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헝그리 정신? 헝그리하게 살기!

Sunday, April 27th, 2008

누군가와 이야기던 참에 최근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을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 의아했다. 어릴 적 권투 중계에 잘 나오던 흥분된 아나운서의 논평에 등장했고 라면으로 끼니 때운 소녀 달리기 선수의 아픔에도 뭍어나오던 말이 왜 여기서?

더 낮아질 것 없는 극단의 상황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오기와 집념을 뜻하는 말이었을테니 그럴 법도 하게 들렸다. 특히나 우리 사회의 진보 세력에 대한 아쉬움 섞인 조소에서 나왔으니 더욱 그리 생각해 보기도 했다. 다르게는 아마도 배고팠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이 정도로 살게 된 걸로 감사하며 서로 보살피면서 살자는 기억의 다짐으로도 풀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리 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애초부터 헝그리 정신이란게 문제가 아닐까? 헝그리 정신은 끝간데를 모르는 성취와 달성의 욕망의 불쏘시개가 되고, 그런 욕망의 결과를 포장하는 말이 된다. 실상 헝그리 정신으로 만들어낼 만한 어떤 성취 가능성은 예전보다 훨씬 좁아졌다. 헝그리와 부(富)는 대물림되고, 세습하기 때문이다. 이 쯤해서 이 정신은 실패한 사람을 계속 주눅들게 하고, 이른바 성공한 사람을 영웅시하여 정당화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여기에 물들어 있거나 물들고 싶어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우리나라 여의도 한 복판에 있다. 그 교회는 애초에 헝그리한 사람들과 그 정신으로 일어섰다. 일단 배고픔을 벗어나면 과거사를 묻어버리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다. 과거는 부끄러운 것이 되거나 포장되고, 기억은 이제 망각이어야 한다. 소망이 이루어진 뒤에 남는 것은 끝을 모르는 욕망이다. 강남의 어느 교회는 그래서 욕망 교회가 적절한 이름이다. 욕망의 불도저인 프레지던트와 그 끄나풀들이 같은 교회 출신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욕망과 욕심의 제조공장 혹은 증폭 훈련소가 되었고, 여전히 되고 싶어 한다.

현재의 지구 상황에서 볼 때 헝그리 정신은 생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이상 낭만이 아니다. 이미 편만한 욕망의 경쟁 속에서 그 비인간적고 비윤리적인 결과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분 세습제 역시 과거 일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짐할 일은 ‘헝그리하게 살기’인지 모른다. 그래야 속도를 좀 늦출 수 있겠다. 그래야 여유를 가져 볼 수 있겠다. 그래야 생각하면서 살 수 있겠다. 여전히 문제는 그렇게 살면서 절대적인 자본의 힘과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여기에 유혹이 따라 붙는다. 돈을 벌어서 혹은 권력을 가져서 이겨보자는.

강제된 가난과 싸우며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일이 함께 하지 않을 때, 이 유혹은 금새 우리를 삼킨다.

삶을 응시하며 노래하기

Friday, April 11th, 2008

신학은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의 삶을 응시하게 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노래하도록 돕는 일일는지 모른다. 신학하기(doing theology)의 주체는 신학자가 아니다. 신학하기는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하느님 사건에 대한 증언이 서로 소통하도록 돕는 최소한의, 그리고 부분적인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라면 많은 신학한다는 이들은 여전히 헛발질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소통을 자극하고 돕지 않는 한.

어떤 편만한 과잉 욕구가 교회 안에, 사람들 안에, 그리고 어떤 논의에도 자리잡고 있다. 무리하게 일반화하자면, 힘과 지배에 대한 욕구다. 그러나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내가 더 확실하다, 내가 더 순수하다, 내가 더 자유롭다, 내가 더 진실하다는 생각은 종종 자기 정당화의 덫을 놓는다. 위로부터 작동하는 계몽하고 지도하려는 권위주의는, 아래로부터 치받는 반성없는 과잉 비판 혹은 무책임한 비판과 짝을 이룬다. 말들은 그렇지 않아도, 어느 쪽이든 삶에 대한 깊은 응시와 책임이 부족한 경우가 태반이다. 이미 계몽과 비판은 과잉이다. 계몽과 비판의 언어 뒤에 자기 안에 또아리 튼 욕망을 감추는 게 습속이 되면 더이상 정직해 질 수 없다. 결국 자신을 배반할 것이다. 본색을 드러내고 깊이 대화할 일이다. 그게 서로를 망치지 않는 길이다.

마땅히 여기에도 삶에 대한 따뜻한 응시가 바탕이어야 하겠다. 그래야 노래하며 춤출 수 있다.

아래 노래를 듣고 보며 든 짧은 생각.

그 참에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여러 장면이 겹쳤다. 물론 이 노래도.


Existentialism on Prom Night

There are moments when,
When I know it and
The world revolves around us,
And we’re keeping it,
Keeping it all going,
This delicate balance,
Vulnerable all knowing,

Sing like you think no one’s listening,
You would kill for this,
Just a little bit,
Just a little bit,
You would, you would…

Sing me something soft,
Sad and delicate,
Or loud and out of key,
Sing me anything,
we’re glad for what we’ve got,
Done with what we’ve lost
Our whole lives laid out right in front of us,

티벳에 자유를! Free Tibet!

Tuesday, April 8th, 2008

프리 티벳! 티벳에 자유를!

수천의 함성이 이곳 샌프란시스코를 들끓게 하고 있다. 어제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 기습적으로 올라가 자유 티벳을 외치는 현수막을 걸었는가 하면, 오늘은 광장에서 남아프리카 성공회에서 은퇴한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와 배우 리처드 기어를 중심으로 수천명의 군중이 모여 촛불 시위를 벌였다. 중국의 억압 아래 있는 티벳에게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이 시위는 올 여름 중국 베이징 올림픽에 사용될 성화 봉송이 내일로 잡혀 있는 시점에 극에 다를 것인데, 이 때문에 SF 시 당국은 얼마전 일어나 런던과 파리의 성화 보이코트 시위를 겪을끼봐 전전긍긍하는 모양이다.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을 정치에 끌어들리지 말라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를 정치에 이용한 것은 정치인들이거나 독재자들이었다. 우리의 남아 손기정(1912-2002)이 마라톤 금메달을 딴 올림픽(1936)은 히틀러가 마련한 세계를 향한 정치 선전장이었다. 일제의 강점기 아래,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의 슬픔은 올림픽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복잡하게 만든다.

삶이 두터운 탓에 그 중층적인 의미들과 효과들이 무우처럼 썰어지지는 않는다. 운동을 극도로 회피하는 성격이지만, 나는 올림픽 경기에 비칠 때마다 그 순간에 몰입하여 승리하는 자와 패한 자의 마음을 번갈아 가며 느끼고 하릴없이 함께 환호하고 눈물도 흘린다. 미국에 와서 다시 확인했지만, 여기 놈들은 한국을 한국 전쟁과 서울 올림픽으로 밖에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 참 고맙다, 이 놈들아!’)

그러나 적어도 내게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은 히틀러의 것과 구분되지 않는 독재자 전두환의 올림픽이었기에, 아니면 최소한 그 기회를 통해서라도 전두환이가 어떤 자인지를 알려야 했기에, 참으로 오래도록 길바닥을 뛰어 다니고 눕기도 했던 것이다. 자유 티벳을 외치는 이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최근에 일어난 티벳 내의 독립 시위에 대한 중국의 무력 진압과 살상은 광주에 대한 전두환의 살상과 함께 “올림픽”으로 곧장 포개진다. 이들의 참상을 알리는 유투브 동영상이 차단되고 있다 하니, 그곳이 80년의 한국과 2008년의 미얀마와 다를게 무언가?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그걸 외면하려거나, 감추거나, 아직 모를 뿐이다. 비정치적이라는 말은 이미 정치적이다.

투투 주교는 올림픽 자체를 보이코트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도 선양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치 행사가 되어 버린 올림픽에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은 참석하지 말아야 하며, 올림픽을 통해서 중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는데 거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림픽이 열리는 마당에 세상의 이목을 티벳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도 중국을 압박하는 더 효과적일런지 모른다. 실제로 보이코트할 방법은 없다. 반대(protest)를 시위(demonstration)할 뿐이지.

한편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미국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경쟁자 중국을 견제하는데 이 마저도 이용하리라는 것. 서로를 비난하는 인권백서를 경쟁적으로 내는 이 두 나라의 싸움은 선량한 사람들의 착한 생각과 행동들도 정치적으로 써먹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천년 동안이나 중국 눈치만 살핀 습속에 젖어 우리는 달라이 라마 방한 하나 허용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 정부도 못했는데, 제 잇속에만 밝은 이명박 실용 정부에서 일어날 리 만무하다.

작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에 인색한 작은 나라(사람)는 결코 세상을 이기지도, 이끌지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