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하느님 나라 – 모든 성인의 감사 잔치

Sunday, November 1s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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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모든 성인의 감사 잔치 (마태 6:25~33)12

성찬례의 어원은 ‘감사’를 뜻하는 ‘유카리스티아’입니다. 성공회는 이 뜻을 잘 알아서 예전부터 성찬례를 ‘감사제’로 불렀습니다. 2004년 기도서 이후로 우리는 말씀과 성찬을 함께 나누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를 ‘감사 성찬례’로 부릅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잘 헤아린 표현입니다.

‘감사 성찬례’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드러난 구원 사건을 아우르는 잔치입니다.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신 음식 기적은 교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눈을 돌려 어떤 일을 실천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힐난을 들었던 예수님은 당신의 식탁에서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성 목요일에 제자들과 나눴던 마지막 저녁 식사는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듯이 신앙인의 삶이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과 헌신이어야 한다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엠마오로 낙향하던 제자들이 낯선 나그네를 만나 동행하며 그의 ‘말씀’을 듣고 ‘음식’을 나눌 때 부활한 예수님을 깨달았던 사건은 그 자체로 성찬례의 구조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일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성찬례를 드렸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 구원의 잔치를 미리 노래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높이시고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초대하여 베푸신 잔치입니다. 나라 잃고 헤매던 이들을 거룩한 산으로 초대하여 ‘연한 살코기’와 ‘맑은 술’의 잔치를 베푸십니다. 삶 속에 겪은 상처와 아픔, 실패와 좌절 때문에 고개 숙일 필요 없다며, 잔치의 당당한 손님으로 환영하십니다. ‘살코기와 술’로 마련된 예수님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며, 그 넉넉한 환대에 감사하고 찬양하면서 흥을 누리는 잔치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요한 묵시록은 이 잔치가 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잔치는 몇몇 사람과 특정한 지역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눈물과 슬픔과 고통에 있는 이들을 먼저 일으키시어 아름다운 ‘신부’로 높이 삼아 사랑해 주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가 누리는 혼인 잔치에서 우리 신앙인은 모두 ‘신부’처럼 아름답고 귀한 존재입니다. 이 잔치에서 우리 수고의 땀방울이 포도주와 떡으로 결실을 맺고, 우리 아픔의 눈물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로 거룩하게 됩니다. 이 아름다운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은 오늘 이곳에 모인 ‘모든 교우들의 얼굴’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는 “솔로몬의 옷보다 화려한 꽃 한 송이들”입니다. 모든 성인과 모든 교우가 모인 교회는 있는 그대로 저마다 다채롭게 피어올라 서로 어울려 다른 색깔을 축하하고 보살피는 장엄한 꽃들의 정원입니다. 이 정원에서 펼쳐지는 환대와 친교의 잔치가 감사 성찬례입니다. 이 성찬례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가 서로 귀하게 여기고 서로 고마워하며 누리는 새로운 관계가 우리가 구하며 맛보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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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 독서와 시편은 모든 성인의 날, 복음은 추수감사절 복음 []
  2.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1월1일 모든 성인의 날, 모든 교우의 날, 추수감사절 주보 []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Sunday, October 25th, 2015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마르 10:46~52)1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답변을 얻으려면 먼저 성서가 전하는 구원에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구원의 핵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입니다. 구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일어나 새 힘을 얻는 공동체로 드러납니다. 구원은 신앙 공동체에서 경험하고 나누는 깨달음과 실천입니다.

예레미야는 슬픔과 눈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사는 일이 참담했습니다. 예언자는 정의로운 신앙이 살길이라고 외쳤으나 권력자들에게서 온갖 박해를 받고 절망했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예언자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희망과 구원을 세우십니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안에 갇혀 절망과 눈물의 포로로 사는 이들을 불러내시어, 서로 섞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특별히, 세상이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우는 공동체에서 구원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사의 온갖 슬픔과 고통은 이제 구원을 꽃피우는 거름이 됩니다. 더 아프고 슬펐던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으며, 더 고생하고 땀 흘렸던 이들이 더 큰 찬양을 바칩니다. 성서가 굳이 여러모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그들의 존재와 경험을 교회의 밑바탕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사제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하기에 바빴으나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작은 이들과 함께 스스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더는 되풀이되지 않는 “단 한 번”으로 희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움켜잡을 때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뚫고 낯선 이처럼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할 때, 상처로 불구가 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납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던 “앞을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자기 안위와 보호의 마지막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 매달릴 때, 새로운 삶의 시선이 열립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과 기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 사업의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작은 자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처럼, 낯설고 작은 사람들의 울음과 아픔을 둘러보며 바쁜 삶을 멈출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슬픔을 건너고 낯선 이를 환대하며, 함께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어 구원을 누리며 축하하는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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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25일 연중30주일 주보 []

영광의 공동체 – 평등한 세례로 나누는 슬픔의 잔

Sunday, October 18th, 2015

영광의 공동체 – 평등한 세례로 나누는 슬픔의 잔 (마르 10:35~45)1

“소원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십시오”(마르 10:35). 신앙인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누구나 드리는 부탁이며 기도입니다. 저마다 어려운 처지에서 바치는 절박한 간구는 듣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도울 방법을 함께 찾는 일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같은 부탁이라도 사정이 다릅니다. 제자 형제 둘이 예수님께 ‘영광스러운’ 자리를 청탁하는 장면을 읽자니 입이 씁니다. 예수님께서 곧 수난을 당하시라는 비장한 말씀을 꺼낸 직후에 나온 행동이라, 사람의 뻔뻔함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십가가의 길을 들어서신 예수님의 고뇌는 정작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이익과 입장에 가려져 버립니다.

청탁하는 제자 형제들의 혈연관계는 우리 사회 곳곳에 드러나는 지연, 학연, 인맥과 같은 ‘이익의 끈’ 문제입니다. 본래는 가까운 신뢰와 배려에서 나왔을지라도 종내에는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영광의 경쟁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익의 끈에 들지 않은 사람은 쉽사리 배척합니다.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한 관심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배제당한 사람의 질투와 ‘화’를 돋굽니다. 불필요한 시기와 경쟁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꼬리를 무는 원인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기도는 “큰소리와 눈물”의 청원이었습니다(히브 5:7). 삶의 고난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나누는 기도였습니다. 이익과 신분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고난의 세례를 받아서 쓰디쓴 잔을 나누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사 생활의 핵심인 세례와 성찬례의 뜻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세례는 인간사의 고통과 슬픔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가장 깊은 밑에까지 들어가서 자기애(自己愛)가 익사(溺死)하는 경험입니다. 삶의 물밑에 닿는 절망을 통해서 우리는 평등해지고,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세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형제자매의 관계로 태어납니다. 교회는 이처럼 평등하게 세례받은 이들이 이루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성찬례는 세례로 맺은 형제자매가 함께 밥상에 둘러 모여 삶의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한 잔’에 담아 나누며 성장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광이요, 하느님 백성이 누릴 영광입니다.

신앙인은 고난과 절망의 세례를 통과하여 기쁨과 슬픔의 잔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나눕니다. 신앙인은 이제 새로운 삶을 다짐합니다. 그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하는 ‘고난받은 종’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 낯선 사람을 위하여 어려움을 “대신” 지는 일을 예수님께만 맡길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 함께 삶의 짐을 ‘대신’ 짊어져서, ‘굴욕 당하며 외로움에 방치되고, 인간사회에서 끊기고 매장당하여 잊혀진 이들을 일으킵니다’(이사야). 그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또다시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가 겪던 “극심한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영광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이사 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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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18일 연중29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