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Sunday, April 3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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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 낯선 도전과 배움의 신앙 (루가 24:13-35)

그들은 힘없는 마음을 돌이키기로 했습니다. 모여서 이야기해도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해결책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벽은 단단하고 움찔하지 않으니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희망을 걸었던 일들이 무너지자 세상이 싫고 사람도 싫고 자기 처지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습니다. 두 제자는 꿈에 부풀어 올랐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이제 낙향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곳을 헤매듯이 걸었습니다.

인생을 헤매는 미로에서 새로운 만남이 일어납니다. 길에 동행한 어느 낯선 이와 함께 걸으며 과거의 희망과 현재의 절망을 나눕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같이 읽다가 서로 위로 삼아 ‘함께 묵자’고 초대합니다. 같이 빵을 떼고, 잔을 마시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인생에 즐비한 슬픔과 절망의 미로를 헤매는 시간은 우리와 동행하시려는 하느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정체와 행동을 알았고, 그분이 처형당했다가 살아났다는 증언도 들었지만, 그들의 눈과 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성서를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눈이 밝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눈을 가리는 일이 많습니다. 신앙의 체험과 경륜이 길다 해도, 오히려 신앙의 성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일이 숱합니다. ‘내가 안다, 내가 경험해 봤다’고 너무 자신하면 신앙의 성장을 멉춥니다.

예수님의 동행이 흥미롭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서를 다시 해석하여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방향을 얻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은 눈을 가리는 책더미에 불과합니다. 더 깊은 성찰과 기도, 열린 대화와 배움으로 마련한 신학이 없는 교회는 신앙의 길을 잃습니다.

제자들의 반응도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낯선 사람을 붙듭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교정받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성서를 다시 가르칠 때 깊이 귀 기울입니다. 그들은 이제 이 낯선 사람의 도전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곁에 두어 함께 지내고자 합니다. 이 도전과 배움에서 신앙이 열립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환대와 사귐에서 새로운 만남과 깨달음이 열립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눕니다. 이 익숙한 광경은 가나의 혼인 잔치, 오천 명을 먹이신 음식 기적과 함께 성 목요일의 마지막 만찬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 나눔은 부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친히 아침상을 마련하신 식사와도 겹칩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성찬례는 이처럼 서로 기쁨을 주고, 주린 배를 채우며, 사랑과 섬김을 나누며 축하하라는 당부입니다. 절망과 실패, 수고와 땀으로 젖어 지친 이들을 초대하는 부활의 식사입니다.

부활의 성찬례 안에서 낯선 이와 대화하고 배울 때 가려진 우리 눈과 귀가 열립니다. 환대하여 빵을 떼어 나누고 잔을 나누어 마실 때, 닫히고 막힌 가슴이 찢어지고 열립니다. 이 동행의 성찬례의 사귐 안에서 새로운 희망과 꿈이 되살아 납니다.

[전례력 연재] 부활 50일과 전례 상징들

Saturday, April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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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50일과 전례 상징들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공회는 전례적 교회로서 교회력(전례력)을 성실하게 지킨다. 교회력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우리 일상의 시간에 고스란히 겹치려는 장치이다. 몸과 마음, 시간과 생활의 리듬이 되도록 하라는 부탁이다. 전례의 여러 상징도 새로운 삶을 돕는다.

부활은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하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이 열렸다.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분기점,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 신앙 식별의 잣대는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이 새로운 시간을 강조하려고 고대 신앙인들은 흥미로운 숫자 놀이를 했다. 창조의 시간인 ‘칠’(7)에 하나를 덧붙여 ‘팔’(8)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7+1=8). 옛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새 창조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부활일은 단지 안식일 다음 날이 아니다. 새로운 제8요일이다.

새로운 시간의 놀라운 기쁨과 감격의 표현이 예배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안식일 예배를 대신하여, 새로운 시간의 제8요일인 ‘부활하신 주님의 날’(주일)에 성찬례를 드렸다. 그리스도인들을 이후 일어난 모진 박해 아래서도 목숨을 걸고 새 시간에 모였다. 부활일은 일 년 중 가장 큰 주일이며, 매 주일은 모두 작은 부활일이다.

이 시간은 이제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여기에도 같은 숫자 놀이가 있다. 옛 창조 시간의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나서 새로 얻은 시간이 ‘오십일’이다 (7*7+1=50). 구약성서의 희년 사상과도 겹친다.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 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 축제’로서 통째로 하나인 희년의 시간이다. 부활절기는 부활밤에서 시작하여 부활일과 부활 후 팔일부, 그리고 사십 일째 되는 승천일을 거쳐 50일째 되는 성령강림일을 아우른다. 4세기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이 절기 동안에 무릎을 꿇지 않도록 정했을 정도로 부활의 기쁨을 강조했다.

부활절기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신 일을 과거의 사건으로 축하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부활은 오늘과 미래에도 살아계시고 하느님의 다스림을 확인하고 되새기며 찬양하고 기뻐하는 영원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부활주일 단 하루의 종교적 의례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부활의 증인으로서 나날이 변화하고 성숙하며, 주님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세상에 전하는 ‘기쁨의 50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절기의 중심적인 상징 두 가지는 부활초와 세례대이다. 부활초는 부활밤 새로 축복한 불에서 붙여서 세상의 어둠을 이긴 하느님의 빛, 즉 부활의 생명이 만든 빛을 드러낸다. 부활밤 세례식에서 부활초로 물을 축복하고 그 물로 세례를 베푼다. 세례를 베푸는 곳은 성천(聖泉:거룩한 샘)이라 불리는 세례대이다.

교회 전통에서 세례대는 성당 동쪽의 제대와 마주 보는 서쪽의 입구 중앙에 부활초와 함께 있다. 신앙은 세례를 받고 제대로 나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순례의 여정이라는 뜻이다. 성당 입구에서 우리는 죄를 씻고 기름 부음을 받았던 세례의 경험과 언약을 되새기며 그 물로 십자 성호를 긋고 성당에 들어온다. 전통적인 성당 배치에서는 제대와 성천이 마주하며 복음의 성사인 성찬례와 세례를 되새겨 준다. 종종 세례대는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서울주교좌성당의 세례대는 영국에서 가져와 1892년부터 사용하던 정교한 대리석 팔각형 성천이다. 숫자 ‘팔’(8)이 다시 적용됐다.

신앙인은 부활밤의 새 빛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간을 걷는다. 신앙인은 과거를 씻는 세례를 통과하여 새로운 ‘생각과 말과 행실로’ 새로운 시간을 사는 ‘제8요일의 사람들’이다.

[전례력 연재] 부활찬송과 거룩한 삼일

Saturday, April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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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찬송과 거룩한 삼일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이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이 신비하고 거룩한 불꽃 앞에 둘러선 이들이여,
이제 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 은혜를 인하여 이 위대한 빛을 찬양하라”
(부활찬송 첫 부분).

부활밤 그리스도인들은 마당에 모여 새로운 불을 축복하여 어둠을 밝힌다. 새로운 불에서 빛을 밝혀 부활초에 옮겨 놓고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보며 길을 따른다. 이 순례자들의 손에도 작은 촛불이 들려있다. 빛의 순례자들이 모여서 듣는 부활찬송(Exsultet)에는 그리스도의 삶과 수난, 죽음과 부활 속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이 펼쳐진다. 8세기부터 ‘부활찬송’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부활과 구원의 신학을 보듬어 들려주었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이 세상을 ‘보시기에 참 좋은 것’으로 창조하셨으나, 인간의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쟁과 시기, 질투와 모함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파고들면 ‘아름다운 관계’는 깨지게 마련이다. 서로 멀어지고 깨진 관계를 신앙인은 ‘타락’과 ‘죄’라 부른다. 창조의 때를 회복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높이 들어 올리시겠다고 작정하셨다. 우리에게 선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마련하고, 우리의 교만과 미움을 쫓아내셨다.

이 부활밤이 거룩하고 복된 까닭은 이 위대한 사건이 예수를 건너 우리 자신과 교회를 통해 더욱 펼쳐지기 때문이다. 신앙인은 예수의 삶을 따라 악행을 지워나가고, 서로 용서한다. 우는 이에게 기쁨을 주고, 분열의 세상에 평화와 일치를 가져다준다. 신앙인은 이렇게 빛의 순례자들이다. 부활밤은 그리스도의 빛으로 모인 사람들이 세상의 빛으로 변화하는 축성의 시간이다.

“복되어라, 이 밤이여. 하늘과 땅이 결합하고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밤이로다.”

부활-성삼일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나누고,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며, 부활을 경험한다. 이 거룩한 사흘 동안 일어난 우주의 결합과 화해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축하한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마지막 삼일은 이 모든 화해와 구원의 필수요소를 제시한다.

성목요일은 세족례와 마지막 나눔의 만찬으로 섬김과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성금요일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절망이 서로 내어주는 희생으로만 희망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한다. 성토요일은 어둠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새 생명을 건져 올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마침내 부활밤에 우리는 죽음이 우리 삶의 끝이 아니며, 새 빛 속에서 펼쳐지는 삶이 우리의 부활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체험한다.

새로운 생명이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산다.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은 이제 ‘주님의 날’(주일)이 되었으며, 새로운 시간인 ‘제8요일’의 역사이다. 새로운 시간에 우리는 새로운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시며 산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 그리스도를 먹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이다. 아울러, 부활 오십일 째인 성령강림절은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교회’라는 신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 


“모든 창조물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여, 주님은 이제와 영원히 다스리시니, 우리도 세상에 이 빛을 비추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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