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사목' Category

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Sunday, September 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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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경청과 봉사 – 환대의 두 차원

Sunday, July 17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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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봉사 – 환대의 두 차원 (루가 10:38~42)

교회 언어에는 짝지은 말들이 많습니다.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위, 은총과 노력 등입니다. 다 좋은 말인데도 굳이 구분하여 반대말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앞엣것이 더 좋고, 뒤엣것은 덜 중요하다며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 탓인지 오늘날 교회는 바른 행동과 예의가 턱없이 부족하고, 세상을 향한 책임 있는 행동에 소홀하다는 비난을 받곤 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짝지은 까닭은 어느 한쪽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인 진실에 담긴 두 차원을 드러내어 그 둘의 조화와 균형을 늘 되새기려는 뜻입니다. 환대의 두 차원인 경청과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겸손한 마음(경청)과 인간을 향한 연민의 행동(봉사)이 만날 때 드러납니다.

오늘 읽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는 환대의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서 지쳐 걷는 세 나그네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합니다. 자기 자신이 고향을 떠나 떠돌며 사는 처지이기에, 지친 나그네의 모습이 더욱 측은합니다. 이 연민으로 새로운 사람을 제 식구처럼 품는 행동이 곧 신앙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만남이 외로운 부부에게 뜻밖의 축복을 선사합니다. 그 시절, ‘아들’의 축복은 그들의 존재를 하느님께서 인정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환대의 더 깊은 진실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때문에 이야기를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나그네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하던 마르타는 손님 곁에 앉아 듣기만 하는 마리아가 야속하여 불평합니다. 예수님은 시중드는 마르타가 아니라 마리아의 편만 들어주시는 것일까요? 섬김보다 배움이 더 훌륭하다는 뜻일까요? 그처럼 간단하다면, 지난주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루가는 오늘 본문 안에 더 깊은 뜻을 이중으로 겹쳐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한편, 더 깊은 환대의 차원을 펼쳐주십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남성만 앞에서 배우거나 가르치고 여성은 뒤에서 시중든다는 구별 관습이 강했습니다. 마르타는 관습에 충실하여 손님 시중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성이지만 선생님 앞에서 당당히 배우는 권리를 누립니다. 여성과 남성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배우고 대화하며 동등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정된 성 역할 분담 관습은 성차별이 되기 쉽습니다. 차별을 넘어서는 일은 ‘좋은 몫’을 선택한 신앙의 행동입니다.

환대가 축복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섬김과 배움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오롯한 마음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관한 옳은 주장과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이 자신에게 머물면 탈이 납니다. 우리 앞에선 하느님을 향하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를 타인과 비교하여 억울한 감정과 분노를 나오기 마련입니다. 종종 율법주의와 신앙의 독선이 이렇게 생겨납니다.

환대의 신앙은 마르타의 봉사와 마리아의 경청이 만나 완성됩니다. 환대는 새롭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며, 연약한 이를 보살피는 섬김의 행동입니다. 동시에, 환대는 한 사람의 삶 전체에 귀를 기울여서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전혀 다른 삶의 경험과 지식을 경청하여 그 안에 마음을 포개는 일입니다. 낯선 나그네 같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온전한 경청과 봉사가 만나는 환대의 신앙이 우리에게 축복을 선물합니다.

환대와 평화를 만드는 신앙

Sunday, July 3r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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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평화를 만드는 신앙 (루가 10:1~11, 16~20)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이리 떼를 어린 양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구나.” 오늘 복음 말씀을 뒤틀어, 어느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 졸업식 강론에서 던지신 우스개였다고 합니다. ‘사목 현장에 나가는 이들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이렇게 자존감을 내리누르는 말이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성도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종교의 현실을 향해 던지는 이 우려와 경고가 실제로 이곳저곳에서 한탄이 되어 되돌아오는 일이 숱합니다. ‘지갑과 카드, 자동차와 인맥’을 우선순위로 두는 삶에서 벗어나, 신앙인이 먼저 찾아야 할 가치와 멈추지 말아야 할 길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길을 함께 걷겠다는 동행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쁜 발걸음으로 여행하시는 까닭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받거나 대접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사랑과 배려에 젖은 ‘옛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고, 낯선 타인을 향해 베푸는 사랑과 배려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를 세우시려는 뜻입니다. 이 여정에 주님께서 우리를 모두 초대하셔서 함께 걷자고 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의 삶에 동행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새 예루살렘’을 우리 삶에 매일 짓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삶을 새롭고 낯선 곳에서 펼쳐나가라는 파송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수동적 환대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 환대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 손님이 되어주라는 당부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안에서만 낯익고 평화로운 관습에서 벗어나, 낯설고 불안정한 삶의 처지를 돌아보며 몸소 겪습니다. 모자라고 빈궁한 처지가 되어 환대의 기쁨이 무엇인지 스스로 새롭게 경험합니다. 아울러, 낯선 이를 어떻게 맞이할지 모르는 문화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누신 사랑과 용서의 환대를 가르칩니다.

이 동행과 파송의 신앙은 갈등하고 불화하는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실천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힘 있는 편에만 머물면, 힘없고 약한 사람의 아픔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이익에 군침을 흘리는 ‘이리 떼’의 문화에 젖어들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걷는 길마다, 머무는 곳마다 화해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몸과 마음이 뒤틀린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간 동료인 ‘어린 양들’이 아파하는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여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입니다.

자기 이익과 안위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는 인간과 그 시대는 불안합니다. 삶의 외면 조건이 나아지는데도 인간의 내면이 더 힘들어지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너나없이 ‘이리 떼’가 되면 갈등과 상처는 깊어집니다. 오직 평화와 치유를 선물하시려는 예수님의 길에 동행하고 파송 받는 신앙만이 새로운 삶을 만듭니다. 이것이 ‘사탄을 이기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기록된 사람’으로 생활하는 기쁨입니다. 이제 복음 말씀을 다시 세워야겠습니다.

“내가 힘없는 어린 양인 너희를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낸다. 그러나 내가 동행할 터이니, 힘을 내어라. 가서 환대하고 평화를 세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