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신학' Category

토착화 – 우리의 현장과 선교

Saturday, July 19th, 2014

토착화(土着化) – 우리의 현장과 선교1

성공회 강화읍 성당은 우리 성공회가 자랑하는 신앙과 문화의 유산입니다. 불교의 사찰과 유교의 향교 건축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 아름다운 성당으로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우리 서울 주교좌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서양 건축이지만, 곳곳에 우리 전통과 문화의 아름다움이 녹아들어 장엄하고도 따뜻한 신앙과 전례의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오릅니다. 우리는 이 두 성당을 토착화의 한 열매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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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화를 건물에만 제한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토착화’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양한 인간의 삶과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내려 자라나고 펼쳐지는 현상입니다. 이런 현상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신앙과 신학이 ‘토착화 신학’입니다. 복음의 토착화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시어 인간 예수로 오신 성육신 사건에 뿌리를 둡니다.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문화 속에서 활동하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토착화의 근거입니다. 토착화는 역사를 향한 복음의 증언인 선교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토착화의 의미를 넓고 깊게 물으면, ‘상황의 신학’ ‘현장 신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심은 신앙과 신학을 넘어서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상황과 맥락과 현장 안에서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 토착화 신학이 돋보이는데, 민중신학과 종교문화의 신학이 그것입니다.

민중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사회와 정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고 응답하는 신학입니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의 사회 정치적 억압과 격동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비추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에 집중하며 성서를 해석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종교문화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한국의 종교와 영성이 만나서 대화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선교사보다 먼저 오시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깊이 깨닫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이미 펼쳐진 영성의 경험과 표현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서로 비추면서 복음의 뜻을 더 깊이 헤아립니다.

일찍이 신앙과 복음의 토착화에 남다른 식견을 보여주었던 우리 성공회에는 이제 어떠한 현장의 신학과 선교가 필요할까요? 한국 사회 속에서 복음의 작은 씨앗을 품은 우리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키워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그 나무에서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다시 맺을 수 있을까요?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4/07/20에 실은 글. []

시간, 순종, 참여 – 성 베네딕트 축일

Friday, July 11th, 2014

성 베네딕트 축일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성 베네딕트(St. Benedict of Nursia, c.480~c.540)는 서방 교회 수도회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6세기에 다양한 수도회 전통을 집대성하여 베네딕트 규칙서와 수도회를 만들었고, 이후 많은 수도회의 모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되다’는 뜻의 이름을 지닌 베네딕트 성인은 로마 귀족 출신이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이런 계층이 주도하던 사회와 문화에 큰 의문을 품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베네딕트 성인의 삶과 신앙과 신학은 ‘베네딕트 규칙서’에 가장 잘 드러납니다. 후대 사람들은 베네딕트의 규칙서와 수도회가 서구 유럽의 문화와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합니다. 뛰어난 교부학자이자 영성가인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2012년 은퇴)께서는 베네딕트 영성 전통을 ‘시간의 균형, 순종, 참여’의 측면에서 요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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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시간은 노동과 공부와 기도로 균형 있고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시간은 무엇을 성취하는 데 대부분 사용되고, 그 피로를 풀려고 지나치게 노는 일로 채워지기 일쑤입니다. 열심히 살기는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사는 시간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잠시 멈추어 “기억을 되살리고 지성을 깊이 하고, 사랑이 성장하도록 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공부와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밖에 있는 남을 발견하고, 하느님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순종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고집과 생각을 포기하는 훈련입니다. 순종은 굴종이 아닙니다. 남에게 경청하는 일이 순종입니다. 지위고하, 나이, 신분을 넘어서 서로 경청하는 행동이 진정한 권위의 시작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경쟁적인 싸움을 거절하는 한편, 자신의 삶과 조직에 균형과 억제를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받아들여야 권위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은 획일화시키려는 관료적 힘에는 반드시 저항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피어나도록 돕고 거룩함을 위해 서로 격려할 때 참 공동체가 마련됩니다.

참여는 사회와 조직의 삶에서 저마다 소임을 찾아 책임을 다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소임을 누구에게 맡겨놓고 방관해서는 권위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면 누군가는 계속 수동적인 삶을 강요받게 되고, 그 영혼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 상처 난 영혼에서 난폭한 분노와 테러리즘이 나옵니다. 중앙집권적인 문화는 참여가 없는 문화입니다. 관료정치는 비인간적인 정치입니다. 이에 맞서는 힘과 내용을 갖추고 활발히 연구하고 논쟁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요 참여입니다.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는 베네딕트 영성을 통해서 성서의 인간학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섬기고, 모든 이를 위해 각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을 존중하고 격려하며, 이로써 관상적인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성 베네딕트 규칙서 우리말 번역은 곳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트 영성 입문에 좋은 책으로는 성공회 신자이자 베네딕트 영성 전문가인 에스더 드 왈이 쓴 “성 베네딕트의 길”을 추천합니다.

  1. 7월 6일 주보에 실은 글을 성인 축일에 맞춰 약간 수정하여 올린다. []

생명과 구원의 기억 – 성 이레네우스 축일

Saturday, June 28th, 2014

애가 2:2, 10~14, 18~19 / 시편 74:1~3, 22~23 / 마태 8:5~171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세상에는 잊혀지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잊어야 살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면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뇌의 작용이 얽혀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뇌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해로운 기억이든 이로운 기억이든, 자기 멋대로, 혹은 자신이 감당할 능력에 따라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우리 마음대로 제어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우리 생에서 살았던 여러 사건과 경험도 잊혀지는 일이 많은데, 2천 년 전, 그것도 전혀 다른 나라에서 잊었던 일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202년경에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이레네우스 성인을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도서는 이분의 기념일을 5월 28일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실수입니다. 다행히 그 실수를 바로 잡아서 6월 28일 오늘, 그분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이 우연한 실수를 통해서 성 이레네우스 축일을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레네우스 성인을 잘 알거나 기억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의 제자였던 폴리캅 성인의 제자였으니까,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 족보에서 손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인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외우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니케아 신경의 여러 문장이 이분의 글에서 따온 것인데도 이 성인의 이름이 낯설기만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분의 생소한 이름뿐만 아니라, 이분의 가르침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일까요? 이 성인이 그토록 싸웠던 이단들, 잘못된 가르침이 지금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세합니다.

세상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나누고, 모든 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삶의 미래를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는 일이 횡행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 불완전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상은 실제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숱합니다. 불완전하고 악이 가득하고 육적인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내적인 세계의 평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매우 한정된 사람에게만 있고,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로 알 수 없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 자처합니다.

우리의 삶에 담긴 갖가지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은 그저 모두 허상일 뿐이고,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지식과 진리만을 깨달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횡행하니, 이런 사고방식을 철저히 반대했던 이레네우스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는 잊고 산 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옹의 교부 성 이레네우스는 이처럼 개인적이고 영적 지혜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았던 영지주의자들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영적 지혜와 일상의 경험, 영과 육, 그리고 성과 속을 철저히 구분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오늘 우리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를 드리며 떡과 잔을 나누는 일을 두고 ‘세상의 썩어질 물질을 먹는 헛된 짓’이라고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수련하여 얻은 영적 지식이 영원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 성인은 성찬례가 육과 영의 결합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성체’의 사건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며, 이야말로 부활에 대한 희망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만남과 변화의 신비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성찬례이며, 이 성찬례 신비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리와 선언을 세운다고 반박했습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구원은 이미 창조 때에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참 좋다”하며 던지신 감탄사에 이미 담겨있노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그 창조 안에서 조금씩 유아기를 벗어나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나는 진화의 과정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성인은 세상에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우리의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기억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우리의 영혼도,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살다가 우리와 똑같이 밥을 나누고 마시고, 웃고 울고, 즐거워하고 화내고, 결국에는 고통을 당하다 죽었던 이유도, 우리의 생로병사 그 자체가 여전히 하느님의 축복 안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창조 때의 아름다운 모습, 참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성숙한 사람으로 키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야 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성인은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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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희 작, 침묵: Shin-hee Chin, Silence)

지금부터 13년 전, 그러니까, 2001년 6월 28일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제 딸 아이보다 넉 달 먼저 세상에 선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도희’입니다. 그 생명이 한 가족에게, 특히 엄마 아빠에게 선물로 주어졌을 때 경험한 기쁨을 우리는 간단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이 자라나며 우리에게 보여준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는 말과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1년을 지상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이 홀연히 엄마와 아빠 곁을 떠났을 때 닥쳤던 슬픔과 절망감을 우리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사건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의 시편 기자가 되어 이렇게 외칠 뿐입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 오늘의 예언자마저도, 비탄에 잠겨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나 너를 어디다 비겨 위로해 주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벌어졌거늘, 어느 누가 다스려줄 것인가? 주님께 울부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같이 흘려라.”

우리는 눈물을 마시며, 눈물에 비추며, 우리의 모든 삶을 기억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대로 우리의 존재가 결정된다”고 어거스틴 성인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왔던 모든 사랑들 전체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 만지고 느끼고 먹고 마셨던 모든 것들을 통해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되살려 기억할 때, 아니, 우리와 11년을 살다가 홀연히 꽃처럼 떠난 아이들의 숨결을 기억할 때, 그리고 지난 4월, 속절없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우리를 떠나야 했던 300여 명의 꽃 같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제대로 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풍요로운 기억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때, 그리하여 이 모든 기억과 세계를 껴안으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 인간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기억 속에 잠긴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은 우리의 약함이요, 아픔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라야 그 생명들은 우리 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으로 남아 살아 숨 쉽니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고,” “그분은 여전히 하느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도, 한 명도 잃지 않고, 그분의 품 안에서 있다는 것을 늘 되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1. 한국 기도서는 성인 축일 해당 본문을 제시하지 않아 연중주간 본문을 사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