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서' Category

스테파노의 순교와 5.18

Sunday, May 18th, 2014

사도 7:55~60 / 시편 31:1~5, 15~16 / 1베드 2:2~10 / 요한 14:1~14

2014년 5월 18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9시, 오후 3시 성찬례, 주낙현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주님, 
내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 우리는 성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을 목격합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첫 순교자였습니다. 사도행전을 쓴 루가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역사가입니다. 루가 복음서 기자는 스테파노의 증언과 선포가 어떻게 그의 순교와 연결되는지를 서술하며, 역사를 읽고 바라보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베풀었던 보살핌과 동고동락의 역사를 차분하게 요약합니다. 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분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있었던 무리와 더불어 그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는 경험과 약속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이들은 자신 종교와 정치의 특권을 이용하여 보통 사람을 얕잡아 보고 율법으로 사람을 옥죄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마련해 주셨는데도, 자신들의 업적인 양 떠벌렸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결국에는 황금으로 만든 소를 섬겼습니다. 돈과 권력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의를 비판한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의 입을 빌려, 이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십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말한다고 다 신앙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도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의 불편한 진실 선포에 귀를 막았습니다.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을 진실로 여기고, 불편한 진실을 못 들은 체했습니다. 귀를 여는 대신에 그들은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진실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폭력이 등장했습니다. 결국,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한편, 사람을 죽이고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이들은 그저 수수방관했습니다.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성서는 이 세밀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록합니다.

진실에 귀를 막고, 불편한 마음이 들자 돌을 들어 생명을 앗아가고, 참담한 불의와 폭력의 현실을 수수방관하는 상황, 이것이 스테파노의 순교가 일어났던 무대입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 제대 위 정면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는 순교자 스테파노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그는 슬픈 얼굴입니다. 슬픈 표정의 그는 자신을 죽인 돌을 자신의 옷에 주워담고 있는 모습입니다. 알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상한 장면입니다. 여러분은 이 모습을 어떻게 보나요?

이 모자이크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눈을 돌려 성당 밖 세상을 둘러봅니다. 주변 모두가 싱그럽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는 5월입니다. 꽃이 아름답고 그 향기를 품은 바람이 참 개운합니다. 옷도 가벼워지고 사람들 얼굴에 활기가 넘칩니다.

바로 이런 5월에 우리 역사는 우리 기억과 몸에 숱한 상처와 슬픔을 남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죽음의 그림자인 탓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명의 기운이 화사한 이 시절에 죽음을 이야기하자니 아주 짓궂은 일로도 들립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유명한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금세 잊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올해 우리에게 4월은 통째로 잔인했습니다. 세월호의 참극이 벌어진 4월은 5월로 연이어 있고 우리는 그 세월을 살아갑니다. 올해 우리에게 4월과 5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입니다. 시인 엘리엇의 말대로 우리 안에 있었던 참혹한 죽임의 역사를 망각하고 되풀이하기 때문에 더욱 잔인합니다.

오늘은 5월 18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1980년 5.18 광주 민중 항쟁이 어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외부 세력의 선동과 개입으로 이뤄졌다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이미 조사가 끝나서 확인된 사실과 진실을 세월의 망각을 이용해서 호도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수주의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인 조갑제 씨는 80년 당시 기자로서 5.18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5.18에 대하여 허위와 거짓말을 퍼뜨리는 현상을 보며, 자신이 아무리 보수주의자라 하더라도, 이런 사실과 진실 왜곡만은 인정하기 어렵노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조갑제 씨마저도 좌파라고 몰립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시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잔인한 시대입니다.

한편, 우리가 역사를 되새기는 방법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되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4.19 나 5.18, 그리고 역사 속의 안타까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중요한 탓에, 그 큰 그림과 거대한 구호와 정당성으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그 억울한 죽음을 직면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만 그 역사를 기억하지 않았나요? 34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5.18 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침묵)

1980년 5월 18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독재자 전두환은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5월 18일, 민주 인사를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국회의사당을 군대로 점령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이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광주에서는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이 시위 학생을 무참하게 진압했습니다. 이에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에 나와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이튿날부터는 증원된 공수여단이 광주에 들어와 무자비한 진압과 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주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계엄군은 5월 22일 광주 전체를 고립시키기 위해 작전상 후퇴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광주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을 법합니다. 이러면 보통 사람들은 제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친구와 자녀와 남편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이웃이 처참하게 쓰러졌습니다.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수많은 부상자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5월 22일부터 고립된 광주는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학생과 시민은 총기를 나눠 들고 계엄군의 진압과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수많은 시민이 주먹밥을 해 와서 시민군의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밥을 나누었습니다. 많은 여고생과 시민은 병원으로 찾아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헌혈했습니다. 피를 나누었습니다.

시장은 예상대로 섰습니다. 부 도지사를 비롯한 도청 공무원들이 정상 출근하여, 사망자와 부상자를 위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범죄율은 오히려 현격하게 떨어졌습니다.

신비하게도, 5월 22일부터, 5월 27일 새벽 전남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이 닷새는 실제로 밥과 피를 나누는 거룩한 공동체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닷새는 거룩한 날들이었습니다.

5.18 은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외치는 간단한 구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자들이 휘두르는 폭압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께 견디고 통과했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닷새 동안은 5.18 의 정의로운 삶이 세상에 드러나는 실험의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상처 위에서 거룩한 일이 벌어지는 성사(聖事)의 시공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5.18의 진정한 꿈이 아닐까요? 여기에 우리 역사의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34년 동안 이 실험과 꿈을 우리 몸으로 훈련하며 그 실험을 우리 사회 속에서 계속했던가요?

오늘 베드로서의 말씀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람들에게 구박받고 버림받았다가 머릿돌이 된 돌 이야기입니다. 사람에게는 오해와 손가락질의 대상이고 버림받은 돌이었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영적인 건물을 튼튼히 받치는 귀한 머릿돌이 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돌이 아니라, 사람이 머물러 쉴 곳을 마련하는 기초, 사람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사랑을 나누며 행복을 지켜주는 집을 짓는 돌을 말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돌입니다.

베드로서의 기자는 압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돌은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장애물인 돌”입니다.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죽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돌을 만들려는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계속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다시 대성당 모자이크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스테파노 성인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의 신비로운 표정과 몸짓의 비밀이 풀립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던 미움의 돌을 자기 품에 주워담아 생명을 보호하고 살리는 주춧돌로 쓰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의 역사가 되풀이되는데도 수수방관하는 이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봅니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아픈 시선을 우리에게 보냅니다.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뜻은 ‘왕관’입니다. 그는 진실을 말하면서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신 예수님의 관을 받아드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테파노가 당한 ‘순교’(martyria) 본래 뜻은 ‘증언과 선교’입니다. 그는 세상에 나가 진실을 증언하는 일이 순교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순교가 바로 우리의 선교 사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역사에 담긴 아픔과 상처, 고통과 희망을 함께 기억하며, 역사를 새로 바라보고 진실을 알아내며, 새로운 생명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그 생명의 길을 내는 사람입니다. 그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의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부활 금요일 – 창조세계를 품은 구원

Friday, April 25th, 2014

부활 금요일

사도 4:1~12 / 시편 118:1~4, 22~26 / 요한 21:1~14

2014년 4월 25일,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금요일 정오 성찬례

존 케이터 신부 The Rev. John Kater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여러분과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 제게는 큰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아울러, 한국 성공회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큰 비극, 너무도 슬픈 상실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나눕니다. 저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이 함께 슬퍼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Blake_Creating_Adam.png

(윌리암 블레이크, “아담을 창조하는 엘로힘” 1795/c. 1805)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11~12)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 베드로가 한 설교 가운데 나온 이 말들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쁜 소식일 수도 있고 나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 판단을 내리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이 무슨 뜻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과 그 벗들에게 구원이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 훨씬 큰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통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평화와 기쁨의 상태, 조화와 즐거움의 상태입니다. 성서는 이를 두고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고 되뇝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이 역사의 끝에서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바뀌고, 하느님께서 늘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통치는 우리가 평화와 기쁨을 알고, 그 통치의 표지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엿볼 수 있습니다. 이 희망과 전망이야말로 분명히 기쁘고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소식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이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원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면, 많은 사람에게는 나쁜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해석은 유대인들에게 나쁜 소식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과 맺은 관계가 하느님께서 자기 조상들과 맺은 계약으로 영원히 마련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말은 평화롭고 겸허하고 자비심이 가득하고 너그러운 마음과 실천으로 살아가는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나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에게도 나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하느님의 약속을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한 문화와 전통에 있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베드로가 누구에게도 이런 나쁜 소식을 전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좋은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저는 베드로가 옳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사시러 오신 하느님께서는 세계 전체를 당신 품으로 끌어당기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인간이 경험하는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셨습니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와 연대하셨습니다. 인간성 전체를 껴안으시고 인류 안에서 하느님의 깊은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여러분과 저만 변화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신 대로 그분을 아는 사람들만도 아니고, 그분의 십자성호를 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사건은 우리 인간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만이 아니라 이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한 것입니다.

이 창조세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것은 전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은 변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을 당신 가까이 끌어당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잘 모르는 모든 사람도 당신께로 끌어당기셨습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당신께로 끌어 당겨 품으시며 거기에 계십니다.

여러분은 잘 기억하시지요? 마지막 날에 예수님을 옷 입히고, 잡술 것을 드리고, 방문하고, 위로해 주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제가 언제 그런 일을 했나요?”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러분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만이 행복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행복하고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옳고 완전하다는 이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분명 베드로는 옳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복된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복된 소식입니다.

마지막 날, 누가 하늘나라에 들고, 누가 빠질지를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심판은 우리가 내릴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고 경계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아멘.

(번역: 주낙현 신부)

부활일 – 부활은 없습니다.

Sunday, April 20th, 2014

사도 10:34~43 / 시편 118:1~2,14~24 / 골로 3:1~4 / 요한 20:1~18

2014년 4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후 6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여러분은 오늘 아침, 혹은 오늘 오후, 집을 나서면서 어떤 길을 걸으며 나오셨나요? 혹시 그 길 사이로 예쁜 꽃들이 피어있지 않던가요? 거리 곳곳에 화사한 봄 내음이 가득하지 않던가요? 혹시 여러분은 이 시간 성당에 들어오기 전에 성당 오르막길 화단에 피어난 꽃들을 보셨나요?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피고선 수줍은 듯 뽐내는 그 환한 꽃들을 보셨나요?

flowers_Easter.png

이렇게 예쁜 꽃들이 사방에 피어나는데, 생때같은 목숨들이, 막 꽃망울을 피우려는 생명들이 순식간에, 이 세상에 맺은 사랑들과 이별해야 하는 사건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밖에 핀 꽃들처럼 예쁘게 피어날 생명들이 우리와 억지로 이별해야 했습니다.

제 친구는 지금 진도 앞바다에 나가 있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무 때나 쉽게 쓰다듬고 안아줄 수 있었던 내 딸 예은이. 그러나 지금 나는 겨우 예은이 곁 수십 미터 앞에 가려고 사정하고 부탁하며 갈아타고 또 갈아타서 이제 예은이의 눈물 위에 떠 있습니다. 이곳이 현재로써는 예은이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에.”

여전히 제 눈에는 세상에 널리 핀 봄꽃들과 차디찬 바닷속에서 숨을 거둔 생명들이 겹쳐지기만 합니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서 애통해 하는 마리아와 세월호에 갇힌 생명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제 눈물 속에 들어와 앉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십자가의 절규가 들립니다.

우리는 무엇하러 지금까지 사순절의 여정을 걸어왔던 것일까요? 우리는 어쩌자고 지난 성 목요일의 세족례와 성찬 제정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을까요? 성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침묵과 어둠 속에 묻히신 성 토요일을 우리는 어떻게 지나서 어제 부활밤과 오늘 부활일에 다다랐을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복음, 어떤 기쁨을 나누자고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일까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상황을 보고 당황합니다. 무덤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굴러있고 무덤이 열려 있습니다. 이 소식을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니 그들도 놀라서 황급히 달려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는 당황할 뿐 어떤 생각인지 무심한 모양으로 집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복음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직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 우두커니 남습니다. 마리아는 거기서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도 억울한데 그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 애통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나타나 우는 이유를 물으니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누군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분이 나타나,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돌려주세요. 제가 모셔야겠어요.”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목소리는 지금 진도 앞바다에 있는 모든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들의 물음과 울음이 아니던가요?

그때 그 흰옷을 입은 이는 이렇게 부릅니다. “마리아야!” 아, 바로 그때, 마리아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부활은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상실된 순간, 모든 것이 없어진 순간, 그리하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 그리하여 우리에게 눈물 밖에는 달리 흐를 것이 없을 때, 그 눈물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볼록렌즈가 되어 새로운 사람을 발견하고 만나게 합니다. 그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우리의 귓가를 적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 눈물만이 우리의 뇌를 깨우고 일으켜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을 고스란히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통해 하는 눈물이요, 사랑하는 눈물이요, 그리고 기뻐하는 눈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엄마, 아빠” 부르며 홀연히 앞에 나타나는 생명들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애통과 사랑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이 되는 부활 사건을 가로막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침묵과 어둠과 죽음의 무덤 문을 부숴버려야 할 텐데, 그 육중한 돌문으로 무덤을 가로막고, 오히려 단단한 콘크리트로 무덤 문을 아예 발라버리며 죽음을 재촉하고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들이 이 사회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꽃 같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모든 일에는 어른들의 욕심이 곳곳에 그득그득합니다. 안정성이 확인되지 않은 오래된 배를 수입하고, 법규를 수정해서 더 오래 쓰도록 하고, 사람과 짐을 더 싣도록 개조하고, 빠듯한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위험한 지름길을 선택하고, 위험한 뱃길을 초보 항해사에게 맡겨 여전히 속력을 내고, 배와 함께 목숨을 같이해야 할 선장은 가장 먼저 배를 빠져나옵니다. 그 순간, 꽃 같은 생명들은 여전히 객실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로 위로하며 못다 한 사랑의 안부를 전하며 대피 명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4월의 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계절은 얄밉게도 수많은 생명이 죽어간 황무지에도 꽃을 피웁니다. 지난 10년만 돌아봐도 우리 사회의 욕심과 이기심과 속도가 가져온 황무지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위에 핀 망각의 꽃들은 무엇이나요?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대로 ‘자율 학습’이라는 언어도단의 강제 수업에 내몰리고, 성적과 대학 입시의 중압감 속에서 자살하는 일이 속출합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경쟁과 속도에서 뒤처질까 자신을 학대하고, 자녀들까지 그 경쟁과 속도전으로 몰아넣습니다. 조금 여유로운 이들은 자녀들을 학교와 학원에 맡기고 건강 산행과 나들이에 몰두합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쓸모없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신의 존재감을 억지로 드러내려고 이상한 단체에 동원되어 악을 쓰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계 경제 대국의 허울 뒤에 드리워진 그늘 밑에서 수많은 이가 생활고에 허덕이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청소년들은 여전히 감옥처럼 생긴 교실에 갇혀 있고, 그 장면은 세월호 객실로 이어져서 어른의 명령만 기다려야 하고, 어른들은 자녀들 교육비를 벌러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냄새나도록 밖을 돌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 지긋하게 눈길 한번 나누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고, 입말은 거두고 문자와 이모티콘에 우리 마음을 담으려 합니다. 생명 없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촉촉한 눈과 부드러운 귀를 대신해 버린 것일까요?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냄새 맡을 시간마저도 우리의 경쟁과 속도에 저당 잡히고 삽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이 한국 사회의 빌딩들, 산을 뻥뻥 뚫어놓은 터널들, 산과 들을 인정사정없이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들, 강마다 숨을 끊듯 펼쳐진 콘크리트 더미들. 한국 사회라는 황무지에 핀 망각의 꽃들은 콘크리트 더미이고, 뒷거래가 흉흉한 토목공사의 흔적입니다. 우리 삶에 담긴 아픔과 고통과 눈물을 모두 망각하도록 하고, 질척거리는 가녀린 기억의 꽃이라도 피울라치면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편리함과 안락함의 콘크리트 숲입니다.

합리성과 시스템을 강조하여 관련 안내서가 모두 갖춰졌다 하더라도, 이익과 경쟁과 속도라는 사회적 질병 안에서는 헛것이 되기는 삽시간입니다. 이익에 눈이 멀고, 경쟁이 만든 속도 때문에 깊이 응시하는 일은 찾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의 지난한 훈련으로 우리 기억의 세포들을 항상 깨우지 않으면 합리적인 시스템의 문화는 몸과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합니다. 오히려 겉치레 점검 목록으로 더 큰 화를 부를 뿐입니다.

신앙인은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고통과 슬픔, 상실과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매일 혹은 매 주일 성찬례를 통해서 이를 기억하고 고난의 산물인 몸과 피를 나눠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몸과 피가 되기로 작정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라야 더는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 없을 테니까요. 그 기억에서라야 질척이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성찬에서 기억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살지 않고서는 부활의 생명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위에, 세월호에 갇혀 잠긴 꽃 같은 생명들의 눈물 위에,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 주저앉아 절규하는 이들의 눈물 위에 있습니다. 이 눈물로 흉물스러운 경쟁과 속도를 쓸어내고 우리 몸과 정신과 기억을 다시 씻어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부활은 영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