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믿음 – 겨자씨 한 알의 인내와 생명

Sunday, October 2n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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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겨자씨 한 알의 인내와 생명 (루가 17:5~10)

“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는 무너졌으며, 못된 자들이 착한 사람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하바 1:4). 하바꾹 예언자의 탄식이 오늘도 세계 곳곳 멀고 가까운 여러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계속 터져 나옵니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지키며 하느님께서 약속한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뿌린 땀과 눈물과 피가 세월 속에 흥건한데도, 세상은 좀체 바뀔 줄 모르는 것 같아 야속합니다.

고통과 슬픔에 지쳐 절망하는 목소리도 커갑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이 헛된 짓을 한다는 비아냥도 들리는 듯합니다. 눈에 띄지 않고 적당히 살자는 처세술이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기도 합니다. 이때 신앙이 흔들립니다. 예언자의 절규에 하느님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응답하십니다. “끝날은 기어이 온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의로움은 신실함에 있다”(하바 2:4).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말며, 하느님의 가치에 충실할 때 우리는 정의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신뢰와 투신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해달라’는 사도들은 눈에 띄는 효과와 성과를 당장 달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크기로 재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믿음의 핵심은 작은 바람에 흩날리도록 미약하고, 마음 먹고 부릅뜨지 않으면 금세 지나칠 수도 있는 ‘겨자씨 한 알’에 있습니다. 미약한 채로도 견뎌내는 힘입니다. 그 안에 숨 쉬는 생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의지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우리 삶의 최고 판단 기준으로 삼고, 세상의 작은 것들이라도 쉽게 무시하지 말고, 새롭게 발견하고 눈길을 주며 보살피라는 당부입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예수님의 당부는 믿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잘해드려서 그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거래가 아닙니다. 작은 인간은 크신 하느님께 그 무엇으로도 잘해 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고뇌와 고통을 없애려는 진통제도 아닙니다. 그 호소가 믿음이라면 세상의 고통은 이미 없어졌어야 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지켜보시며 함께하신다는 신뢰 속에서 싹 틉니다. 동료 신앙인과 더불어 이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가치를 지켜나간다는 확신으로 협력할 때 자라납니다.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서로 지탱해 주며 풍파에 꺾인 상처를 위로하고 격려는 헌신으로 튼튼해집니다. 이 줄기에 수많은 신앙인의 땀과 눈물과 피가 스며들어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고, 많은 이를 먹이며 생명을 키웁니다. 이 일이 믿음의 교회가 할 일이며, 신앙의 종이 따라야 할 의무입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믿음의 행동에 부름받은 종입니다. 하느님의 종인 우리는 군말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입니다.

“하느님, 부족한 종들에게 믿음을 깊이 심으시어,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회개하며 배우는 죄인의 기쁨

Saturday, September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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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며 배우는 죄인의 기쁨 (루가 15:1~10)

그리스도교 신앙이 위대한 까닭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을 늘 의식하며 인정하도록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자람과 한계를 늘 인정하는 일은 신앙의 출발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지혜와 판단이 언제든지 부족할 수 있으며, 자신의 선함이 늘 모자란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기는 일이 신앙인의 품격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 위대한 까닭은 하느님께서 부족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이에 감사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더는 돌아보지 않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인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 안에서 하느님의 인정을 삶의 큰 격려로 삼습니다. 유혹에 더 빠지지 않으려 몸과 정신을 또렷하게 하고, 미혹하는 정보에 눈과 귀를 내주지 않습니다. 오류를 교정하는 새로운 지식과 늘 대화하며 배우려 합니다.

손가락질받던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모여들자, 스스로 ‘의인들’이라고 생각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못마땅해” 합니다. 여기서 상식이 뒤바뀝니다. ‘죄인들’은 경청하며 배우려 하고, ‘의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죄인들’은 예수님께 혼나기도 하고 따가운 지적을 받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스스로 ‘의인들’이라 여기는 이들은 ‘예수’라는 낯선 청년의 새로운 일과 지식과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관습 안에서 젠체하며 판단만 하려 듭니다. 자신이 만든 신념이라는 우상에 붙들려 고집을 피우다가 하느님의 진노를 삽니다(출애 32:8~9).

15년 전 9.11 테러 사건으로 미국에서 무고한 사람들 3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 일어난 전쟁으로 잃은 군인과 시민의 목숨은 그보다 수십 배에 달합니다. 이 무자비한 사건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잘못된 신념을 다시 돌아보고 고치지 않은 탓입니다. 그 결과 더 많은 고통과 상실, 보복과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의 기쁨이 사라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일을 더는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는 기존에 품었던 생각과 신념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오랜 경험과 고정관념이 혹시라도 자기 눈을 가리는 고집이 되는 현실에서 자신을 돌이켜 새로운 세계와 바른 가르침에 참여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새로운 가르침이 하나라도 아쉬워 간절하고 그 배움에서 변화와 기쁨을 경험합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찾은 예수님의 기쁨이 이제 회개하는 사람 자신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누리는 기쁨이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회개하며 배우고 고치는 죄인의 기쁨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회개하여 기뻐하는 죄인들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의인’이라 인정받은 은총 안에서 살아갑니다.

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Sunday, September 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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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