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경청과 봉사 – 환대의 두 차원

Sunday, July 17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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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봉사 – 환대의 두 차원 (루가 10:38~42)

교회 언어에는 짝지은 말들이 많습니다. 복음과 율법, 믿음과 행위, 은총과 노력 등입니다. 다 좋은 말인데도 굳이 구분하여 반대말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앞엣것이 더 좋고, 뒤엣것은 덜 중요하다며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그 탓인지 오늘날 교회는 바른 행동과 예의가 턱없이 부족하고, 세상을 향한 책임 있는 행동에 소홀하다는 비난을 받곤 합니다. 교회에서 이런 말을 짝지은 까닭은 어느 한쪽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인 진실에 담긴 두 차원을 드러내어 그 둘의 조화와 균형을 늘 되새기려는 뜻입니다. 환대의 두 차원인 경청과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겸손한 마음(경청)과 인간을 향한 연민의 행동(봉사)이 만날 때 드러납니다.

오늘 읽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는 환대의 신앙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서 지쳐 걷는 세 나그네를 초대하여 극진히 대접합니다. 자기 자신이 고향을 떠나 떠돌며 사는 처지이기에, 지친 나그네의 모습이 더욱 측은합니다. 이 연민으로 새로운 사람을 제 식구처럼 품는 행동이 곧 신앙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만남이 외로운 부부에게 뜻밖의 축복을 선사합니다. 그 시절, ‘아들’의 축복은 그들의 존재를 하느님께서 인정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환대의 더 깊은 진실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 때문에 이야기를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나그네 예수님을 극진히 대접하던 마르타는 손님 곁에 앉아 듣기만 하는 마리아가 야속하여 불평합니다. 예수님은 시중드는 마르타가 아니라 마리아의 편만 들어주시는 것일까요? 섬김보다 배움이 더 훌륭하다는 뜻일까요? 그처럼 간단하다면, 지난주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루가는 오늘 본문 안에 더 깊은 뜻을 이중으로 겹쳐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한편, 더 깊은 환대의 차원을 펼쳐주십니다.

예수님 시절에는 남성만 앞에서 배우거나 가르치고 여성은 뒤에서 시중든다는 구별 관습이 강했습니다. 마르타는 관습에 충실하여 손님 시중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성이지만 선생님 앞에서 당당히 배우는 권리를 누립니다. 여성과 남성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배우고 대화하며 동등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정된 성 역할 분담 관습은 성차별이 되기 쉽습니다. 차별을 넘어서는 일은 ‘좋은 몫’을 선택한 신앙의 행동입니다.

환대가 축복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섬김과 배움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오롯한 마음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관한 옳은 주장과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이 자신에게 머물면 탈이 납니다. 우리 앞에선 하느님을 향하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를 타인과 비교하여 억울한 감정과 분노를 나오기 마련입니다. 종종 율법주의와 신앙의 독선이 이렇게 생겨납니다.

환대의 신앙은 마르타의 봉사와 마리아의 경청이 만나 완성됩니다. 환대는 새롭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며, 연약한 이를 보살피는 섬김의 행동입니다. 동시에, 환대는 한 사람의 삶 전체에 귀를 기울여서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전혀 다른 삶의 경험과 지식을 경청하여 그 안에 마음을 포개는 일입니다. 낯선 나그네 같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온전한 경청과 봉사가 만나는 환대의 신앙이 우리에게 축복을 선물합니다.

신앙인 – 낯선 자의 이웃

Sunday, July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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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 낯선 자의 이웃 (루가 10:25~37)

“그들을 다 불살라 버릴까요?” 몇 주 전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동네에서 냉대를 받자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노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거절당했다 해서, 자기 생각과 다르다 해서, 어느 집단을 멸절하는 일은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사람의 선입견과 종교적인 우월감은 편견과 단견으로 미끄러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은 진실의 큰 바다에 자신을 열어 놓고, 필요한 때에는 거리낌 없이 과감하게 행동합니다.

종교의 율법과 세상의 법률은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의 질서는 사람살이의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는 뜻으로 만든 보호장치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못된 몇몇 율법학자나, 세상 뉴스에 오르내리는 몇몇 탐욕스러운 법률가들과는 달리, 오늘 예수님께서 만난 ‘율법 교사’는 매우 정직합니다. ‘율법’의 근거에 충실하고, 사건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와 논리를 귀담아듣고, 바른 결론으로 응답합니다. 여기에 편견이나 억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심하게 다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데, 사제와 레위 사람은 본 척도 안 하고 피해갔지만, 더러운 이방인이라고 차별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을 끝까지 도왔습니다. 직책이 보여주듯이, 사제와 레위 사람은 종교와 관련된 일을 합니다. 종교는 법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명, 특히 ‘영원한 생명’의 일에 관여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의 영원한 생명’과 ‘현실의 사람 생명’을 서로 연결하지 않고 분리하여 취급합니다. 자기 소원을 성취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바쁜 발걸음은 쓰러져 아파하는 이웃을 살펴볼 눈길을 막아버리곤 합니다.

이때, 하느님은 누구나 당신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사람의 지위와 직책, 출신과 재산을 넘어섭니다. 뜻밖의 낯선 사람, 오히려 편견의 대상이었던 사람 안에서 펼쳐지기도 합니다.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 이름에서 이미 관습과 기득권이 물씬 풍기지만,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이름도 직책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종교와 교리, 사회와 통념으로 나누거나 판단할 수 없는 낯선 사람입니다.

오직 측은지심의 눈길과 손길만이 세상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이어줍니다. 완전히 실패한 인생의 탕자를 품는 아버지의 손길, 배고픈 이들을 측은하게 여기셨던 예수님의 눈길은 이름 없는 이들에게 배불리 먹고도 넘치는 잔치를 베풉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귀한 포도주로 쓰러진 사람의 통증을 완화하고 소독한 뒤, 비싼 기름을 발라 상처의 감염을 막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온전히 회복하려고 돈 드는 사후조처까지 마련합니다. 이 모든 자비의 행동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손길을 타고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으로 겹칩니다. 측은지심의 시선과 행동이 하느님의 구원 행동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이 구원 행동을 몸소 펼치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곳곳에서 쓰러진 이들을 깊은 연민으로 보살피는 낯설고 약한 이들의 이웃입니다.

예수의 정체 –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

Sunday, April 17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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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체 –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 (요한 10:22~30)1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오?” 이 퉁명한 질문에는 낯설고 새로운 사람 예수님을 배척하는 적대의 감정이 물씬 묻어납니다. 오늘 장면에 이르도록 예수님은 앞에서 몇 번이고 “나는 ~ 이다”는 특유의 어법으로 당신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나는 ~ 이다”는 어법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자주 쓰시던 형식이니, 유대인들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습니다. 그의 정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거듭 말했는데도 “분명히 말해 달라”고 다시 요구합니다. 자신들의 기준과 판단에 들지 않으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각오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낯선 이를 향한 배척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적대감은 사람의 ‘마음을 조입니다’(24절). 멀쩡한 눈과 귀를 막아서 스스로 듣지도 믿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러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리 없습니다. 신앙이 깊어지기는커녕, 신앙에서 떨어져 스스로 만든 편견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맙니다. 더 심해지면, 좁고 완고한 자기주장을 신앙이라 우기기 시작합니다. 특이하고 강렬한 종교 체험, 교리에 관한 근거 없는 맹신, 질문과 대화가 없는 믿음, 자신의 성취를 축복이라고 여기는 일로 빠져듭니다. 이러한 감옥에 갇히지 말라고, 예수님은 신앙의 식별 기준을 다시 세우시고, 신앙생활의 진수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신앙 식별 기준은 ‘받아들여 아는 것’과 ‘받아들여져 속하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이든, 낯선 가르침이든 그 불편한 도전을 받아들여 배우는 일에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서로 인정하여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속하는 관계가 신앙입니다. ‘목소리’를 알아듣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이르려면, 수많은 만남과 접촉, 갈등과 화해, 배움과 대화가 필요합니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체험과 주장을 조율하며 사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조율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그러니 배움과 사귐의 공동체가 신앙의 식별 기준입니다. 이 관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라는 사랑의 일치 선언으로 가름하십니다. 서로 다른데도 그 안에서 함께 일치하려는 신앙 공동체야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정체이며, 하느님과 일치를 체험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신앙인은 이 부활의 공간에 ‘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의 진수는 이 공동체 속한 사람들의 삶과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새롭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고, 대화하고 배우며, 사귀어 서로 목소리를 알아듣는 신뢰의 삶입니다. 이 배움과 실천의 공동체가 서로 신뢰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상태, 이것이 바로 영원히 사는 부활의 몸입니다. 부활의 생명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로 태어난 생명은 누구도 빼앗아 가거나 부술 수 없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간절함이 만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낯선 이를 향한 사랑이 넘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17일 부활 4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