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February 24th, 2010

느슨하게 약속한 글이 있었다. 블로깅에 대한 잡감을 적다가, 내 블로그를 찾는 이들 가운데 교회 밖에 있는, 다시 말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부탁할 말을 한번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교회 밖’이란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편하게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마음에 두시는 더 큰 의미의 교회와는 차이가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한 글’을 작정하고 쓰려다 보니, 여러 미묘한 생각이 겹쳐서 주저했다. 느슨하나마 약속을 했으니, 성의를 보여야겠다 했지만, 잘 안됐다. 실은 마음에 불필요한 욕심이 있었던 탓이었겠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고, 이런저런 넋두리나 적기로 했다. 그 틈에서 뭔가를 발라 읽어주면 고마운 일이겠다고. 그러니 오늘 올라가는 몇 개의 글은 이 즈음에서 읽을지 말지를 판단하면 좋겠다. 시간을 아끼시라.

블로그 독자들

내 블로그 독자가 어떤 분들인지 잘 모른다. 미안한 일이다. 댓글을 달지 않는 한 어떤 의견도 들을 수 없는 일방적인 이야기만 하는 셈이다. 댓글이나 종종 건네오는 이메일로 가늠하자니, 그리스도교 신앙인(성공회 신자와 다른 교단)도 조금 있고, 종교와 관계없는 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종교에 관심 있되 전혀 몸을 담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 짐작이 맞다면, 그런 독자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친다. 내 블로그는 그 부제가 표명하듯이 어떤 특정한 신앙 전통의 ‘제도적'(혹은 공식적)인 성직자가 적는 지극히 좁은 시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각을 넓히면 좋으련만, 내 그릇 크기가 그뿐이기에 하릴없다.

이 즈음에 성공회 신자들에게 불평은 좀 해야겠다. 게시판과 블로그를 운영한 지난 10여 년 동안 느꼈던바, 기존의 성공회 신자들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대화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묻기도 어려워하고, 자기 이름 내놓는 것도 주저하는 것 같다. 의문과 질문이 약하고, 대화와 토론이 부족하고, 격려와 공감에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말로 성공회 전통에 반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이 내 기대와는 달리, 혹은 다른 교단이 신자들과는 달리 부끄럼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아니 이심전심/염화미소를 대화의 경지로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로 확장되지 않는 한 생각과 마음이 커 나갈 수 없음을 나 자신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댓글이나 이메일로 오가는 피드백을 언급했으니, 잠시 덧붙인다. 내 블로그는 성공회 ‘전도 모드'(?!)를 애초부터 갖고 있다. 내 시각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또 우리 사회에서 작은 교회로 존재하는 신앙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려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7-8년 전 이메일로 일 년이 넘게 여성 사제직 문제로 상담하던 어느 천주교 수녀님은 마지막 피정을 간다는 말씀을 전하고는 소식을 끊었다. 어떤 이들은 오랜 상담과 인연을 맺은 끝에 성공회에 와서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신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몇 가지 신앙적인 교리적인 문제로 씨름하며, 혹은 그저 호기심에 나눈 대화와 상담도 있었다. 블로그 글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체로 ‘교회 불참형’ 신자들이나, 무종교인들이었다.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아래서 살아가길 빈다.

‘전도 모드’? 그러나…

신앙생활을 다시 하려던 독자들 가운데는 내가 ‘선전’하는 ‘성공회 신앙 전통’에 혹하여 교회에 나갔다가 실망하여 편지한 이들도 있었다. 표현은 정중했지만, ‘네가 말하는 성공회 전통과 실제 교회는 너무나 다르더라. 당신에게 속은 것 같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꾸하기 어려웠다. 나도 그런 실망을 잘 아는 터에. 대신에 이런 경험을 들어 기회가 닿는 대로 동료 신부님들의 잘못을 탓하고 호통친 적도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동료 신부님들께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블로깅의 경험을 통해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비판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라면, 다음에 이어질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고백하거니와 내 편견에 가득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수고롭게 허튼소리를 발라내어, 어눌한 이의 마음 한편을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트위터 벗들에게 감사의 인사: 이런 이야기를 꼭 나눠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jonghwan 님, 이 문제로 트위터로 대화를 나눠주신 @gihong 님, @ntolose 님, @kojiwon 님, 그리고 ‘기대한다’는 트윗으로 압력을 행사하신 @00ooo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지 죄송할 뿐입니다.

1.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February 24th, 2010

여기서 쓰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그저 어떤 특정 종교 단체에 참여하여 종교 혹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을 가리킨다. 또는 제도적 종교 단체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그 소속감이 현저히 떨어져 있거나,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포함할 수 있다. 역시 새롭게 어떤 식으로든 제도적인 종교의 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분들도 염두에 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도적 실체’로서 구체적인 ‘교회’ 단체 혹은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다. 상징으로서 교회, 의미로서 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제도적 교회 안으로/안에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이다. 이런 사람이 제도적 교회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성직자 옷을 벗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 정도면 내가 가진 사고와 행동의 반경과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아래 말들은 모두 이런 내 편견의 결과들이다. 여기까지는 일종의 디스클레이머(disclaimer)이다(그나저나 이를 우리말로 뭐라 하지? 도움 주실 분? – 우리말 “발뺌”). 아마 이후 내용도 그럴 것 같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드리는 내 호소는 사실, 한가지다. 세상의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참여해달라는 것이다. 이를 사람에게 적용하자면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이다. ‘소수자’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인상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그 인상 자체가 우리가 가진 소수자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거대하게 주류/비주류로 따지고, 큰 그림을 그려서 판을 새로 짜는 일이 중요하지만, 이런 일들은 세상의 ‘작은 것들’에 대한 시선과 참여를 통해서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 한길로 펼쳐진 행진뿐만 아니라, 잊히거나 숨겨진 골목길을 드러내고, 그 삶의 결들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과 향유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양성의 풍요로움은 이런 작은 것들, 소수자들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얻을 수 있다. 큰길이 지배하면, 머슴들과 아랫것들은 옆에 난 작은 길로 숨곤 했다. 큰길의 군중에 숨어 있는 사람들보다, 아예 작은 길에서 자라나는 경험과 이야기가 더 다양하다. 아니더라도, 그 작은 길의 목소리는 길에 함성과 더불어 존중받아야 할 사람의 목소리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인 신념 체계의 논리성, 그 자체의 불안한 과거들, 현재의 행태들을 엿보고 겪어서 진절머리가 나더라도, 그것들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까지 덮어버릴 수는 없다. 거기에 ‘누가’ 있느냐는 것,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것에 대한 고민 어린 시선과 참여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잊힌 목소리들이 있어야 다양함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2.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에서

February 24th, 2010

사람은 자기 생존/보호 본능 때문에라도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는 일이 많다. 종교나 교회의 선택에서도, 좀 더 크고 안정된 곳을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종교 현황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크기로 따지자면, 대익대 소익소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치 지향이니 그 대세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대형 할인 매장을 두고 좀 더 비싼 동네 구멍가게를 이용하라는 말도 서민들에겐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선택 속에서 정작 작은 이들은 그 작은 것마저도 잃는다.

큰 종교 단체, 큰 교회를 선택하는 것의 속내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유를 후려쳐서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대형화를 통한 종교의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분들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선택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비판은 그에 따른 행동의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비판적인 이들은 주류의 대형 교회, 혹은 단체의 조건을 활용하여 전략적인 변화를 모색한다고 하며, 그 안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럴 수 있겠다. 그 수고를 응원한다. 다만, 이런 의구심도 가능하다. 그 편만한 대형 교회의 논리와 신학, 행태 안에서 실제로 비판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 주위의 많은 경험을 듣건대, 거의 불가능했다. 대체로, 지배하는 힘은 그 작은 목소리를 자기 내부 다양성의 표지라는 식으로 역이용한다. 그 작은 목소리 자체는 점차 힘을 잃거나, 그 교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비판의 목소리라 자위하면서 자기변명을 삼기도 한다. 너무 단순화해서 부정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

대형 교회 혹은 규모 있는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아주 많다. 부정적인 것 말고, 긍정적인 여러 사례를 들 수도 있다. 좋은 의미에서 ‘몰아주기를 통한 효율성’이 그 밑을 흐르는 경우가 많다. 큰 교회의 자원에는 고급 인력의 네트워크, 그리고 모아진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실제 능력이 있다. 그 선한 행동을 헐뜯지 않는다. 다만, 내 편견은 그것들마저 큰 교회의 지배 논리에 종속되어 이용되는 되는데 머문다.

좀 더 비판적인 이들은 이런 교회를 떠난다. 아니, 교회에 진저리를 친지라 교회를 멀리한다. 마음에 종교의 가치를 품고 그리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되 교회는 안 다니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매우 어려운 결단이다. 이들의 판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내 아쉬움은 이것으로는 부족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종교나 교회는 그 지배적인 논리와 행태를 더욱 강고히 한다. 쓴소리가 빠져나가니 자신의 지배적인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극우 대형 교회들이 신자를 늘리게 된 것은 이런 비판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제거된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 와중에 정말 믿고 싶은 예수와 복음마저도 그 대형 교회에 의해 조각되어 유포된다.

그렇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그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나? 아니면 떠나야 하나? 이 고민 속에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잣대로 삼을 이유를 찾는다. 어떤 종교 혹은 교회라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지향이 주된 곳이라면, 남아 있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깨끗하게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소수자인 작은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