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맑은 감염”을 퍼뜨리는 일

Saturday, June 6th, 2009

상식적인 마케팅 원칙이 있다고들 한다. 20/80 파레토의 원칙이라고 하나? 전체 매출의 80%는 결과는 20%의 고객에 의해서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여러 조직 원리에도 적용하곤 한다. 십수년 전에 영적 멘토링에 관한 책에서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럴 듯하다. 누구는 이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해서, 주위의 12~15명과 어떤 일을 도모하라고 한다(말콤 글래드웰). 또 세스 고딘이라는 사람은 “First, Ten”이라며 잘 아는 첫 열 사람과 일을 시작하고, 그들이 싫어하면 그 일을 때려 치우고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우리 교회(성직자 사회나 교회)의 변화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이런 말을 오래 되새긴 바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실험을 해봤다. 다만 몸이 떨어진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만 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블로깅도 그런 일환이었고, 성공회 카페라는 인터넷 프로젝트도 그런 차원이었다. 그리고 올초부터는 약 12명을 메일링리스트로 묶어서 이런 실험을 해봤다. 글을 묶어 보내기도 했다.

늘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적절치 않은 탓도,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 탓에 대놓고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누가 답장하며 격려한 대로, 소리없이 퍼져나가고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이 참에 Seth Godin 의 말을 되새기면 이렇다.

  • 열 명을 찾아라. 너를 신뢰해주고 존경하는 사람, 너를 필요로 하고, 네게 귀 기울이는 사람
  • 이 열 사람이 바로 네가 팔아야 할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그걸 원한다.
  • 그들이 그걸 좋아하면, 된 거다. 그들이 그걸 좋아한다면 그들은 다른 10명씩을 네게 소개해 줄 거다.
  • 이걸 반복하라.

그렇게 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신뢰와 존경과 필요와 경청”이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니 이 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놓친 게 더 있다는 생각이다. 고딘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이 좋아하지 않으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야 한다. 접고 새로 시작해라.

노력을 기울인 일을 접는 게 쉽지 않다. 새로운 상품이 어떤 것일지 모르겠다. 우선 놓치고 있던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기존에 했던 일들의 메아리는 좀더 기다려야 하겠다.

그 와중에 또 한가지 일을 제안했다. 트위팅에 관한 일이었다. 며칠 전 메일링 리스트에 있는 열 두어 사람에게 새로운 연 트위터를 소개했다.

굳이 트위팅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디어 도구를 어떻게 이용해 볼까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우리처럼 열세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항체로서 “맑은 감염”을 퍼뜨릴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어 보냈다.

1. 소회: 지난 몇 주간 괴로웠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때문만이 아니라,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변두리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의 행태(다른 교단을 더이상 나무랄 생각이 없습니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죽음에 대한 애증은 애증대로 남되, 우리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점은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습니다.

2. 우리 교회에 대한 사태 판단: 우리 교회는 현재 어떤 위기로 치닫고 있고, 그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소위 한국식 “복음주의”라는 개신교 사고 방식과 행태에 물들고 있다는 것이고, 이른바 성공회 전통주의자라는 분들도 애초에 성공회의 정신과 그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얕아 권위주에만 기대고 있으니, 성공회의 존재 이유가 희미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정적 임계점을 넘으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공회는 이미 이를 넘어섰나요?

3. 사회와 교계의 미디어 문제: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과 “론”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와 교회를 휘감고 있는 이 ‘언’과 ‘론’은 생명을 앗아갈 만큼 위험한 것들입니다. 특히 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사고 방식을 퍼뜨리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한국 교회의 영향력을 저는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찾다 보니 그랬는데, 너무 악랄할 정도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거기에 우리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숨죽이고 있지요. 교회 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신교/천주교의 수구적인 사고 방식과 잘못된 생각들이 여러 미디어들을 통해 퍼지고 있습니다. 겉잡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대응할까요?

4. 죽은 이에게 기대어: 제 블로그와 성직자 카페에도 인용해 올렸지만, 죽은 이에게는 또 다른 유언이 있었습니다. 행동 전략에 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미디어에 관한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를 퍼서 나를 그릇에 관한 것이고, 그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떠돌거나 지배하는 신앙적 담론들은 성공회적이지 않거나, 아예 그리스도교적이 아닌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거기에 세뇌당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운동은 ‘바른 말과 사고 방식과 성찰’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감염”됩니다. 잘못된 것에 감염되었다면, 그걸 차단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특히 한국 성공회의 처지로서는 차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항체를 만들어야 하고, 바른 것으로 고쳐서 “맑은 감염”을 퍼뜨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에 감염된 사람으로 예수를 감염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대안은?: 지금까지 혼자서 여러 짓을 했습니다. 몇몇 분들도 다른 식으로나마 합세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별로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도 계속해 볼 작정이고, 또 다른 방법도 강구할 것입니다.

그동안 감당못할 일에 너무 많은 힘을 쏟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소홀한 것도 많았다. 누구 말대로 정신 팔지 말고 잠자코 앉아서 책상물림만 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가족에게 미안하다.

그러면서, 괜히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진보적이고 능력있고 연륜있는 많은 이들은 뭐하고 있는걸까 하고 먼 하늘 바라보며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들 나름대로 고초가 많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오히려 지배받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저 잡념이다.

식별의 공간 – 어느 벗에게

Wednesday, June 3rd, 2009

서로 이심전심이라면서도 여전히 전화통 붙잡고,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공감하여 격려하는 임종호 신부님께서 “식별(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지 댓글에서 되새겨 주셨다.

나 자신이 달포 전에 어느 분과 편지를 나누는 가운데 이 식별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이 참에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 놓는다. (사적인 편지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에서 공개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고 나눈 편지이다.)

식별의 공간

… 우리 교회가 힘을 잃고 있는 것은 이런 영적 식별이 깊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식별이 깊지 않은 분들이 큰 소리를 내고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어떤 진취적 주장, 혹은 보수적 입장에서 판가름 날 일이 아닙니다. 그것 너머의 식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식별의 위기에 있습니다. 힘들어하시는 …님께 부탁하기는, 이 점을 화두처럼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라야 …님이 느끼시는 절망과 분노를 …님이 나누고 있는 하느님의 꿈을 펼쳐나가는 힘으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누히 말한 것 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여느 성직자들과 다를 바 없는 길에 들어섭니다. 성직에 들어선지 10년에 든 내 자신을 돌아 보면서, 여러 젊고 나이든 성직자들을 보면서 갖게 된 결론입니다. 밑에 적을 다른 지천의 허튼 말들을 말고라도, 이 말만은 꼭 기억해 주십시오. 나중에라도 이 기준으로 역시 저를 비판해 주십시오.

어떤 절망과 분노가 사람을 휘어잡으면, 아무리 명석하고 냉철한 분이라도, 자신을 사지로 몰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최근 제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더욱 이 위험을 함께 염려합니다… 사람은 약하고, 사탄은 늘 그 약한 고리를 치고 들어 옵니다. 그러니 이를 보강해야 합니다. 식별의 끈 가운데, …님의 약한 고리를 찾아 내십시오.

사람의 생래적인 보호 본능때문에 이 고리는 깊이 감춰져 있습니다. 드러난다 해도 인정하기 싫습니다. 그럴 때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그걸 짚어주는 도전입니다. 노파심입니다만, 첫 생각 말미에 적은 “그저 몇몇 마음 맞는 이들과 책이나 읽으며”라는 말에 저는 염려합니다. 위로의 시급성때문에 자칫 도전이 감춰질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이들의 도전에 열려 있는 것이 …님께 더 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 상해 있을 …님의 기분을 헤아리 못하고서 말한다고 타박하지 마십시오. …님의 삶의 목적이 그저 성직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리 하셔도 됩니다. 침묵으로 해결될 일입니다. 그 이후의 삶이 어떤지는 이미 우리 주위에 팽만합니다. 그리 마음 먹었다면 지금부터는 입바른 소릴랑 평생 접는 것이 적어도 위선자 소리를 듣지 않은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위선을 잘 변명하고 도통한 척 하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우리 교회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 자신이 또다른 절망의 사람들을 계속 만들어 낼 겁니다.

기도 속에서 함께 할게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박차고 오르기 위해 밑으로 내려가서, 그 내려져 숨죽이고 있는 손길들을 다시 발견하고 함께 손잡고 오르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의 기도입니다.

누구의 언어로, 어떤 믿음으로 – 교회에 대한 잡감

Monday, June 1st, 2009

0. 올해 성령 강림 주일의 성서 본문은 이랬다. 사도 2:1-21, 에제 37:1-14, 요한 15:26-27, 16:4-15

1.
성령 강림 사건 (오순절)의 핵심은 “혀 같이 생긴 불길”이 사람들 위에 내렸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이 저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다른 지방 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 다중 언어 사건은 극단적 종교 체험의 비언어적인 표출이 아니라, 소통이 가능한 지역 언어의 구사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실상 이 ‘방언’ 기적의 핵심은, 목소리 없는 무지렁이들이 제 목소리를 얻었다는데 있다. 그 목소리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지렁이들이 증언과 선교의 주체가 되었다. 성령의 불 같은 형상은 기존의 세상을 불태우는 상상력에 닿아 있다. 그러니 오순절 사건은 전복에 대한 증언이다. 한참 어린 것들인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젋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는 것”이다.

2.
예언자 에제키엘은 광야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에게 숨결이 돌아 살이 붙어 살아나게 되었다고 선포한다. 이 마른 뼈들의 주인들은 적어도 고관 대작은 아닐 것이다. 전쟁에 끌려 나가 개죽음을 당했거나, 떠돌이로 살다 굶어 죽은 이들, 그도 아니면 어떤 집단 학살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숨결이 먼저 닿은 것은 수습하지도 못해 방치되었던 이름없는 이들의 뼈들이었다.

3.
성령 강림일에 읽는 복음 말씀은 굳이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삶을 향해 난 창으로 그 너머를 응시할 때 깨닫는 말씀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4.
교회는 이런 성령 강림일에 어떤 말들을 전하고 들었는가? 우리 사회의 많은 교회들은 이미 우파 이념에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수구적 이념에 대한 증거 구절(proof-text)로만 성서를 보는 이들이 교회를 지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축자주의(문자 하나 하나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를 옹호한다. 엄밀히 말해 축자주의는 세상에 없다. 늘 선택적 축자주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제멋대로 선택한 증거 구절로 만들어내는 교리 체계나 교회의 가르침은 실상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다. 그리 주장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믿는 성서와 내가 읽는 성서는 전혀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하느님은 전혀 다르다. 믿는 대상이 다르니 같은 종교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2mb을 호위하고 있는 이들은 내게 그저 타종교인이다. (타종교를 폄하하는 말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니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개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사안이라는 생각까지 미친다.

5.
그러나 현실은 다시 언어의 지배력이다. 그 권력의 방식은 미디어에 대한 지배이다. 그동안 교회가 벌이는 이데올로기 재생산 구조와 그 효용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아니, 알뛰세를 몰라서 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그런 구조에 저항해야 한다고 했지만, 대패했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이른바 욕망 교회의 분신들인 대형 교회나 그 이데올로기가 교회의 모든 미디어를 잠식해 버렸다. 신학교, 언론, 출판사, 연구소, 혹은 다른 교육 기관을 보아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엄청난 자본 권력이다.

6.
이러한 처지에 이들과의 싸움은 여러모로 승산이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이끌어야 가야 한다는 주장도 어떤 의지에 기대지 않으면 힘을 잃을 것이다. 정의로운 것에 대한 믿음이 더욱 힘겨운 몸부림을 견디게 하리라. 그 몸부림을 좀더 풍요롭게 하려면, 세상을 불태우는 상상력 안에서 무지렁이의 목소리가 좀더 구체적으로 모아져 들려지고, 거기에 들어있는 슬픔과 기쁨의 다양한 삶의 결을 향유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언어가 어떻게 들리도록 하는가?

7.
공교롭게도, 세상 떠난 이의 글을 이런 생각 끝에 접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우리 교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국민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만큼만 가는 것 같습니다. 시민운동도, 촛불도, 정권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80년대 반독재 투쟁이 성공한 것은 국민이 생각하는 만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미디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영향력 있는 미디어는 돈의 지배를 받습니다. 돈이 없는 쪽은 돈이 들지 않거나 적게 드는 매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터넷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정보는 넘쳐나지만, 내용이 부실합니다. 분노와 증오는 넘쳐나지만, 사실과 논리는 부족하고, 깊이도 모자라고, 비슷한 생각끼리도 서로 앞뒤가 맞지 않고 충돌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협업으로 역량을 확대하고, 토론과 검증을 통하여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것입니다.

미디어이든, 인터넷이든, 연구소든, 출판이든, 어디를 보아도 우리가 열세입니다. 그냥 열세가 아니라 형편없는 열세입니다. 이런 열세를 딛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역사의 진운이 함께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돈의 편이 아니라 사람의 편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막강한 돈의 지배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짜내고 이를 지혜롭게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print.asp?article_num=2009052714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