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번역' Category

성삼일에 듣는 “톰 조드의 유령”

Thursday, March 28th, 2013

성삼일(Triduum Sacrum)에 듣는 고전적인 성가가 숱하겠으나, 나는 오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톰 조드의 유령”(The Ghost of Tom Joad)을 들으며, 이 거룩하고 전복적인 시간을 준비한다.

미국 현대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널리 읽혔지만, 그 자신의 사회주의와 소설이 보여주었던 미국 노동자 계급의 비참한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소설에 담긴 참혹한 현실은 세계화한 자본주의의 패권 아래 곳곳에서 이주 노동자와 같이 여전히 주변부를 떠도는 이들 안에서 확장될 뿐 나아질 기미가 없다. 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을까?

스타인벡은 노벨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는 인간의 증명된 능력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위대함을 위한, 패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용맹과 용기를 위한, 그리고 측은지심과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약함과 절망에 대항하는 끊임 없는 싸움에서 이것들은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빛나는 깃발입니다. 인간이 완전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작가는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도 아니며 문학의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성공회 신자(Episcopalian)였던 스타인벡은 역사 속의 교회에 비판적이면서도 복음의 가치인 측은지심과 사랑을 그의 소설에 되살려 놓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에 인용한 그의 말에 절반은 동의한다. 측은지심과 사랑을 끝까지 밀고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과 저항의 연대를 위한 근거여야 한다고 나 스스로 해석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피력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낙관주의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가 생각했던 이상이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펼쳐졌고 펼쳐지는지를 목격했던 후대 사람이니까. 세상이 변하지 않는 여러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런 낙관주의가 인생 곳곳에 놓인 탐욕과 권력 앞에서 너무도 쉽게 무너진 탓이라 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은 바로 이같은 낙관주의의 균열과 그 깨어진 틈에 존재한다.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허튼 낙관주의를 의심하는 비관주의자이며, 억압의 비관주의에 저항하는 낙관주의자이다. 이 균열과 깨진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부활이 그 빛이다.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1939)가 출간된 지 반세기가 넘은 마당에,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사람이 아닌 <<톰 조드의 유령>>(1995)을 우리 안에 되살려 놓는다. 이 노래를 성삼일 성가로 들으며 나는 톰 조드의 유령, 아니 예수의 유령을 찾는 성삼일을 시작한다.

톰 조드의 유령
브루스 스프링스틴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느니
고속도로 순찰 헬기가 산등 위를 날아오고
다리 밑 모닥불 위에선 뜨거운 국물이 끓고 있네
피신처를 지나는 철조망의 끝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온 것을 환영하고
남서부 어디 차 안에는 가족들이 잠을 자고
집도 없고, 일자리도 없고, 평화도 없고, 휴식도 없는 곳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지만
누구도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웃으며 묻지 않느니
나는 이곳 모닥불빛 아래 앉아서
톰 조드의 유령을 찾고 있느니

그는 침낭에서 기도서를 꺼내고
사제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니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때를 기다리고
지하도 아래 종이상자 안에서
약속된 땅을 향한 편도 차표를 꺼내느니
배에는 구멍이 들고, 손에는 총을 든 땅
돌베개를 베고 잠들며
도시를 흐르는 수로에서 몸을 씻는 땅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고
모두가 어디로 향하는 지 알고 있지만
나는 모닥불빛 아래 앉아
톰 조드의 유령을 기다리느니

이제 톰이 말하네. “엄마, 경찰이 어떤 사람을 때리고 있을 곳에선 어디든
갓난아기가 배고파 우는 곳에선 어디든
피와 증오를 반대하는 싸움이 있는 곳에선 어디든
저를 보세요, 엄마. 제가 거기 있을 거에요.
누군가 설 자리, 직장과 도움의 손길을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에선 어디든
누군가 자유를 위해 싸우는 곳에선 어디든
그들 눈에서, 엄마, 나를 만날 거에요.”

흠, 고속도로는 이 밤에도 생기가 돌지만
누구도 서로 어디로 가느냐고 웃으며 묻지 않느니
나는 이곳 모닥불빛 아래 앉아서
톰 조드의 유령을 찾고 있느니

(가사 번역: 주낙현 신부)

우리는 타인처럼 여행한다

Friday, November 30th, 2012

에드워드 사이드 관련 논문을 하나 읽는데, 첫머리에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 1941-2008)의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이십 수년 전, 고등학교 막바지에 구해 친구들과 돌려 읽은 ‘팔레스타인 저항 시선’이 생각났다. 창비에서 나왔는지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는지 기억마저 감감하다.

2천 년 넘도록 유배당한 유대인들이 옛 땅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자본과 권력으로 점령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유배시킨 모순의 땅. 그곳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직도 계속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갈등 속에서 무고하고 무참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 그 희생은 언제나 끝날까?

그 길고도 먼 여정에서 다르위시는 희망의 끈을 놓치 않는다. 유배의 삶은 시편과 예언서들과 복음을 읽으며 키우는 새로운 생명이 될 테니까. 잠시 멈추어 그 여정을 기리며, 바삐 멋대로 졸역하여 올린다.

우리는 타인처럼 여행한다.

마흐무드 다르위시

우리는 타인처럼 여행한다. 그러나 어디로도 돌아올 수 없으니, 여행은
구름 길과 같은 것.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름의 어둠 속에, 나무들 뿌리 사이에 묻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내들에게 말했다. 우리 같은 아이를 낳자고
수 백 년에 걸쳐, 우리는 이 여정을 끝낼 수 있으리니
한 나라의 시간, 불가능한 것의 잣대를 향한 여정을
우리는 시편을 마차 삼아 여행하고, 예언자의 천막에서 잠을 자며
때때로 집시처럼 외치러 나오느니.
우리는 새의 부리로 공간을 측량하거나, 저 먼 거리를 향해
노래하고 달빛을 씻느니.
그대의 길은 멀고, 이 먼 길을 감내하는 일곱 여인의 꿈은
그대의 어깨 위에 있느니. 그들을 위해 야자수를 흔들어라, 그리하여
그 이름들을 알게 되고, 갈릴래아 소년의 어머니가 될 이를 알게 되리니
우리에게는 말씀을 지닌 나라가 있느니. 발언하라. 발언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이 여행의 끝을 알게 되리니.

원시: Mahmoud Darwish, “We Travel Like Other People” (1984)
번역: 주낙현 신부

성찬기도 5 – 캐나다 성공회 기도서

Wednesday, September 5th, 2012

일본에서 더듬거리는 우리말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래 사귀며 우정을 나누었던 고토 신부님이었다. 오랜 만에 듣는 목소리와 안부에 반가왔고, 암으로 투병했던 사모님의 건강한 목소리까지 들으니 울컥하도록 기뻤다.

안부에 이은 부탁이 있었다. 일본 성공회 중부 교구 선교 100주년 기념 미사가 있을 예정이란다. 중부 교구는 캐나다 성공회가 선교했으므로, 그 노고를 기념하기 위하여 캐나다 성공회 기도서 성찬례를 이용하기로 했단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실 터이니, 성찬기도 부분만 우리말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기도서를 들춰 여러 번 고쳐 읽고, 잠시 허튼 번역을 일삼았다. 다른 성공회 관구의 성찬 기도를 나누려고 여기에도 졸역을 옮긴다.

캐나다 성공회 대안 예식서

The Book of Alternative Services of the Anglican Church of Canada

성찬기도 5 Eucharistic Prayer 5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하소서.

마음을 드높이
주님을 향하여 (주님께 올립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경이로운 세상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주님의 능력으로 온 우주를 지키시오니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나이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어
온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셨으며,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도록 하셨으나,
우리는 나쁜 행실로 주님을 거역하였나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 세상을 고치시고
우리를 모아 한 가족이 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땅과 하늘에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이들과 함께
주님의 놀라운 이름을 소리 높여 찬양하나이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

주님의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으니,
우리가 사랑이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나이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배고픈 사람들을 돌보시며
아픈 사람들과 쫓겨난 사람들과 함께 고통 당하십니다.
배신 당하고 버림 받으셨으나, 우리에게 되갚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나이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들을 일으키시어
우리에게 주님 사랑의 힘을 보여 주시고
주님의 백성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나이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시기 전날 밤,
예수께서는 벗들과 나누는 만찬에서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떼어, 벗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드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주는 내 몸입니다.”

식사를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잔을 드시고,
축복하시며 벗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여러분은 이 잔을 받아 드십시오.
이것은 내 피의 잔,
여러분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으니,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은혜로우신 하느님,
이 빵과 포도주로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축하하며
예수 안에 계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바치나이다.
주님의 성령을 우리와 이 예물 위에 보내시어
이 빵을 떼며, 주님 자녀로 모인 우리가 이 생명을 나눌 때에
예수의 현존을 깨닫게 하소서.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하느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종으로 불러 주셨으니
예수의 용기와 사랑을 우리 안에 채워 주시어
온 세상이 주님 나라의 식탁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전능하신 아버지를 영원토록 찬미하나이다.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