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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본회퍼 축일

Wednesday, April 9th, 2014

잠언 3:1~7 / 시편 119:89~96 / 로마 6:3~11 / 마태 5:1~12

2014년 4월 9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요셉 신부

1998년 7월, 영국 성공회 런던 웨스트민스터 애비 성당에서는 20세기의 순교자 10명의 입상을 세워 봉헌하였습니다. 그 순교자들 가운데는 천주교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미국 침례교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리고 독일 루터교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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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우리 기도서가 개정되면서 한국 성공회도 마틴 루터 킹과 디트리히 본회퍼를 기념하도록 했습니다. 오늘은 방금 읽은 복음 본문, 산상수훈의 진복선언을 끔찍이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살았던 본회퍼의 축일입니다.

아마도 지난 100년 역사 속에서 성공회의 여러 지도자, 그리고 현대 성공회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꼽을 때, 그 목록에 본회퍼가 빠지는 일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1960년대 초, 영국 성공회의 주교이자 탁월한 신약성서 학자였던 J. A. T. 로빈슨 주교님이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출간하여 기존의 신앙 체계에 도전하고 세계 교회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분도 바로 본회퍼였습니다.

1906년에 태어난 디트리히 본회퍼는 1929년, 23살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촉망받는 신학자로서 기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목사 안수에는 너무 이른 나이여서 박사후 과정으로 미국에 건너갔고, 미국의 신학교를 보면서 “신학이 없는 동네”라고 말할 만큼 신학적 총명으로 기고만장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뉴욕의 할렘, 즉 흑인 빈민촌의 삶을 경험하고, 그들의 처지와 그들의 삶이 만들어내는 신앙과 영성 안에서 자신의 책상물림 신학을 깊이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평화, ‘샬롬’이 이뤄져야 할 이 땅이 잘못된 사회 구조와 못된 권력에 의해 계속 망가지는 사태를 목격했고 그 현실을 새롭게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경험을 마치고 그가 독일에 돌아왔을 때,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폭압적인 정치를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속한 교회 전체가 이 폭압적인 히틀러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를 두둔하거나 침묵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 현실을 반성하고 뜻을 같이하는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모여, <고백 교회>라는 교회 개혁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정권을 반대하던 <고백 교회> 운동의 동료와 더불어 그는 계속 탄압을 받았고, 결국 영국 런던에 있는 독일인 교회 목사로 초청받아 영국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영국에서 본회퍼는 히틀러 나치 정권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을 반대하며 유럽의 평화를 염려하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을 친구로 얻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막 시작한 성공회 수도회 <부활 공동체>(the Community of Resurrection)에 방문하여 머물면서, 새로운 신학교의 모습,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삶을 더 깊이 구상하고 생각했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먼저 지하 비밀 신학교(Finkenwalde)를 세웠습니다. 그 모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영국에서 경험한 성공회 ‘부활 공동체 수도회’였습니다. 이 신학교를 이끌면서 본회퍼는 오늘 읽은 복음 본문이 들어 있는 산상수훈을 연구하는 한편, 당시 신학과 교회의 문제가 ‘값싼 은혜’(cheap grace)를 팔고 다니는 데서 나온다고 간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에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값진 은혜를 구하며 싸워야 합니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같은 은혜입니다. 교회는 은혜를 퍼주는 곳처럼 어떤 질문이나 고치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후하게 축복을 던져 줍니다. 값이 없는 은혜, 대가 없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미 값을 치렀으니 더는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은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당연한 것 같은 후한 말로)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값싸게 죄를 덮어버리고, 회개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일 없이 죄를 정당하다고 용인하는 꼴입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스스로 축복하는 은혜이며, 회개를 요구하지 않고 용서를 선포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의 훈련 없이 주는 세례이며, 죄의 고백 없이 얻는 영성체입니다… 값싼 은혜는 제자됨이 없는 은혜요, 살아계시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은 값비싼 은혜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이 은혜가 우리더러 예수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인간에게 참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값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바로 하느님의 성육신입니다.”1

히틀러 나치 정권은 이 비밀 신학교를 찾아내고 폐쇄했고, 본회퍼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와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교수 자리를 제안하며 미국에 머물라고 했고, 본회퍼는 독일을 잊고 미국에 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자신의 결정을 돌이켜서 상황이 더 나빠지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당시 독일 장교들이었던 그의 사촌들과 히틀러 제거 계획에 가담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미친 운전자가 모는 광포한 차) 바퀴에 사람이 깔려 죽을 때, (성직자와 교회의 일은 그 희생자들의 장례만 치르르는 일이어서는 안 되고), 그 바퀴를 멈추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히틀러 제거 계획은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그는 곧장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느님 부재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나누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인간은 ‘세속’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에 의지해서 자신을 죄인이나, 참회하는 자 혹은 성인으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시는 그 인간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은 어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 세속 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고통에 참여할 때 가능합니다.”2

1945년 4월 8일 일요일, 다른 수인들과 예배를 마친 본회퍼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수인 본회퍼는 나오시오.” 그는 감옥의 동료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고, 그 말을 가까운 친구였던 영국 옥스퍼드 크라이스처치 대성당의 주임사제인 조오지 벨 신부님(후에 옥스퍼드 주교)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친구, 이것이 마지막이네. 그러나 내겐 새로운 삶의 시작일세.”

다음 날인 4월 9일, 그의 교수형이 집행됐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습니다.

본회퍼가 자기 생의 막바지에 선택했던 결정을 두고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논쟁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암살 음모에 가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신앙인이 자신을 죽음에 그처럼 쉽게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남은 가족은 생각지도 않는단 말인가? 그러나 본회퍼는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복된 사람들”을 마음 깊이 품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목말라 하는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를 따르다가 모욕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을 마음에 깊이 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순간에도 자신을 여전히 깊이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스스로 물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
오늘은 이런 사람,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되는가?
동시에 둘 다일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나 자신 앞에서는 비겁하고 비탄에 잠긴 허약한 인간인가?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어떤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이미 이룬 승리 앞에서 패주하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비웃는 내 안의 이 외로운 질문들.
내가 누구이든, 그대는 아시나니,
하느님, 나는 그대의 것!”3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 함께 걷던 사람들과 나누던 깊은 사랑과 의리에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남을 위한 존재”여야 한다는 진리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 그런 분이 본회퍼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가까운 이웃, 친구, 가족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니 이제, 우리가 그런 신앙인이어야 합니다.

죽임을 당하기 얼마 전 본회퍼는 옥중에서 아름다운 시 하나를 써서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넘치는 은총의 힘에 아름답게 둘러싸여
주님의 오심을 신실하게 기다리나니
주님께서 밤과 아침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매일 새로운 날에 우리에게 인사하십니다.

그러나 오래된 고뇌들이 우리 마음을 괴롭히고
나쁜 나날들이 견디기 힘든 짐을 지우나니,
주님, 이 두려운 마음에 구원을 주소서.
주님께서 고통이 넘치는 쓰디쓴 잔을 주실 때,
우리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주님의 선하고 사랑스러운 손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이 이 잔을 감사하며 마시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는 여전히 기쁨을 주시며, 밝은 해로 비추시니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에 우리의 모든 삶은 오로지 주님의 것이 되겠지요.”4

아멘.

*5

  1. The Cost of Discipleship []
  2. http://viamedia.or.kr/2008/03/18/191 []
  3. http://viamedia.or.kr/2008/12/31/384 []
  4. 미국 성공회 성가 1982 에 번역된 가사의 우리말 번역 []
  5. 인용문은 모두 주낙현 신부의 사역(영어)이며, 강론 시 전달을 위해 느슨하게 번역했다. []

경계 – 신앙인의 자리

Saturday, January 25th, 2014

성직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의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백성이 ‘보편적 사제직’(혹은 만인 사제직)을 나누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래전, 시인 황지우는 이렇게 적었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지 진단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여기 ‘문학’이라는 자리에, ‘신학’을, ‘교회’를, ‘성직자’를, 그리고 ‘신앙인’을 넣어도 되겠다. 나는 여전히 이 지점에서, 그동안 명멸했고 여전히 진행 중인 그리스도교 운동, 신앙 운동, 특히 소위 ‘진보적’ 종교 운동이 자기 자리를 굳건히 잡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관여’의 방식에서 ‘조짐’과 ‘상처’와 ‘의사소통’에서 실패했다고 본다. 변화를 향한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다 싶다.

오늘 외신을 통해, 그 ‘관여’의 상징적 이미지, 아이콘, 십자가, 아니 신앙의 자리를 발견한다. 시위대와 진압부대 ‘사이’에 우뚝 선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수사 신부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십자가와 아이콘, 바로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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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시위대와 진압경찰 사이에 선 정교회 수사 신부들

종교는 ‘사이’와 ‘틈’의 공간을 만들어 내야 한다. 대결하고 가르는 분열의 경계선 위에서, 그 경계의 공간을 넓히는 이들이 신앙인이다.

함부로 도통하여 ‘경계를 넘는다’고 말하지 말 일이다. 그 가느다란 경계의 선 위에서, 그 사이에서, 그 틈에서 수없이 떨리고 긴장하며 고통당하며, 조짐을 보고, 상처을 껴안으며,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서는 경계를 넘을 수 없다. 아니다. 실은, 경계를 넘는 일은 없다. 그저 그 경계의 공간을 넓히는 일만 가능하다. 예수께서 늘 경계를 걸으셨던 것처럼.

신학 ‘공부’와 공동체

Wednesday, January 15th, 2014

멀리서 안부를 묻는 어느 벗된 신부님의 편지에 답장했다. 공부하는 일에 관한 고민과 여러 어려움이 담겨진 편지였고, 나를 여러모로 기억하며 격려해 주는 편지였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하고 그분을 응원했다. 그러나 먼저 된 사람으로서 이렇게 밖에 적어 보낼 수 없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편지는 늘 나 자신에게도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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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바실, 요한 크리소스톰, 신학자 그레고리)

*** 신부님, 잘 지내셨지요? 자세한 소식을 나눠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울러 [오래 전 제가 진행한 전례 워크숍과 특강 등에 관한] 옛 기억을 되새겨 주시니 반갑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부끄럽게도, 지난날을 돌아보면, 지금은 그 열정이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에 하늘을 멍하게 쳐다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지난 5년은 제게 가장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안팎[에서 비롯한]… 깊은 절망에 저 자신이 눌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여기저기서 밝힌 바와 같이, 지난 10여 년의 미국 생활은 제게 여러 가지로 축복이요 은총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깊은 공부와 경험을 한 것이 그것이고, 공부와 더불어 사목 현장에서 발을 떼지 않은 것도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난한 신자들과 버텼다는 것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그나마 하느님 앞에 덜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찌보면 지금처럼 제 공부의 진척에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성직자로 불린 이상 어떤 이유로도 사목 현장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

교회의 변화는 그야말로 교회의 현장에서 일어나지, 신학교나 신학자의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 혹은 신학자는 [하느님의 백성이] 현장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좀 더 보편적인 언어로 정리해 내고, 역사와 전통 안에서 그 맥락을 이어주고 새로운 대화의 길을 열어주는 일에 종사할 뿐입니다. 이 순서가 잊히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회와 신학, 특히 신학은 ‘지식인의 유희’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교회 현장을 누가 점령했는지 깊이 살펴볼 일입니다.

특히 신학교는 “성직자 양성 기관”이며, 신학을 가르치는 이는 그 일에 복무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신학자”의 임무이며, 이 임무를 하지 않을 요량이면, 그냥 “연구하는 신학자”로 남으면 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직자 양성 과정에 대해 깊이 살펴보는 기회를 얻길 바랍니다. 학위는 개인적인 성취이지, 교회의 성취는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취가 되려면 교회 현장과 신앙 교육에 연결돼야 하고, 좁게 보더라도 성직자 양성 과정과 연결돼야 합니다.

[…] 여러 식으로 한국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 공통적인 아쉬움은 교회에 좀 먹는 반지성/반신학주의와 신학교의 전혀 헤아릴 길 없는 신학 교육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 편견이겠으나, 한국 성공회의 실패는 바로 이런 지점의 결핍에 있습니다. 그 와중에 교회는 더욱 피폐해져 갑니다. 더 나빠진 한국 교회로 돌아가는 마음이 참으로 무겁습니다. 어쨌든 신학 교육과 성직 양성 과정에 대한 고민을 계속 고민해 주세요. […] 적어도 저는 여기에서 그 점을 깊이 경험하고 대화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깁니다.

‘꼰대’ 같은 소리를 지껄여 대서 미안합니다. 신부님께서 깊이 생각해 주시리라 믿기에 드린 말씀일 뿐입니다. […]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적었다고 헤아려 주세요.

평화를 빕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