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사목' Category

성 수요일 – 배신과 어둠을 넘어

Wednesday, April 16th, 2014

이사 50:4~9 / 시편 70 / 히브 12:1~3 / 요한 13:21~32

2014년 4월 16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성주간 성 수요일은 배신의 수요일입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길 계획을 세운 날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 복음의 장면은 아무래도 성 목요일 최후 만찬을 배경으로 한 사건이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였던 유다의 배신을 특별히 기억하는 날은 대체로 성 수요일이었기에, ‘배신의 수요일’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사람 유다의 삶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받는 유대 땅의 현실에 깊이 마음을 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로마의 폭압적인 권력을 물리칠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 단체의 일원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곧 오실 정치적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며 로마의 지배 권력과 싸우던 혁명 단체의 일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하고 그 제자단에 참여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제자단 사이에 신임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돈이 오가는 재정 책임은 웬만한 신뢰가 쌓이지 않고서는 맡기지 않습니다. 그는 깊은 신임을 얻은 재정 책임 비서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여러 추측과 해석이 있습니다만, 그리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먼 훗날 우리가 세상을 떠나 그를 만나게 될 일이 있다면 모를까, 아직 그 정확한 동기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서는 그 이유를 단순하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만 전합니다. 그에게 들어간 사탄은 지난 사순 첫 주일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만났던 그 악마였을까요? 잘 먹고 잘 사는 안녕과 권력과 명예를 미끼로 광야에서 40일 동안 고생했던 예수님을 유혹했던 그 악마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탄 악마를 물리치셨지만, 안타깝게도 가리옷 사람 유다는 그 유혹에 넘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애처로운 일입니다. 특히 유다가 뒤늦게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고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 애처로움이 더욱 깊어집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과 제자단의 오랜 신임을 받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생사고락과 친구의 신임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애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배신은 친구 사이에 일어납니다. 가족 사이에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깊이 마음을 두며 배려했고 보살폈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남남에게는 배신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배신은 안타깝습니다. 모든 배신에는 인생의 쓴맛과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이때 배신자 유다는 오늘 우리에게 되묻습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배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알아차리는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할 자를 지목해 달라는 어떤 제자의 부탁에 신호를 줍니다. “내가 빵을 적셔서 줄 사람이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빵을 떼어 유다에게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서 그 일을 행하라.” 게다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신호로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을 합니다. 입맞춤은 언제나 “평화의 입맞춤,” 즉 평화의 인사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들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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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iel van der Borch, “최후의 만찬에서 유다에게 빵을 주시는 예수,” 14세기)

그렇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에 나오는 행동이 유다의 배신행위에 그대로 겹쳐집니다. 우리는 서로 웃는 얼굴로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시는 식탁에 초대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그의 피에 적셔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유다 또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그리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을 바쳐 따랐고, 예수님과 풍찬노숙을 같이했고, 함께하던 친구 동지들과 함께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과 잔을 먹고 마셨습니다. 유다는 여기에 모인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배신을 생각할 때, 우리 역시 그와 똑같은 배신의 잠재적 피의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무엇이 유다를, 그리고 오늘 우리를 배신의 행동으로 이끌까요? 사탄입니다. 광야의 금식 40일을 마친 예수님께 나타났던 그 악마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녕과 복지만을 신앙의 열매로 생각하게 하는 달콤한 유혹입니다. 자기 자신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자신이 지닌 지위로 남들을 나무라고 호령하고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멋진 유혹입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사람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려고 으스대는 근사한 유혹입니다.

오래도록 몸과 마음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며 그와 함께 먹고 마셨다 하더라도, 이 달콤하고 멋지고 근사한 유혹에서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금세 배신자 유다처럼 악마에게 우리 영혼을 팔아버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냉혹한 현실이요, 늘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유다는 빵을 받아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성 수요일은 어둠의 수요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깊은 어둠 속에 똬리 틀고 있는 배신의 그림자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어둠을 직시하고 살피는 시간입니다.

전례 전통의 여러 교회들은 성 수요일 밤에 ‘테네브레’(Tenebre)라는 촛불 예배를 드렸습니다. ‘테네브레’는 어둠과 그늘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입니다. 이 예식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촛불을 켜고, 이와 더불어 다른 여러 개의 촛불을 밝히고 그 둘레로 모입니다. 탄식의 시편들을 읽고, 예레미야 애가를 노래하고, 그리스도 수난의 순간을 담은 복음을 읽으면서 차례로 촛불들을 끄면서 드리는 기도의 예식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상징한 촛불을 제외한 모든 불이 꺼지고, 그 마지막 촛불마저도 어딘가로 사라져서, 우리는 모두 침묵이 지배하는 어둠에 묻힙니다. 그런 뒤에 갑작스러운 그 어둠 속에서 시끄러운 굉음이 울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리는 소음입니다. 어둠이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예식을 통해서 많은 신앙인은 자신의 어둠을 되새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삶, 즉 그의 나눔과 고난과 죽음을 닮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깊은 허공 같은 어둠만 남습니다. 거기에 배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웁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탄식하며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주님께 돌아오라.” 그때, 예수님께서는 탄식하며 우리를 다시 부릅니다. “돌이켜서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러므로 사순절 마지막 수요일인 성 수요일은 사순절 첫날인 재의 수요일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이마에 재를 받는 순간을? 그때 들었던 말을 기억하시나요?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선언은 인간 존재 조건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다들 죽을 존재들이라는 운명을 되새겨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선언은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끝에 새로운 생명, 즉 우리가 먼지와 흙에서 창조되었듯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롭게 빚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삶에 대한 기대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회개하며 “돌아오라,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로운 창조와 생명을 함께 만들자는 초대입니다.

탁월한 구약성서학자이자 시인인 월터 부르그먼은 이 수요일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이 수요일, 우리는 재처럼 창백한 우리의 길을 주님께 드리나니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부활 행진에 드리나니.
해가 지기 전, 우리의 수요일을 받아 주시고, 우리를 부활케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기쁨과 활력과 용기와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두려움 없이 주님의 진리를 살게 하소서.
여기에 오시어 우리의 수요일을 부활케 하시고
자비와 정의와 평화와 너그러움이 넘치게 하소서.”

이제, 이 성찬례에서 여러분은 배신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불어 고난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영광의 빵과 잔을 먹고 마시겠습니까?

신학 ‘공부’와 공동체

Wednesday, January 15th, 2014

멀리서 안부를 묻는 어느 벗된 신부님의 편지에 답장했다. 공부하는 일에 관한 고민과 여러 어려움이 담겨진 편지였고, 나를 여러모로 기억하며 격려해 주는 편지였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하고 그분을 응원했다. 그러나 먼저 된 사람으로서 이렇게 밖에 적어 보낼 수 없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편지는 늘 나 자신에게도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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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바실, 요한 크리소스톰, 신학자 그레고리)

*** 신부님, 잘 지내셨지요? 자세한 소식을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울러 [오래 전 제가 진행한 전례 워크숍과 특강 등에 관한] 옛 기억을 되새겨 주시니 반갑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부끄럽게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지금은 그 열정이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에 하늘을 멍하게 쳐다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지난 5년은 제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안팎[에서 비롯한]… 깊은 절망에 저 자신이 눌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여기저기서 밝힌 바와 같이, 지난 10여 년의 미국 생활은 제게 여러 가지로 축복이요 은총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깊은 공부와 경험을 한 것이 그것이고, 공부와 더불어 사목 현장에서 발을 떼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신자들과 버텼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그나마 하느님 앞에 덜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찌보면 지금처럼 제 공부의 진척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성직자로 불린 이상 어떤 이유로도 사목 현장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

교회의 변화는 그야말로 교회의 현장에서 일어나지, 신학교나 신학자의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 혹은 신학자는 [하느님의 백성이] 현장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좀 더 보편적인 언어로 정리해 내고, 역사와 전통 안에서 그 맥락을 이어주고 새로운 대화의 길을 열어주는 일에 종사할 뿐입니다. 이 순서가 잊히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와 신학, 특히 신학은 ‘지식인의 유희’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 현장을 누가 점령했는지 깊이 살펴볼 일입니다.

특히 신학교는 “성직자 양성 기관”이며, 신학을 가르치는 이는 그 일에 복무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신학자”의 임무이며, 이 임무를 하지 않을 요량이면, 그냥 “연구하는 신학자”로 남으면 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직자 양성 과정에 대해 깊이 살펴보는 기회를 얻길 바랍니다. 학위는 개인적인 성취이지, 교회의 성취는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취가 되려면 교회 현장과 신앙 교육에 연결돼야 하고, 좁게 보더라도 성직자 양성 과정과 연결돼야 합니다.

[…] 여러 식으로 한국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좀 먹는 반지성/반신학주의와 신학교의 전혀 헤아릴 길 없는 신학 교육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 편견이겠으나, 한국 성공회의 실패는 바로 이런 지점의 결핍에 있습니다. 그 와중에 교회는 더욱 피폐해져 갑니다. 더 나빠진 한국 교회로 돌아가는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어쨌든 신학 교육과 성직 양성 과정에 대한 고민을 계속 고민해 주세요. […] 적어도 저는 여기에서 그 점을 깊이 경험하고 대화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깁니다.

‘꼰대’ 같은 소리를 지껄여 대서 미안합니다. 신부님께서 깊이 생각해 주시리라 믿기에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적었다고 헤아려 주세요.

평화를 빕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퇴장하는 일 – 요셉 성인 생각

Monday, December 23rd, 2013

한 달 전에 결정했던 일을 정리하는 막바지다. 작년 여름부터 힘썼던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 공동체 설립에서 나 자신이 퇴장하기로 했다. 고된 식별과 기도를 통한 결정이었다. 사람 일에 아쉬움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말이다. 여전히 이미 난 결정을 멈칫하며 돌아보게 하는 일이 많다. 그것을 지긋이 덮고 묵묵히 가야 한다.

이 공동체와 더불어 우리말로 드리는 마지막 미사에서 나눈 이야기를 옮긴다. 너무 적게 와서 처음에는 스스로 민망했다. 내 그릇이라 생각하니 이내 편해졌다. 오히려 요셉 성인의 이야기에 더 적절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했다. 성인은 몇 사람과 관계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강론을 겸한 작별 인사의 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말처럼 낯선 이를 품어주고 친구가 되어 준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그 기억은 오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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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넷째 주일 – 복음: 마태 1:18~25

사적으로는 다시 기회가 있겠지만, 이 시간이 이 아름다운 성당에서 여러분과 우리말로 드리는 마지막 미사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일말의 비애감이 서려 있기 일쑤입니다. 인생에서 ‘마지막’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여럿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을 끝맺는 일부터, 삶의 마지막, 곧 죽음까지 그 범위도 넓습니다.

지난 4월에 오클랜드 공동체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렸고, 10년을 함께했던 중국인 교회와도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과 드리는 이 ‘마지막’ 미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저 자신의 ‘교회 이름’인 요셉이 등장하는 오늘 복음 이야기를 듣고 여러 감회에 잠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제가 성공회에 들어와서 교회 이름, 즉 신명을 선택할 때 깊이 생각했던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라는 성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고, 그에 따라 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생각하게 했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따르면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족보를 논하는 사람은 대체로 부족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하려고 안쓰럽게 몸부림치기기도 합니다. 마태오 기자도 예수를 구원사의 연속선 상에 놓으려고 다윗의 족보에 요셉을 슬그머니 넣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라는 여인과 약혼을 했습니다. 중매였겠지요. 마리아는 아마도 14살에서 16살 정도인 아가씨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 나이가 혼인 적령기였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인 채로 임신했다는 표현이 성서에 나옵니다. 물론 역사적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과학적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예수는 사생아”라고 단정합니다.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별 의미 없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입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기에, 혼전 임신, 특히 혼외 임신일 가능성이 높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그러지 말라고 말립니다. 고민스럽습니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기를 자기 자식처럼 키워야 합니다. 평생, 아내인 마리아를 의심하면서 살아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형벌과 같습니다. 게다가 이는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대로 파혼하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셉은 이 난처한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다. 받아들여라. 두려워하지 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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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모험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여전히 두려웠지요. 그러나 “있는 그대로” “그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 안에 작으나마 어떤 환대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뜻입니다. 의심과 불확실성을 참고 견디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내쳐질지 모르는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를 자신의 틈에, 의심과 불확실성의 공간을 마련하여 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의심과 회의와 불확실성에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쳐질지 모르는 한 여인을 향한 깊은 연민에 자신의 시선을 돌리는 결단과 행동입니다. 연약한 누군가를 자기 안에 받아들여 돕고 먹이는 일입니다. 여러분과 거듭 나누었거니와, 신앙은 연민의 시선을 자신에게서 돌려 밖을 향하는 일입니다.

이때라야 비로소 임마누엘 사건이 드러납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처소를 마련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고, 하느님을 뵐 수도 없고, 하느님과 거닐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부탁하거나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그 연약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임마누엘 사건이 시작됩니다.

안타깝게도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이즈음에 그칩니다. 물론 루가 복음서에는 예수가 소년으로 자라났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부모와 함께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요셉이 이름을 걸고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요셉은 성서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진 인물이었습니다. 예수의 탄생, 임마누엘 사건,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에,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마리아와 갓난아기를 품었습니다.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폭압적이고 잔인한 헤로데 왕이 명령한 아기 학살을 피해서, 다시 한 번 연약한 마리아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한 일을 끝으로, 요셉은 성서의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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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젊었던 저에게 이 퇴장은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에, 시쳇말로, 꽂혔습니다.

이 퇴장이 용기있는 신앙입니다. 제때에 퇴장하지 않아서 생기는 나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친일의 망령이 아직 퇴장하지 않고, 한국전쟁의 모진 경험과 미운 오해가 아직 퇴장하지 않고, 독재시대의 폭압적 권력 행태가 퇴장하지 않고 웅크리고 있다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활개를 칩니다. “왕년에 내가 중요한 일을 했노라”고 우기며, 자신의 입지를 지키고, 자신이 잡은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또 우리 사회가 그런 망령을 되살리는 몰골을 보노라니 더욱 요셉 성인이 생각납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이렇게 사라진 요셉을 전체 교회의 수호자 성인이라고 모셨습니다. 교회는 연약한 마리아와 갓난아기 같은 이들을 품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요셉은 노동자의 성인입니다. 그 자신이 막일하며 살던 가난한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나 미래가 그리 환하지 않은 평범한 이들의 노동으로 세상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교회 전통은 그 진리를 알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고 노동에 깃든 생명의 가치를 표상하는 수호자로 요셉 성인을 되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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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퇴장해야 합니다. 제 일이 끝났으면 요셉처럼 말없이 퇴장해야 합니다. 또 할 일이 남아있으리라 우기거나 억지로 움켜잡지 말아야 합니다. 이 또한 신앙의 용기입니다.

퇴장하여 생긴 빈 공간에서 다시 새로운 역사가 피어납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체험과 새로운 사람들로 채우며 기뻐하는 일을 남은 이들이 이끌어야 합니다. 요셉은 잊혀야 합니다. 요셉은 그 일을 다 했으니, 퇴장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요셉이 좋았습니다. 이런 요셉의 용기와 영성을 본받고 살고 싶었습니다. 역사의 한순간에 짧게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진 그의 매력에 끌렸습니다. 잠깐 등장해서 어느 때에 슬쩍슬쩍 오래 기억된 그가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복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그의 신앙을 되새겼습니다.

여러분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사람을 품어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성공회라는 교단과 성공회 신부라는 사람을 받아주시고 어울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여러분은 요셉의 영성을 몸소 실천하는 분들입니다. 그 요셉의 영성으로 만든 공간을 더욱 넓혀 주십시오. 그래서 하느님이 지금 여기에, 우리 안에 함께할 수 있는 임마누엘의 공간을 더욱 깊게 해 주십시오. 저도 다시 완고하고 딱딱한 곳으로 돌아가 갈라지고 부서진 이들과 더불어 틈을 넓히고, 그 사이로 빛의 공간을 품는 요셉의 영성을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