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은퇴하는 삶

Wednesday, April 2nd, 2008

누구나 늙고 은퇴한다. 매주일 반갑게 맞이 해주시던 신부님이 부활주일 미사 집전을 마지막으로 교회 사목을 떠나셨다. 중국 대륙만큼 넓은 아량으로, 집없이 떠돌아 다니던 우리 한인 교회를 안아 주시고 기꺼운 환대를 한번도 거두지 않으신 고든 라우 신부님이시다.

수년 전에 심장마비를 겪은 뒤, 곧 파킨슨 병이 그분의 건강을 조금씩 흔들어댔다. 성찬례를 집전해야 하는 사제에게 손이 심하게 떨리는 이 병은 그분을 몹시도 애처롭게 했다. 도움이 필요한 탓에 지난 2년여 동안 그분 대신 집전-설교하거나, 공동 집전하거나, 집전 보좌를 정기적으로 해야 했다. 때문에 중국계 미국인들(Chinese Americans)과 더 가까워지긴 했는데, 그분이 떠나시니 사실 내 마음도 조금은 떠 버렸다.

미사 후 교인들을 위해 드리는 마지막 사목 기도에서 그분의 목소리는 떨렸다. 옆에서 그분의 어깨를 감싸고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부활 기념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신부님께 말씀드렸다. “신부님의 오늘은 저의 내일이에요.”

은퇴하는 분들을 여럿 뵈었다. 은퇴에 대한 두려움이 모두에게 있었다. 오래도록 준비한 분이든 그렇지 않고 갑작스레 맞이한 분이든, 두려움은 한결 같았다. 그 두려움에 “백척간두 진일보”로 대응한 분들은 그나마 조금 여유로워 보였다. 은퇴하신 마당에야 인연을 맺었던 유동식 교수님은 그 느리고 넉넉한 삶으로 시간을 더욱 느리게 하는 경지를 보여주셨다. 은퇴하기까지 마지막 10 여년을 아시안 사목과 샌프란시스코 밤거리를 거닐며 위기 상담(the Night Ministry)을 하신 돈 폭스 신부님은 “잠을 더 많이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생각보다 마음이 넉넉해졌노라”고 하셨다. 내 스승인 존 케이터 신부님은 세계를 떠돌며 계속 가르치시는 일이며, 새로운 친구 만나 배우는 일로 새 삶을 누리고 계신다. “진정한 영웅”인 문정현 신부님의 은퇴도 기사로 보았다. 이 분들의 은퇴하는 삶이 “나의 내일”이었으면 좋겠노라고 생각한다.

흔히 가장 사납고 추한 욕심이 “노욕”(老慾)이라고들 한다. 앞길 창창한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기도 하겠으나, 이를 맞이하는 처지에서는 자기 삶을 붙들어 매어보려는 자연스런 마음의 한 발로일게다. 다만 그것이 추하지 않도록 놓아 줄 건 놓아 주도록 여러모로 수련정진하여 준비해야겠다. 꺽어진 나이이니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은퇴를 가장 “멋”지게 드러낸 말을 고교 시절 한 선생님에게서 언젠가 건네 들었다. 졸업한지 십수년 후 젊은 선생님을 만나 연로한 선생님 소식을 여쭙던 중, 고교 시절 시국사건(?!)으로 우리가 속꽤나 썩혀드렸던 한 선생님이 조기 은퇴하셨다고 들었다. 은퇴 후 계획을 묻는 이들에게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은퇴하는 삶은 공(空)으로 사는 것이니, 강가에 나가 강물에 붓을 적셔 주위 바윗돌에 글을 쓰며 그 마르는 것을 즐기는 삶이 아니겠느냐”고.

강을 망치려 작정한 사람들이 있는 처지에, 한적히 나가 붓을 적셔 공(空)한 글을 쓸만한 바윗돌이 남아 있을리 만무하리라 싶으나, 우선 이 글이나마 남겨 두어 내 훗날의 노욕을 짓누르고 두려움과 맞서는 정표로 삼고자 한다.

사형 집행과 장로 대통령

Sunday, March 23rd, 2008

집권 말기에 사형을 무더기로 집행한 사람이나, 이 참에 10년 공백을 깨고 사형 집행 재개를 주장하는 이들의 정권 우두머리가 모두 개신교 “장로 대통령”이란게 눈에 띈다. 도대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성 금요일: 정지된 시간

Friday, March 21st, 2008

성 금요일이 처음부터 “좋은 금요일”(Good Friday)이었던 건 아니다.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두고 “좋은 일”이라고는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할 말이 아니다.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처형 방식이었던데다, 본때를 보여서 전면적인 공포 정치를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죽음과 그 공포는 시간을 정지시켜 버린다.

성 금요일의 사건은 예수의 체포, 심문, 판결, 그리고 처형으로 신속하게 흐른다. 이런 빠른 속도의 원동력은 두려움이다. 그것이 기득권을 지키려는데서 나왔든, 책임을 벗어나려는 행동이든, 아니면 기대와 실망에 대한 집단적인 분풀이든, 자기 보존과 안이의 인간 본능은 두려움에 힘입어 그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범죄에 자신을 내 맡긴다. 두려움에서 나온 증오가 사람들을 삼켜 버린다. 두려움은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그 대상을 심판하여 스스로 정당한 벌을 내린다. 여기서 권력과 대중은 상호 대결을 피하는 대신 그 경계에 있는 희생양을 처단한다. 이 합의된 폭력을 파시즘이라고 하든, 집단적 광기의 살인이라고 하든, 실상 이런 으스스한 말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라, 자기 본능의 한 축으로 늘 잠재해 있다. 사람은 그걸 조절하고 있을 뿐이다. 그 조절 과정은 느리고 깊은 성찰로서만 지켜낼 수 있다.

십자가 처형 사건은 단순히 말해서 폭력에 대한 고발이다. 세상의 온갖 폭력과 죽임, 그리고 그 세력에 대한 고발이다. (이 단순성을 에둘러서 신학적 구원을 대뜸 운운하려는 것은 잘못된 신학의 첫걸음이거나 그 결과이다.) 예수께서 숨은 거두는 순간에 일어났다고 하는 현상들은 일상적인 시간의 정지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낮이 멈춰 밤이 되고, 멀쩡한 성전 휘장이 찢어질리 없고, 무덤이 터져 나올리 없다. 그리고 폭력이 계속되는 한 이 인간의 시간은 정지된다.

그제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죽임의 행진을 시작한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세계의 악동 부쉬는 이라크를 다 “부쉬”고도 여전히 전쟁을 계속할 것이란다. 계속되는 군인들의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전쟁 속에서 희생되는 민간인과 어린이들의 주검을 계속 보는 한, 세계의 시간은 멈춰 있다. 지난 세기로부터 이어지는 전쟁과 야만의 시기가 이어지는 대신 인간의 시간은 멈췄다.

사리와 사욕에 가득 찬 정권을 뽑아 놓은 우리 사회도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차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내가 그만큼 크거나 높지 않으면 내가 당하리라는 경험과 두려움이 편만한 사회는 시간의 초침을 돌리지 못한다. 이런 정권들에 동조하는 심리와 행태가 “죽이시오, 죽이시오”라고 외쳤던 2천년전 어느 총독부 뜰의 풍경과 겹쳐지는 것은 나만의 과장된 생각때문일까?

성 금요일이 “좋은 금요일”인 탓은 한 청년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이 헛도는 두려움과 미움과 죽임의 궤도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은 이 사건을 한(恨)-단(斷)의 변증법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 사건의 시선에서 본 사건 후의 해석 작업 혹은 의미 부여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에 대한 신앙인들의 책임적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이 인종주의로, 성차별로, 지역차별주의, 학벌주의 등으로 계속되는 한, 자신의 일 밖에 대해서는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는 한, 시간은 죽음 속에 묻혀 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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