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사목' Category

일치 – 신적인 긴박성과 인내심 사이에서

Tuesday, April 26th, 2011

복음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들라면, 주저 없이 요한복음에 나온 예수의 고별사를 들겠다(요한 13장~16장). 뒤따르는 예수의 청원 기도는 그리스도교 영성 신학의 핵심이다(17장).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란 무엇인가? 그 선언을 교회라는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할라치면 예수님의 일치 청원 기도 같은 간절한 깊이는 쉽게 사라지곤 한다.

분열된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동안 일치를 추구했으나, 늘 자신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맞섰다. 로마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중심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교회는 정통 신조를 진리인 듯 내세우며 그에 합의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운다. 가시적 일치는 필요 없으며 영적이며 내적인 진리를 개인적으로 깨달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개신교에는 편만하다.

세계 성공회는 여성 성직 문제, 동성애자 성직 문제를 두고 분열을 거듭한다. 지난 20세기 스스로 선두에 섰던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의 노력과 성과를 무색케 하는 현상이다. 여기에는 ‘진리’를 손아귀에 잡은 것 마냥 행세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저 저마다 진리의 ‘파편’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성공회 전통의 겸손함도 엿보기 어렵다.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어 다급하게 정죄하느라 바쁘다.

지역 교회 차원에서는 어떤가? 교구의 전례 행사는 그 본뜻에서 성직자들과 신자들, 즉 모든 교회가 하나라는 가시적인 표현이다. 성 목요일 성유축복미사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사제 서약 갱신”도 그 서약의 되새김으로 양보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권위에 대한 ‘순종’을 위한 행사로 비치는 동안에 그 일치의 뜻도, 원래 예식의 뜻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뒤에는 어떤 불신이 자리하고 있을 텐데, 희미해지는 신뢰를 회복하지 않고 모종의 으름장이 뒤따른다면, 그 조직의 앞날이 걱정스러울 테다.

교회 역사를 들춰보면 억압적 권력의 행사는 대체로 ‘일치’라는 이름 아래서 진행되었다. 예수님 고별사와 청원 기도에 담긴 일치의 근본인 사랑이 희미해지고 조직과 특권을 위한 다급한 일치가 앞서면서 그 본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급기야 일치를 빌미삼아 통제가 자리 잡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례도 그 본래 넓은 뜻을 잃고 교회 조직의 언어와 행동을 획일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이참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토막을 읽는다. 그 자신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교권의 최고 위치에 있으며,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에 획을 그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일치는 ‘신적인 긴박성과 신적인 인내심’ 사이에 자리 잡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진리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마련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치. 요한복음 17장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일치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기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리를 알도록 기도하셨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일치와 진리와 거룩함. 이 셋은 분리할 수 없다. 일치는 진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교 일치는 신학적 얼버무림이나 무관심에 근거할 수 없다. 거룩함이란,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대로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일치는 진리의 회복과 더불어 가야 하고, 우리 삶을 다시금 거룩하게 하면서 가야 한다. 이 모두가 우리에게는 긴급한 일이다. 그 어느 것 하나를 먼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거기엔 신적인 긴박한 요구가 있고, 신적인 인내가 있다.

in Introducing the Christian Faith, SCM,1964. 76.

부활절 메시지 – 캐서린 쇼리 주교, TEC

Wednesday, April 20th, 2011

부활절 메시지 2011

지구 남반구에서는 부활을 전혀 다른 표상과 은유로 이해할 것입니다. 부활절기가 여름에서 겨울로 변하는 시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북반구에서도 쉽지 않습니다. 강추위가 꾸물거리며 비키지 않고 사월에서 여러 곳에 눈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임박한 새 생명을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나타날 새로운 창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부서진 우리 세계의 곳곳에서 처참한 재앙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키우시는 새로운 못자리 – 그것이 무덤일지라도 – 를 목격합니다. 아이티의 상황은 끔찍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루하루 희망을 밝히며 키워내고 있습니다. 포르토프랭스의 재건 계획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 나라를 축복하고 좀 더 나은 정부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내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성공회는 이 모든 가능성을 위해 협력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새로 주교좌 성당을 건설할 계획이 그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 삼위일체 성당과 성 피에르 대학의 무덤은 이제 꽃피는 정원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관계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사목 활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활은 여러 곳에서 일어납니다. 여전히 찾아야 할 테지만, 나무에서 움트는 첫 싹이 트고, 눈 얼음은 따뜻한 봄에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가 남긴 결과는 여전히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벌이는 사투는 지금도 부활보다는 묵시적 종말에 걸맞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일본 북동부에서는 많은 신앙인이 노인들을 먹이고 집을 잃은 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일차적인 관심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에너지의 사용과 소비주의에 빠진 생활 태도에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건네는 선물은 인간이 하느님이 누리는 거룩한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래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기에, 인간은 이제 하느님과 같이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 고난과 부활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열정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우주적인 선포입니다. 부활의 백성인 우리는 죽음과 파괴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늘 일하시며 창조를 위한 새로운 은총을 가져다주신다는 확신을 새기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우주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기심을 치우려는 작으나마 기꺼운 의지와 더 큰 전체에 자신을 접붙이려는 새로운 기회를 통해서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놓인 장벽을 낮추고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요, 거룩한 한 분에게서 나온 공동의 운명체인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를 대신하여 그분이 하신 일을 이제 우리가 나눠야 합니다. 부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펼치시는 일의 일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삶 속에서 그 부활의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은총이 부활절기를 통해 넘쳐나기를 빕니다. 나가서, 주위 세계를 위한 부활이 됩시다.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원문: http://www.episcopalchurch.org/79425_127900_ENG_HTM.htm
번역: 주낙현 신부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Monday, April 18th, 2011

어느 신부님의 부탁으로 성주간 전례에 관한 글을 써서 한국에 보냈다. 그동안 블로그에 적었던 여러 생각을 부활 성삼일 전례 전체에 맞춰 다시 엮어 확장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바쁜 마음 때문에 격하고 날이 선 글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성삼일 사건이 그만큼 격하고 전복적인 사건이라며 볼품없는 글품을 변명하려 했다.

못난 자식 보내는 심정으로 글을 보내고, 다시 돌아앉아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성주간 생각’을 듣는다. 그러고 보니 써서 보낸 내 글의 처지가 더욱 가련하다. 내 글은 그 못난대로 읽힐 처지를 찾으면 되겠고, 나도 캔터베리 대주교님 ‘급’이 당연히 아니다. 😉 늘 영어가 벽인 이들도 함께 나눠야 할 깊은 생각이기에 우리말 번역에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 시간을 쏟았다.

성주간 생각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모든 점에서 성주간은 정말이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바로 이 주간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에 아주 극적으로 펼쳐지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합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간 전례와 예식은 우리를 하나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성지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면서 이 여정을 시작합니다. 성지와 십자가 매듭의 성지를 축복하고, 그것을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첫 성지주일의 바로 그 사람들이 되어 예수님을 기쁘게 환영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이 그리 환영할 만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우리 세상과 삶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인지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그 첫 성주간의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원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갑시다. 이 주간 내내 복음서에서 읽게 될 수난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십 년 전부터 여러 교회에서는 성 목요일 아침에 특별한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교구의 사제들과 부제들이 주교와 함께 모여서 서품 서약을 갱신하고, 복음의 사목자로 약속한 바를 갱신하는 예식입니다. 그리고 주교는 성유를 축복하여 여러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 그리고 서품에 사용하도록 합니다. 성주간에 이 예식은 사목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여느 신자들처럼 성직자들도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사제, 부제, 주교, 혹은 그 누구에게나, 예수의 제자로서 사목자인 것이 자기 본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자신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일은 그들 자신의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됨을 새로 확인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밤 전례 안에서 모든 신자가 세례 서약을 갱신하는 것처럼, 성주간 중간에 이런 서약 갱신의 기회를 얻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유 축복도 복음의 사목자에게 무언가를 되새겨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기름과 물과 같은 일상의 물질이 교회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상징하는, 강력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매체로 쓰입니다. 또한, 성서에서 기름은 도유와 치유로 연결되는데, 이는 복음의 사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또 기름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관계, 인간 사이의 소외, 그리고 병고로 공동체에서 멀어진 이들에게 치유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그리스도교 사목 자체의 중심이 되는 실체를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위대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 사건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펼쳐야 할 봉사직을 말 그대로, 그리고 완벽히 몸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으시고 종처럼 그들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밤 전례에서 성직자들은 모두 신자들의 발을 씻어 줍니다. 이는 예수 복음의 힘과 권위, 그 중요성이 늘 섬김을 통해서 드러남을 되새겨 줍니다. 섬김을 보여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리스도교에서는 절대로 힘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 목요일 저녁,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의 식탁에 둘러앉아 예수님의 몸과 피를 거룩한 친교의 성사 속에서 나누는 일은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겸손과 그분의 섬김이라는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밤의 어둠 속으로 이동합니다. 거기서 게쎄마네에 오르신 예수님을 지켜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 첫 제자들처럼 잠에 빠지고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보다는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다는 사실을.

성찬례가 끝나면, 제대포를 벗기고, 장식을 치웁니다. 교회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 남습니다. 이렇게 벗겨진 채로 성 금요일을 지나 부활밤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낼 것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의 궁핍, 우리의 가난을. 그러므로 꽃이나 그 어떤 장식이 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벽, 벗겨져 드러난 제대와 우리 자신을 성 금요일의 놀라운 현실 실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금요일에 많은 교회와 여러 전통에서는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교인 전체가 예루살렘의 군중이 되어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의 죽음을 바랐던 이들과 일체가 되는 궁극의 순간입니다. 우리의 죄와 실패가 정말로 완전히 발가벗겨져 우리 자신에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 금요일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면모를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했던 이들이 지녔던 똑같은 동기를 우리 안에서 직면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인 열광에 사로잡힌 여정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다가도 예수님이 위험하고 어려운 분인 것을 깨닫자, 금세 그분을 저버리게 한 열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 금요일은 우리가 인정하기 꺼리는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발견하는 날만은 아닙니다. 옛날 성가가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생명의 나무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시는 그리스도의 팔을 봅니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의 근원인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꺼이 하시려는 그 희생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의 어둠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를 포용하시고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성 토요일과 부활일 아침의 사건 속에서 완벽하게 참된 이로 만들어 주심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성 토요일의 어둠 속에서 모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어둠 속에서 빛을 내시고, 사막에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그의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며 환호하고, 예언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일과 말씀이 결국에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지를 듣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위대한 신비로 초대받습니다.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을 맞이하며, 촛불을 모두 켜고 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 빛을 축하합니다.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걸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던 어둠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우리 자신을 보는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패와 죄가 드러난 어둠에서 희망과 용서의 빛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연유에서 부활의 첫 성찬례는 중단했던 모든 것을 집어들고, 오르간을 울리고, 종을 치면서 한 주간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계신 집에 당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함께 서서 성령을 통하여 세상에 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부활일에 우리는 그저 거기에 서서 그 사랑을 흠뻑 받을 뿐입니다. 여정이 끝나고 우리는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 집은 언제나 자비로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사랑의 집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랑이 궁극적인 희생을 통하여 하늘과 땅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2880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