례와 성사에 대한 무지와 거부, 전통에 대한 몰이해,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접근, 그리고 창조 신학과 성육신 신학을 오해한 지독한 영-육 이원론 등으로 나타난다. 한국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런 특정 형태의 ‘개신교 멘탈리티’는 어디에든 도사리고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종종 진보 신학이라는 옷을 입은 이들에게서도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 보면, 교회도 비슷하게 구분할 수 있겠다. 언젠가 적은 대로, 전례적(liturgical) 전통의 교회와 비-전례적 전통의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는 말이다. (물론 이 구분은 위에서 규정한 근본주의나 개신교 멘탈리티에 대한 언급에 그대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이해와 형성, 그 실천에 대한 접근에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의 접근은 매우 다르다. 이것은 신앙 형성의 틀이라고 할 만하다. 이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좀 더 적극 펼쳐 나가야 할 참이다.

이 와중에, 마커스 보그의 책 한 권을 들춘다. 성공회 신자인 마커스 보그는 이미 한국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하는 이들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성서학자요, 신학자이다. 그에 대한 짧은 소개와 우리말로 번역된 도서 목록은 여기를 참고할 수 있다. 그 역시 성서와 전통을 보는 ‘틀’에 대한 고민과 해명을 전개한다. 현재 통용되는 여러 신앙의 언어와 용어, 개념들이 어떤 틀에서 어떻게 왜곡됐는지를 살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의 영향 아래 이식된 한국 교회에도 적절한 참고서일 것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인듯 하니, 우선 그 고민을 그 책 서문을 통해서 나누려 옮긴다.

마커스 보그,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 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그 의미와 힘을 잃었는가? 어떻게 이를 회복할 것인가?>>
Marcus J. Borg, Speaking Christian: Why Christian Words Have Lost Their Meaning and Power – And How They Can Be Restored. 2011

서문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우리 시대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그 기본 어휘의 많은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용어들이다. 구원, 구원받다, 희생, 구속자, 구속, 의로움, 회개, 자비, 죄, 용서, 중생, 재림, 하느님, 예수, 그리고 성서. 게다가 신조, 주님의 기도, 전례 등과 같은 용어들도 그 성서적, 전통적 의미에서 볼 때 심각하게 왜곡된 채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이 두 요인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만들었다. 첫째는 근대 세계에 등장한, 언어에 대한 문자주의이다. 이 방식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비슷하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어떤 일반적 틀에서 해석하는 문제다. 나는 이를 “천당과 지옥”의 틀이라고 부르는데,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종종 그러하듯, 이것이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미국이든 어디든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공유하는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약 절반(아마 더 많을 것이다)의 미국 신자들은 성서의 언어를 ‘천당과 지옥’이라는 틀 안에서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틀은 죽음 뒤의 문제, 죄, 용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믿음 등을 강조한다. 다른 절반(아마 더 적을 것이다)의 신자들은 이런 틀에 당황해 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대한 다른 이해로 옮겨 간 이들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분명하다. 그래서 같은 성서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낸다.

이 책의 목적은 새로운 대안이 될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와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서 길어올린 것이다. 충격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거듭해서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현대적 의미와 그와는 아주 다른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의미를 비교하고 대조할 것이다. 거듭해서,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이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다. 거듭해서, “제대로 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좀 더 오래되고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의미들을 21세기 안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들과 연결할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풍요로움과 지혜를 구원하여 재선포하려는 것이다. 실은 이 책의 제목을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를 구원하기”라고 붙이려 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구원받아야 할 말임을 알게 됐다. 오늘날 이 말은 대체로 구원자이신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좀 더 오래된 성서적인 의미가 더욱 적절하다. 다시 말해 ‘구원한다’는 말은 노예 상태, 감금 상태, 포로 상태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로부터 구출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는 구원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문자주의와 ‘천당-지옥’이라는 틀에 포로가 된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이미 예수, 하느님, 성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심장과 핵심에 관한 책들을 썼기 때문에, 어떤 사안들은 여기서도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전의 책에 나온 사안을 다룰 때에도, 그 설명은 좀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것이다.

각 장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장은 보통 책의 한 장 길이가 되겠지만, 한 두 쪽인 것들도 있다. 다루는 사안을 밝히는데 얼마나 설명이 필요하느냐에 결정된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이랄 수도 있다. 이런 입문서는 독서법을 가르친다. 독서는 낱말을 구분하고 발음법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듣고 이해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기존의 이해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언어를 읽고 듣고, 내적으로 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즉, 우리 신앙의 언어를 다시 읽고 듣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김종명 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