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사목' Category

떼제로 향하는 젊은 벗들에게

Monday, April 16th, 2012

이 나이 되도록 프랑스 떼제 공동체에 가보지 못했지만, 지난 25여년 동안, 떼제는 내 신앙의 동경이요, 기도 생활의 모본이요, 신앙의 벗들, 그리고 가족과 나누는 기도의 못자리였다. 10대 말에 책으로 접했던 떼제 이야기와 떼제 성가, 그리고 다양한 떼제 기도 경험, 한국 화곡동 떼제 공동체 기도 체험, 그리고 성가수녀원에서 한동안 지속했던 떼제 기도 모임, 미국에서 가족과 종종 찾던 머시 센터의 떼제 기도 모임.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걱정할 때, 떼제에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 그곳의 불편한 삶을 감수하고, 그 젊음의 생명과 서로 나누는 우정을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하며 함께 모여 기도한다. 이런 ‘봄의 새순’ 같은 기도가 교회의 생수이겠건만, 10년 전에 성공회 신문에 이를 다시 소개하고, 실제로 여러 모양으로 시도했건만, 여전히 우리 교회에 자리 잡지 못한다. 아마도 성과를 빨리 바라는 조급증 때문일 테다. 다른 이들에게서 그윽하게 빛나는 거룩한 얼굴을 인정하지 못하는 질시 때문일 성도 싶다. 푸릇하고 젊은 가슴 안에 심어야 할 깊은 기억이 여러 이유와 모양으로 짓눌리는 시절 탓일 테다.

이제는 내 아들과 딸과 더불어 언제나 한번 가볼까 궁리할 뿐인 터에, 떼제를 향하는 젊은이들, 떼제 순례 중인 이들을 향해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이 건네의 우정의 인사를 옮긴다.

내가 십대였을 때 처음 떼제에 갔습니다. 그 첫 기억은 텐트에 퍼붓듯 쏟아지는 비였죠. 무서웠어요. 여러분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기를 정말로 바랍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이나, 새로운 일이 생기는 순간에 그것도 꼭 나쁜 신고식이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왜냐면 내 두 번째 경험 때문인데요. 떼제에서는 그런 일 때문에 친구 사귀는 일이 정말 쉬워진다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사람들이 그냥 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주 다른 배경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다른 나라와 다는 문화에서 온 사람들은 여러분이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말이에요. 그리고 함께 있다는 걸로 서로 기뻐할 겁니다. 떼제 경험의 중요한 부분은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문화들, 새로운 경험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는 친구가 될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세 번째 경험은 어떤 점에서 가장 깊이 기억에 남는 것인데, 바로 성당 안에서 가진 침묵의 시간입니다. 떼제의 본당, 전체 공동체 교회 안이었죠. 작은 마을 성당에서 경험한 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지만 역사적인 성당이고 때로는 정교회 전례를 거행하기도 합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과 함께하는 깊은 침묵, 하느님과 함께 머물려고 시간을 내어놓는 사람들. 내 생각에, 떼제에 있으면서 가장 어렵기도 하고 가장 흥미로운 경험은 속도를 늦추고 느리게 사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모든 것들이 빛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죠. 말들과 사진들과 촛불의 은은한 빛, 그리고 다른 사람들 얼굴에서 빛나는 은은함으로 서서히 다가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정적을 배우고,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픈 바를 말씀하시도록 내어 놓는 것을 배웁니다. 어떤 좋은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늘 바쁘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 여러분이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떼제 경험이 여러분 인생에 깊은 기억으로 남길 바랍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방문해서 가지게 된 기억처럼 말이죠. 그 경험이 친구를 사귀고, 하느님을 새롭게 경험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느리게 하는 시간, 여러분 자신을 위한 시간, 기도와 사랑이 비추는 은은한 빛 속에 흠뻑 젖는 시간이길 빕니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성 토요일: 무덤의 침묵

Friday, April 6th, 2012

성삼일(Holy Triduum)과 그 전례적 의미에 관한 글을 작년에 서울 교구 성직자들과 나눴다. 그 글을 이룬 파편들은 이미 이 블로그 여기저기에 있으니, 이곳에 적지 않은 성 토요일에 관한 부분만 따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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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요일은 성 금요일이 보여주는 부재와 결핍이 가장 고조된 날이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님의 시신은 내려져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치되었다. 그 무덤은 어둡고 차가운 곳이다. 그 무덤은 단단하게 막혀서 어떤 생명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부재와 침묵의 그늘이 지배하는 곳이다. 십자가 처형 이후로 정지된 시간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피어오를 희망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안식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려서 무덤에 찾아가려 했던 여인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부재와 결핍에 따른 침묵은 우리 인간의 몫일 뿐이다. 성서(1베드 3:19)와 전통(사도신경)은 성 토요일에도 예수님께서 그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하 세계에서도 펼치셨노라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부재와 절망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구원의 위업을 멈추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되찾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를 위해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이해를 통해서라야 우리는 정교회 이콘 전통이 보여주는 부활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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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이콘 – 음간(하데스)에서 아담과 하와를 이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

인터뷰 – 미주 한인 사회의 종교, 갈등, 그리고 희망

Friday, February 3rd, 2012

어느 미주 한국 신문 샌프란시스코 지역 판에 인터뷰 기사가 오늘 나왔다. 한 달 전, 친분 있는 ‘객원’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인터뷰 형태로 정리했다. 몇 시간 넘은 대화였으나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도, 다 전할 수도 없다. 언론 인터뷰를 작정했다면, 이정환 기자의 “인터뷰 당하고 낭패를 당하지 않는 몇 가지 원칙”을 참고했어야 했다.

다행히,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내용을 살펴달라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깊은 배려라 생각한다. 그래서 틀과 기조는 유지하되 이곳저곳 바꿀 기회를 얻었다. 내 식대로 손 봐 돌려준 내용을 옮긴다. 최종 지면에 나온 기사와는 좀 다르다.

미주 한인 사회의 종교, 갈등, 그리고 희망

성공회는 한인사회에서 무척 낯설다. 성공회를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성공회는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교회이다. 개신교 단일 교파로서는 현재 세계 최대이다. 한국에서는 교세가 작아서인지 천주교와 개신교의 중간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만 보더라도 미국 장로교와 비슷한 규모이고 미국 사회 내 영향력도 아주 크다. 교리적인 신학보다는 예배를 중심으로 그 영성과 복음을 체험하고, 이 체험을 삶으로 이어가려는 것이 성공회의 특징이다. 극단과 배타보다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중시한다.

성공회 입장에서 개신교가 일으키는 한국사회의 종교 갈등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모든 개신교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 종교는 언제나 갈등을 유발한다.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신학적인 문제인데, 한국 교회에 흐르는 배타적이고 과도한 선민의식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에만 있는 선민의식을 끌어들이고, 종교개혁기에 나온 선택적 예정론이라는 특정 교리를 결합해서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독단이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타 종교, 심지어는 이웃 교단들과도 갈등이 일어난다. 둘째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인데, 한국의 여러 교회는 반공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사회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에 물들면 좌나 우나 눈을 가리고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된다. 이러면 다양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거나 대화할 수 없다.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에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잘못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사실, 한국 교회는 과거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과 위로를 주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공헌이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교회가 그동안 보여왔던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를 반성해야 할 때다. 예를 들어,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 조찬기도회 등을 열어서 독재 정권을 축복했다. 타 종교에 그토록 배타적이면서도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진 독재 정권의 지도자들은 후원했다. 게다가, 그런 압제적인 정권에 반대하던 시민과 종교, 심지어는 같은 교단까지도 ‘용공’이니 좌파’니 하며 딱지를 붙여 몰아붙이며 독재 정권과 행보를 같이 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런 행태가 아직도 많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갈등이 있다고 보는가?

“한인 사회의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보다 배타성이 더 강한 것 같다. 이것은 모든 이민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한인들이 이민 생활에서 겪는 영적인 어려움을 이겨나가도록 종교적인 위안을 준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나? 이것은 잃어버린 욕구 충족의 길로 빠질 수 있다. 교회가 마련해주는 직위와 직함은 이민자가 주류 사회에서 얻기 어려운 지위의 대체품이기도 하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지곤 한다. 이민 교회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또 한국이나 이민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가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 경우도 많다. 그 하나가 성공에 대한 집착이다. 자칫, 교회가 자기 기준에 따라서 성공한 교인들과 성공하지 못한 교인들을 암묵적으로 갈라놓지는 않은가,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야 한다.

교회가 한인들이 쉽게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면도 있지 않은가? 많은 한국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물론이다. 미주 한인의 70%가 크리스천이라는 통계가 있다. 교회는 새로 이민 온 한인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소개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포교적 목적이 지나치면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은 내면에서 갈등을 빚게 된다. 즉, 각종 서비스를 받게 되면 은연중에 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되고, 교인이 안 되면 얌체같이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이 때문에, 기대와는 달리 이민자들은 생활이 안정되면 교회를 떠난다. 앞에서 말한 70%에는 이렇게 떠난 사람을 반영하지 않은 수치이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한국 학교가 폐쇄 직전까지 갔던 사실이 떠오른다. 교세 확장 수단으로 한인 교회가 한국 학교를 난립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은 서로 지는 게임이다. 최근에는 ‘실리콘 밸리 한국학교’와 같이 특정 종교 색채를 제거해서 오히려 잘 운영되는 사례도 퍼진다고 들었다. 장기적으로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교회는 본연의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인 교회 안의 갈등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가?

갈등이 없는 사회가 있겠는가. 다만, 신앙은 그 갈등을 함께 견디고 그 방향을 공동의 선을 향해 조정하는 훈련이요, 능력이다. 이민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소수자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소수자로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을 함께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특별히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세례는 크리스찬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는 상징이다. 성찬례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잔과 떡을 나눠 먹는다. 이렇게 나누면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이 교회의 선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성숙할 수 있다. 이것이 이민 사회의 힘이어야 한다. 종교나 그 지도자들에게만 답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를 성찰해야 한다.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다른 이웃과 대화할 때 한인 사회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해결할 힘이 생긴다.

북가주 한인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경험과 시야가 좀 더 넓어져야 한다. 한인 사회나 교회에서 듣고 보는 것이 세상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한인들만 울타리를 두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미국 주류 사회 안에서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살아가야 하는 자녀들를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다. 미국 사회나 교회에서 논쟁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한인 사회나 교회의 한정된 시야로만 이해하지 말고, 좀 더 넓게 바라보고 대화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키울 때라야 미국 사회 안에 바로 서서 공헌하는 한인 공동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