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대림 –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라

Sunday, November 29th, 2015

대림 –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라 (루가 21:25~36)1

새해를 맞았습니다. 한 해가 한 달이나 남았는데, 새해라니요? 그리스도교회는 아기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교회는 의도적으로 세상의 시간을 비껴서 거룩한 시간을 새로 마련했습니다. 세상 달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주기와 계절의 변화를 따르고, 그 새해의 기준점도 편의대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거룩한 시간인 교회력은 기준점과 뜻이 분명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대림절이 새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신 사건이 시간의 기준점입니다. 세상이 정한 기대와 시간을 비껴서서, 예수님의 삶에 우리 희망과 시간을 포개어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대림절의 말뜻은 ‘오심’입니다. 신앙의 새해인 대림절에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새로운 일이 벌어지리라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처지에서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오셔서 뒤틀리고 부서진 우리 삶을 회복하시리라 희망합니다. 그 희망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오심(성육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이 되셔서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사시며 치유를 펼치시고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쉽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삶을 우리 삶에 포개어 살 때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삶과 새로운 생명이 펼쳐집니다. 이 삶이 세상 곳곳에 끝까지 펼쳐질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 믿습니다. 두 번째 오심(재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우리 현실은 왜 이렇게 암담할까요? 고통스럽고 힘들면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할 텐데, 왜 세상은 더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살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텐데, 왜 우리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주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일을 보고 사는 탓입니다. 절망의 현실에서는 당장 자신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는 일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럴수록 중독과 우울의 그림자가 더 짙어집니다. 장래와 노후에 관한 염려와 계획에 사로잡히면 마음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만 두고 가족만 보살피기에도 벅찬 인생이 됩니다. 그럴수록 걱정과 불안이 떠나지 않고 팍팍한 삶이 계속됩니다. 이때, 우리 마음과 생활 안에 오시는 하느님은 거절당하고, 우리 인생은 ‘덫’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성서가 경고하는 ‘멸망의 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 오심’의 세 번째 차원인 생명의 길을 누리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앞길은 사람의 염려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열립니다. 하느님의 길을 걷는 사람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 하느님 사랑을 마음과 몸으로 널리 나누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이 행동으로 우리 믿음은 굳건해집니다. 이 때 우리는 절망과 고통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하느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고통스럽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려울 수록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고 다른 이에게 손을 펼치는 신앙인이 우리 가족과 교회와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낳습니다. 어둠 덮은 세상의 시간을 넘어서는 대림절은 이 희망찬 신앙과 삶의 새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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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1월 29일 대림 1주일 주보 []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Sunday, September 6th, 2015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마르 7:24~37)1

예수님은 가끔 기이한 언행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멋대로 예수님을 기대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을 옥죄고 억압하는 위선자를 향해서 뿜어내신 분노와 독설은 우리로서도 통쾌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더욱 세심하고 근본적인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와 지역, 성차별이 우리 무의식에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밝히시고, 이를 발본색원하는 길을 예수님 몸소 보여주십니다.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여인 이야기에는 대결과 차별 구도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이고 그 여인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지역 차이와 성 차이가 함께 만나면 차별이 곱절로 고약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의 편견을 그대로 시연하시며, ‘이방인 여자’를 강아지에 비유하여 모욕합니다. 이때 여인은 그 모욕을 받아들이면서도 ‘용기를 내어 두려워하지 않고’(이사 35:4)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모든 생명은 그 처지와 신분이 어떻든 여전히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의 ‘옳은 항의’를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고정관념을 바꾸십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는데 우리가 거절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 마귀가 떠나갑니다.

청각장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행동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습니다”(33~34절). 예수님 당시 장애인이 살던 환경과 처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나빴습니다. 예수님은 위생과 정결의 율법을 넘어서서 징그러울 만큼 친밀하게 자신을 장애인과 맞대십니다. 예수님의 ‘한숨’은 마음 아픈 현실을 향한 한숨이며, 생명을 주는 하늘의 숨결입니다. 그 숨과 함께 ‘귀먹은 반벙어리’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소문은 세상에 더 퍼져나갔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그렇습니다.

‘에파타’ 하며 열리는 경험이 예수님의 치유이며,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귀를 열어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고정관념을 고쳐 세상의 고통과 이웃의 아픔을 경청합니다. 입을 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눈을 열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민의 새로운 눈으로 더욱 깊이 응시합니다. 닫힌 신앙을 깨고 귀와 입과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치유되어 서로 열고 살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예수 신앙은 무의식에 깃든 고정관념과 차별이 만든 악령의 질서를 넘어섭니다. 이렇게 예수 영성은 삶의 질곡에 갇힌 사람을 열어주고 살리며 함께 품으며 넉넉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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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6일 연중23주일 주보 []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Sunday, July 5th, 2015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마르 6:1~13)1

얕은 지식이 더 깊은 배움을 가로막고는 합니다. 좁은 신앙체험이 더욱 너그럽고 풍요로운 신앙을 종종 방해합니다. 개인의 ‘고집 센’ 믿음이 공동체의 지혜롭고 넉넉한 삶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기 성숙과 공동체 성장에 큰 걸림돌인 태도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과 복음 이야기는 ‘고집’을 털고 경청하며 자기 체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로지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과 도전에 마음과 귀와 눈을 열라는 요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불러 아집으로 귀를 막은 이들 속으로 보내십니다. 하느님의 ‘새 기운’은 예언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숨결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강력한 바람입니다. 변화는 자기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자신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인 성령에 기댈 때라야 겨우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똑똑하고 체험 깊은 사도 바울로의 이상한 고백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운명이요, 중요한 교리일 수 있는 문제에 관하여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게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자랑하고, 자신의 깊은 지식과 강렬한 체험이 행여 ‘교만’으로 이어질까 봐 스스로 삼갑니다. 오히려 사람들 보기에 ‘저주’로 보일 법한 자신의 고질병을 내세워, 이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역설과 신비가 펼쳐집니다. 약하고 모자란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강합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이 역설의 절정입니다. 오래 알고 가까운 경험이 오히려 눈을 가립니다. 예수님의 진가를 못 보게 하고 귀를 닫게 하고 마음마저 완고하게 합니다. 그 결과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알량한 지식과 체험과 전통이 본의 아니게 치유와 구원의 훼방꾼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이 사태를 바로 식별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의 행색과 활동이 큰 대비를 이룹니다. 어떤 기득권도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에 기대어 악령을 내쫓는 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선교를 위해서라면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분명한 선교 이념과 자긍심이 있으면, 더 좋은 대접 받으려 이집 저집 기웃거릴 일이 없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경고는 냉혹합니다.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낯두껍고 고집 센 마음’을 털어내고, 새로운 배움에 귀를 열고 낯선 이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치유와 구원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더 깊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공간이 되어 생명의 치유와 구원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경청하는 공동체가 치유의 기적을 만듭니다. 새로운 일로 대화하며 도전하는 공동체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이룹니다. 환대와 치유가 구원의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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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Vivian Maier, 1926~2009)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5일 연중14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