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영성' Category

복락 – 눈물의 대화

Friday, May 31st, 2013

깊은 우정의 대화 속에서 감정과 에너지를 완전히 쏟아내고, 다시 새로운 사랑과 격려의 에너지를 얻은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 다닌 길처럼 돌고도는 인생. 고마운 친구요, 선생님이요, 신부님을 가진 복락을 누렸다. 그 복락의 한 조각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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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Visions of the Daughters of Albion” circa 1795)

신부님을 5개월 만에 다시 뵈었다. 신부님께서 홍콩에 계시는 동안 이메일 몇 통만 간단히 나누고 말았다. 뵙고 싶었다. 여전하셨다. 그분의 건강한 모습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환대하며 염려하고 경청하시는 모습이 여전하셨다. 어느 처지에서든 당신 자신을 열어 놓고 여전히 배우시는 분임을 다시 확인했다. 삶에서 얻은 그 배움을 신부님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유쾌하다.

유쾌한 대화 후에 속을 찢어 토로하는 시간을 나누었다.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내 모습이었다. 딴에 권력이랍시고 가진 것을 의식, 무의식으로 휘두르는 이들을 향한 혐오감, 그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이용당하느니 아예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성급한 생각, 가치 없는 동네에 나 자신과 고민의 산물을 나눌 필요도 없겠다는 건방진 태도, 나도 어느 권력이나 특권을 얻으면 온갖 변명을 들이대며 적절히 즐기고 남을 짓누르게 될까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기대했던 이들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던 길동무의 모델을 접어야 했을 때의 허탈함 등이 지난 몇 년의 내 허송 세월, 그에 따른 가족의 희생과 겹치며 눈물을 타고 흘렀다.

이것들은 지난 몇 년의 경험이었거니와 그 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얻는 내 식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별 자체로 일이 풀리지는 않는다. 분노는 분노대로 쌓일 뿐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나누고 경청하며 도전하고 도전받는 길동무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남남이 되고 만다. 저마다 얻은 식별이 즐거운 내용이든 어둔 내용이든 그 식별 자체의 진가에 마음을 두어 깊이 서로 기도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자 친구, 그리고 말 그대로 아버지가 되어주신 신부님(Father)께 늘 감사하다. 대화 중에 신부님은 연신 함께 눈을 적시며, 아픈 속내를 나눠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돌아서서 떠나는 나를 다시 불러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오는 10월쯤에 신부님과 함께 운전하여 콜로라도에 다녀오는 계획이 성사되었으면 좋겠다.

***

“이렇게 에너지를 다 쓰고 그를 만나러 갈 수 있겠어요?”

온갖 감정을 다 쏟아낸 터라 신부님의 염려가 컸다.

“예, 에너지를 쏟은 만큼, 새 기운을 얻었으니까요.”

다시 한 시간을 달려, 이제는 어머니 같은 친구 신부님을 만났다. 내 안의 분노를 다스리고, 내 안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잘 보호하는 방법을 나눠줄 테니, 어서 건너오라던 신부님이었다. 개와 고양이가 여러 마리인데다, 곧 이사를 준비하는 터라 집안이 어지러웠다. 이것저것을 밀쳐 치우고 너른 공간을 마련하여 서로 마주 앉아 차를 나누었다.

“무슨 차 마실래요?”

“난 커피가 좋은데요” “우리 집엔 커피 없어요.”

“흠… 음, 여기 detox 라 이름 붙은 허브 차가 있네요? 이걸로 하죠. 오늘 만남이랑 딱 어울리는데요?”

이미 한 시간 전에 어떤 묵은 감정을 토로했던 탓일까? 신부님과 나누는 몇몇 방법은 간단하고 손쉬웠다. 내부에서 어떤 격정이나 반항이 없었다. 그러나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충분하게 연습했다.

다시금 깨닫거니와 자신을 잘 보살피려면 내 안의 분노를 적절하게 내보내야 한다. 치미는 분노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다만 그것을 바로바로 내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분노를 쌓아놓으면, 작은 일을 타고 묵었던 분노가, 그 일과 상관없는 과거의 분노까지 한꺼번에 치고 올라와 일을 망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망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잘 돌봐줘야 한다. 예전에 여러 친구 신부님과 나누던 생각이 났다. 나도 늘 친구 신부님들께 간절하게 부탁했다. “신부님, 자기 자신을 잘 대해 주세요. 분노가 신부님을 삼키지 않도록 하세요.” 이 말은 내게도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적절하고 유용한 자기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세상은 상처 입을 일로 가득하다. 어떤 선한 만남도 그렇다. 그렇다면 신발을 신고 길에 나가듯, 내 마음에 보호막 하나, 외투 하나를 걸치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를 보호해야 한다.

막바지에 신부님과 사목 이야기도 나눴다. 5~6년 정도 후에 은퇴하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아마도 지금 맡은 공동체는 자신의 은퇴와 더불어 생을 마감하리라 내다봤다. 슬프고 아픈 일이 되리고 담담히 말했다. 내 지난 4월이 생각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예, 나는 이미 겪었잖아요. 그런데 그거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말 그대로 어머니 같은 신부님(Mother)과 넉넉한 작별의 포옹을 하고,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 돌아왔다. 남쪽으로 향하는 1번 국도 옆에 펼쳐진 바다가 상쾌했다.

피정의 한 패러다임 – 성모방문 축일

Thursday, May 30th, 2013

영국에 머무시는 성공회 프란시스 수도회의 스테파노 수사님이 다시 연락하셨다.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옛 이름: 성모왕문 축일)을 맞이하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을 급히 번역했으니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기쁘게 받았다. 아침 시간을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을 글을 따라 읽으며 고쳤다. 이글은 피정은 굳이 성모왕문 축일을 위해 쓴 것은 아니며, 피정의 의미와 실천을 위해 루가가 전하는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이야기를 그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것이다. 기꺼이 나눠주시고 대화와 교정의 기회를 주신 스테파노 수사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한편, 몇 해 전 성모왕문 축일에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침 미사에서 나눈 강론이 생각났다. 다시 읽어보니 겹치는 고민과 발견이 많았음을 알겠다. “영혼의 친구: 마리아와 엘리사벳”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 : 피정의 패러다임

보니 써스턴 Bonnie Thurston

몇 년 동안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인근에 있는 거룩한 섭리수녀회의 컨즈(Kearns) 영성 센터의 도움을 받고 협력하면서 많은 축복을 받았다. 영성 센터에 있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현대식 컨즈 채플은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놀라운 만남을 묘사하는 예술작품들로 장식돼 있다.

채플 입구에는 전통 의상에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뻐서 서로 맞이하러 달려가는 두 명의 아프리카 여인을 그린 미키 수사님(Br. Mickey McGrath, OSFS)의 훌륭한 ‘Windsock Visitation’이 걸려 있다. 채플에 들어서면 무릎을 꿇은 두 명의 여인 청동상이 있다. 엘리사벳은 머리를 숙였는데, 임신한 배가 볼록하게 불러있다. 마리아는 그 배에 손을 얹고서 생명의 움직임을 느낀다. 마리아는 경이로움에 차서 위를 올려다 본다. 채플 오른쪽 벽에는 타원형을 이루며 두 팔로 껴안고 있는 두 여인을 그린 그림이 보인다. 실물 크기이다. 세 번째 원은 엘리사벳의 배이다. 그 구형은 엘리사벳의 옷단을 이루는 불꽃에서 일어나는 조각들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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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세속적인 형태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 예술품 앞에서 기도할 때, 이 성모 방문 광경을 표현한 예술 작품은 피정을 위한 한 패러다임, 또는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의 노래(루가 1:46-56)가 들어 있는 루가 복음서의 성모 방문 이야기(루가1:39-45)는 피정의 이유와 본질에 대해 깨닫게 한다. 피정 방식의 한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래에 말하는 내용은 피정의 한 형태에 관한 스케치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나 세세한 내용을 제공하지 않고, 스케치하듯 개괄할 것이다. 여러분 자신들의 기대와 상황, 그리고 경험으로 “그 공백을 채우기” 바란다.

상담의 필요성

루가의 성모 방문 야이기(1:39-45)는 복되신 동정녀가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 때문에 많이 놀란 수태고지 이야기(1:26-38) 바로 다음에 나온다. 생명은 우리에게 많은 놀라움을 준다. 때로 최상의 전략은 지혜롭고 믿을 수 있는 어른과 상의하는 일이다. 루가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자신도 놀라운 일들을 겪고 있는 사촌 엘리사벳(그의 특별한 임신 이야기는 1:5-24에 나온다)에게 찾아간다. 이야기가 오가면서 두 여인은 확신과 위로를 받는다.

피정에서 영적으로 연배가 더 높고 더 지혜로운 사람이 피정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는 완전히 상호 의존적이다. 지도자와 지도를 받은 사람 모두가 그들의 만남을 통해 은총을 받는다. 마가렛 파즈단(Margaret Pazdan) 수녀님은 이렇게 썼다. “두 여인은 경청하는 귀와 집중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힘을 준다. 친척인 두 여인은 그들이 전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했는지 서로 나눈다.”

여정과 기대

피정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란 동네에 살았다. 엘리사벳은 유다 지방 예루살렘에 가까운 뜨겁고 건조한 산골 마을에 살았다. 이 여행은 갓 임신한 여인에게는 멀고 힘든 남쪽 지방을 향한 것이었다(우연이었을까? 예수는 후에 제자들과 함께 이 길을 지난다). 마리아는 걸어갔을까? 혼자 가지는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갔을까? 그는 어떤 위험과 두려움을 겪었을까? 적어도 마리아가 “서둘러 급히 떠났다”(1:39)는 사실은 분명하다. “모든 여정은 첫걸음으로 시작한다”는 속담은 옳다. 마리아처럼 그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피정 여정을 준비하는 이들은 그 기대감을 통해서 힘을 얻는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알았고, 곧 있을 그들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도우러 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1장 26절의 “여섯 달”은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1:36)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석 달 쯤”, 어쩌면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이 차고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머물렀는지 모른다. 이 경우, 마리아는 1장 57-59절에서 말하는 사건들 현장에 있었으리라. 우리 역시 기대를 하고 피정에 들어간다. 우리는 복되신 주님의 어머니 혹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거나 방문해 주길 바란다. 새로운 삶을 구하며 중요하고 생명을 주는 어떤 것이 우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주기를 기대하며 피정에 들어간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일을 돕기 위해 피정에 온다.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피정자 각자는 ‘협조자’이다. 각자는 자신의 기도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찾아 피정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책임을 져야한다. 피정에서 우리는 서로를 돕는다.

기다림과 알아봄

피정 여정을 떠날 때,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피정의 집(혹은 교회)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육체적 편의를 준비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피정 인도자나 강사는 우리를 위해 공부하고 기도했다. 우리를 알지도 못하고, 오든 안 오든 개의치 않는 일반 호텔에 예약한 휴가와는 전혀 다르다. 피정에서는 누군가가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루가는 갈릴래아에 사는 마리아가 유다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1:36)을 알았다고 분명히 한다. 엘리사벳도 어떻게든 마리아의 방문을 알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즈가리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받았을 때, 그의 뱃속에 든 아이가 뛰놀았다(1:40-41). 엘리사벳과 배 속의 아이(세례자 요한)는 마리아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알아봄은 피상적(‘아, 사촌 왔구나’)이지 않다. 더욱 깊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1:42-43)로서 “복되신” 마리아를 알아보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보았다.

피정에 가면, 이를 준비하는 분들은 우리를 만난 적이 없어도 우리를 기다리고 인사를 건넨다. 피정을 인도하는 분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우리를 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에 관한 더 심오한 지식을 얻으려 하고, 우리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복된 사람”이다. 누군가 우리를 기다려 주고, 누군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기다림과 준비의 손님이 된다는 복된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꺼이 우리 자신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으로 그 복된 선물을 나눈다.

정체성 질문

피정 진행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만, 그동안 우리는 때로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 위기’를 겪거나, 난생처음으로 우리의 참 자아를 찾느라 분투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에서 “내 완전한 정체성의 비밀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피정은 알려지지 않은 우리 자신, 숨은 자아를 만나게 한다.

수태고지 이야기에서 루가는 마리아의 ‘정체성 위기’를 미묘하게 묘사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요구받은 일(1:29)때문에 당황했다. 가브리엘은 더 많은 정보를 주면서 마리아의 지도자 역할을 하지, 그 행동 여부는 전적으로 마리아의 결정에 맡긴다(1:30-37). 엘리사벳의 경우, 천사는 임신 사실을 그의 남편에게 알렸다. 이때 엘리사벳은 “나를 찾아 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일종의 정체성 위기를 말한다. 한 사람이 처한 삶의 상황들은 우리들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두 여인은 머튼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 우리의 참 정체성을 창조하는(이탤릭체 머튼 강조) 하느님의 일에 함께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피정은 이러한 창조와 재창조의 시공간이어야 한다.

상호 의존성

우리는 종종 결핍감과 고갈된 감정 때문에 피정을 한다. 고갈과 비어있음(emptiness)은 때로 하느님을 위한 선물이다. 이미 채워져 있으면 받을 수 없다. 하느님은 마리아의 순결한 비어있음을 이용했고 채우셨다. 엘리사벳의 불임성이 열매가 되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갈과 비어있음을 이용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신성한 지혜와 에너지로 그 안을 채운다. 이것이 바로 성모방문에서 마리아가 부른 마리아 찬가의 핵심이다. 하느님은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고, “배고픈 사람(비어있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해주셨다(1:48-49). 피정의 목표는 하느님의 주심과 우리의 받음이다. 우리의 비어있음과 결핍과 혼란을 들어 올려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은총의 선물을 받도록 “준비하는 길”이다.

그래서 그 거래에는 상호성이 있다. 거대한 신비 속에 든 진리는 이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시고 그 신성한 자아를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 은총의 선물을 받고자 열려 있는 태도가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때로 그 선물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1:41,44). 엘리사벳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전한 이야기를 확신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물을 주는 사람이자 받는 사람이었고 서로 자아의 선물이었다. 때로 우리가 그 은총의 선물을 가져온다. 때로 우리 자신이 그 은총의 선물 자체이다.

통찰과 응답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통찰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피정을 한다. 때로 우리는 어떤 응답을 바라면서 피정을 한다. 늘 그렇지는 않더라도 가끔 그 응답을 받기도 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정체성과 본성을 보는 통찰(1:42-43)과 그의 뱃속 아이의 응답(1:44)을 통해 뱃속 아기가 지닌 특별한 속성을 보는 통찰을 얻었다.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전한 메시지는 마리아에 대한 사촌의 반응으로 확실해졌다. 두 여인은 그들이 받은 통찰에 강하게 반응했다.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외쳤다.” 마리아는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1:46-55). 마리아를 비춘 조명에 대한 마리아 자신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성서과 조상의 신앙에 뿌리를 둔 찬가였다. 이 찬가는 사무엘 탄생에 대한 한나의 노래(1사무 2:1-10)와 시편들과 이사야서를 메아리쳤다. 마리아의 “새로운 통찰”은 믿음 깊은 여인 한나의 경험과 마리아가 물려받은 신앙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회향 – 다시 집으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서 석 달가량 함께 지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56). 그 누구도, 심지어 복되신 어머니일지라도 영원히 피정을 하며 머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리아는 자신이 알 필요가 있는 내용을 배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엘리사벳을 도와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자아의 선물을 받고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랫동안 엘리사벳과 함께 머물렀다. 그런 뒤에 마리아는 길고도 더운 길을 산만해진 배를 안고(그동안 3개월이나 배가 더 불렀다) 거슬러 다시 나자렛에 있는 집, 그리고 요셉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뒤에서 수군거리기를 좋아하는 그 동네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또 다른 위대한 피정 패러다임은 “예수의 변모”(마르 9:2-13; 루가 9:28-35) 사건이다. 제자들은 ‘피정 중인’ 산 위에 머물고 싶었다. 베드로는 ‘초막들’을 세우고 그 경험을 제도화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산 위의 경험들’, 즉 우리의 가장 좋은 피정에서 얻은 경험은 평지의 일상생활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 돌려줘야 한다. 아마 시나이 산에서 모세(출애 34:29-34)나 변모한 예수(루가 9:29)처럼 우리는 우리 얼굴을 빛나게 해야 하고 우리 삶을 빛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조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피정에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큰 환호와 음악 밴드가 우리를 맞아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잡초가 멋대로 자란 정원과 텅 빈 냉장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와 밀린 일들이 우리를 환영한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피정이 필요했던 이유와 피정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 피정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피정의 성공은 피정 중에 느끼거나 경험한 놀라운 체험, 혹은 그분의 얼굴에서 나온 빛이 우리에게서도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피정의 성공 여부는 피정이 끝난 직후 며칠이 아니라, 6개월 아니, 6년 후에도 걸림이 없는 아량과 사랑의 삶을 사는지에 달려있다.

복되신 마리아는 제때에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동네를 떠나 유다 지방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2:4) 엘리사벳을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56).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로, 그리고 작은 동네의 삶으로 돌아왔다. 마리아를 향한 요셉의 사랑만큼, 마리아는 요셉에게 신실했다. 그래서 요셉을 따라 불편한 환경에서 출산해야 하는 유대 지방으로 여행했고, 아들의 할례를 보았고, 아들에 관한 괴로운 예언도 들었다(루가 2:1-40). 나자렛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 세 사람은 이집트로 탈출하여 이방인으로 살았다(마태 2:13-15,22-23). 결혼 생활 동안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2:42) 예루살렘으로 가곤 했는데 모든 부모의 악몽인 아이의 실종(2:41-50)을 경험했다. 이 모든 소란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다(2:19,51).

피정에서 우리는 비어있음이 은총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피정 중에 얻은 통찰을 충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통찰은 우리를 훈련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곳(늙은 여인과 처녀의 임신, 배우자의 기이한 행동, 자녀의 반항 등)에서 새 생명의 움직임을 발견하도록 한다. 그리고 참 자아를 살고 삶의 환경들에 무분별하게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뒤집어 “소중히 간직하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피정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뤄지리라는 믿음으로 복된 사람으로, 즉 변화된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지 않고 ‘이상한 방식으로’ 어설픈 약장수가 되어 돌아와서는 곤란하다.

(초벌 번역: 최스테파노 수사, 수정: 주낙현 신부)

종교 간 대화 – 환대의 한 실험

Sunday, May 12th, 2013

한국 성공회 안에서 대안 교회를 꿈꾸는 “길 찾는 교회”가 불교의 젊은 학승 혜준 스님을 초대하여, 종교간 ‘잡담’을 나누려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반가운 소식이다. 실은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이 ‘열린 포럼’이라는 이름 아래 이곳 이민 사회에서 가장 먼저 추진하려던 일이 바로 이런 ‘종교 간 대화’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로 그 일이 이뤄지지 못했다. 넓게 말한다면, ‘직업적 종교인’의 눈치 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참에 듣는 이 ‘잡담회’ 소식이 너무도 반가웠고, 바다 건너에서 기쁘게 응원한다.

꼬리 문 생각에 이어 또 다른 독특한 실험이 있어 잡감을 적어둔다.

종교 간 대화 (interfaith dialogue)는 기대와 의혹의 눈초리를 동시에 받는 매우 매혹적인 주제이다. 그동안 종교간 대화는 어떤 양상이었나? 그 양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은 없는가?

학자들은 인간이 지닌 종교의 보편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비교 대상이 된 종교들의 공통점과 상호 이해를 추구했거니와, 이들은 종종 신학이나 교리에 집중한 면이 많았다. 어떤 이들은 종교 경험에 좀 더 눈길을 돌려 그 실존적인 경험이 서로 겹치는 부분을 강조하며 종교간 대화의 길을 확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학자들의 몫이었다.

종교간 대화나, 상호 종교 연구가 학자들의 몫이 되는 동안, 그 논리나 담론, 연구 등은 현실의 종교와 현실의 종교인에게는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현실의 종교 생활에서는 전혀 다른 두 길이 엇갈렸다. 즉 전통적으로 자기 종교가 우월하다는 입장에서 타종교인들을 그저 무시하기 일쑤인가 하면, 바로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다종교 상황에서 타종교인을 서로 가족으로, 친구로, 동료로 만나서 살아야 한다.

생활 현장에서 종교 간 대화가 잘 이뤄진 경험이 없지는 않았다.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종교는, 특정 교단의 이름이 아니라, 종교 전체의 이름으로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며 싸웠다. 이들은 거리에서 손을 잡았고, 함께 피를 흘렸고, 함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공동선을 향한 공동의 협력이 종교간 대화의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게다가 그 삶의 실존적인 만남은 타종교에 깊은 이해와 더불어 존중심을 갖게 했다.

학자들의 연구와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 공동선을 향한 노력에서 종교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보통 사람들’은 종교의 다양성에 대해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다. 종교의 다양성은 자명한 현실인데도.

음반사의 기획으로 나온 듯한, 의례 음악 실험에서 새로운 경험을 듣는다. 서방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나온 의례 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와 동양 불교의 의례 음악인 범패가 만나서, 새로운 양상의 종교 간 대화를 들려준다. 이는 분명 실험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그리스도교의 성당인 것이 분명하다. 이 공간은 타종교인을 환대하는 현실 세계의 공간이다.

이는 책이나 거리가 만드는 공간과 사뭇 다르다. 신앙의 반복과 재현, 핵심이 집약된 공간이 마련한 환대는 낯선 음악을 초대하며, 그 음악의 발언에 조심스럽게 응답하는 모양으로 전개된다. 낯설어 어긋날 것만 같은 종교 의례 음악은 서로 존중하며 어우러진다. 서로 받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와중에 우리는 귀를 열고 그 소리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길 일이다.

종교와 신앙생활은 언제나 이런 내맡김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종교 간 대화가 학자들의 것이든지, 현장 활동가들의 것이든지, 아니면 보통 신앙인의 것이든지, 이처럼 새로운 공간에서 이루는 상호 환대와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열고, 마음을 내어 맡기는 체혐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잡담회’라 하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