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작은 교회에 참여하는 일

February 24th, 2010

소수자인 교회, 작은 교회는 교단일 수도 있고, 개별 교회일 수도 있다. 한국의 도저한 개신교의 개 교회 중심주의 때문에 교회(church)는 개별 회중 공동체(congregation)로 이해되는 면이 강하다. 그러나 본래 교회는 지역을 아우르는 개별 회중 공동체의 연합(교단에 따라, 교구, 노회, 연회)이든지,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쨌든 작은 교단, 혹은 작은 교회에 참여하여 그 소수자들의 몸부림을 도와야 한다. 비판의 사회적 책임은 행동이다. 그 행동이 다양할지라도 이 소수자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지가 작다고 소수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라는 실현한다고 볼 수 없다. 한국의 많은 작은 교단/교회들은 여전히 큰 교회를 욕망한다. 많은 이들이 (초) 대형 교회 부설 교회 성장 연구소의 세미나에 참여하여 ‘성장 비법’을 전수받으려 한다. 그동안 그 성장 연구소는 대형 교회의 지배적 논리를 퍼뜨리려 강화하며, 그 운영비의 일부마저 가난한 작은 교회에서 ‘삥뜯기’를 한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삥’만 뜯기지 성공하는 사례를 마련하지 못한다. 논리와 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작은 교회의 처지이고 편만한 욕망이다.

그러니 소수자의 처지에서 그 원칙을 지향하는 교단/교회가 바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작은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의식적으로 찾아야 한다. 바르게 살아보려는 작은 교회들이 너무나 힘겹게 분투하고 있다. 이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작은 목소리들이 들리게 해야 한다. 이 공동체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삶과 가치를 나누며 발전시키고, 확대해야 한다.

이 주장에는 모순도 있고 역설도 있다. 작은 교회를 찾아가 그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큰 교회의 지배적인 힘에 대한 비판과 모순될 수도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유혹은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작은 교회들의 분투를 수수방관하는 동안 그런 가치의 목소리와 삶의 경험들은 점점 사라져서, 큰 교회의 지배력을 더욱 확대된다. 역설적인 경험이다.

인정한다. 여러 점에서 그 작은 교회들이 기대에 못 미친다. 여기에는 나름 한계와 변명이 공존한다. 작은 교회 고유의 작동 원리(다이내믹)를 구축하지 못한 사목자/목회자,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편, 그 고유한 작동 원리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시행착오의 축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를 찾는 이들은 다 만들어 놓은 떡을 쥐려 한다.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나, 비판적인 신앙인들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 앞서 말한 모순과 역설을 넘으려면, 비판적인 신앙인들은 그 작은 교회 ‘안에서/통하여’ 그 비판을 실험하고 행동해야 한다. 교회 아닌 다른 곳에서 그 실험장을 찾았다면 할 말이 없다. 거기에 충실한 것도 좋겠다. 그러나 비판적인 신앙인들이라면, 교회를 여러 비판적인 사고와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비판적인 가치와 경험을 나누고 실험하는 공동의 시공간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어느 경제학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경제학의 주장이 낭만적인 회상이 되어버린 이 도저한 큰 것들의 절대 자본주의 시대에,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작은 것은 부끄럽다’가 더 맞는 말이 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우선 머리로는 이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몸의 참여로 그것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너무 주관적이지 않느냐고? 그렇다. 신앙은 그런 주관적 결단을 시작으로 한다. 그게 허점이라면 허점이겠지만, 또한 마지막 힘이기도 하다.

4. 어떤 교회를 선택할 것인가?

February 24th, 2010

여기까지 왔다면, 독자들 대부분은 내가 특정 교단을 홍보하려고 별수를 다 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정한다. 한국 사회에서 작은 교단/교회들은 정해져 있다. 내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말하자면, 특정 교단/교회들을 머리에 두고 있다. 물론 내가 속한 성공회를 거기에 끼워 넣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부끄러운 것은 내가 속한 성공회가 소수자로서 소수자와 함께하는 신학과 신앙생활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랜 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동시에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자기 교단의 가능성에 초대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작은 교회 자체의 문제와 열등감을 이겨내려면, 그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열등감을 넘을 수 있는 가치와 행동을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할 사람도 부족하고 노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작은 교단은 또 다른 좌절의 악순환에 내맡겨진다.

어쨌든 머리에 둔 교회들을 적어본다. 교단으로 말하면, 기독교 장로회(기장), 성공회, 복음 교회를 들겠다. 이 교단에 속한 개별 교회들이 그 가치와 실천에서 균일성을 보여주지 않으나, 교단 전통 안에서 최소한 공유하는 가치들이 있다. 문제는 이 전통적 가치들마저 성장주의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 교회로 따지면 더 확대할 수 있겠다. 예수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등과 같은 교단 안에서 분투하는 목회자들과 작은 교회들을 눈여겨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교단의 여러 교회는 그동안 작은 교회들의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나 무참히 실패하기도 했다. 그 작음으로 인한 가난은 사람을 너무나 지치게 했다. 교단 내에서, 그리고 교단을 넘어서 이들 사이에 긴밀한 생존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네트워크를 가진 교회들이 그나마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교 단일 교파로서는 세계에서 최대, 한국에서도 최대이다. 천주교의 진보성은 소수의 성직자과 수도자, 평신도의 진보성이다. 그들이 겪는 처지를 전해 듣는 마당에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정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작은 교단으로 남아 있으나, 그 처지를 잘 알지 못하니 말하기가 어렵다.

트위터에서 트윗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쉽지 않은 문제였는데, 나는 우선 교회 규모로 쉽게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교단에 따라, 지역에 따라 그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개신교의 개교회주의라는 정황과 현실을 봐서, 도시에서는 500여 명이 분기점이 되리라 생각했다. 물론 위 세 개 교단에서 이 숫자를 넘기는 교회는 기장이 좀 사정이 낫긴 하지만, 손을 꼽는다. 작은 교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경우라면, 그 수가 더욱 낮아질 수 있다. 120명을 넘기자 일부러 분가한 교회도 있다(기장 강남 향린, 들꽃 향린). 내 경험과 자료들로 보면, 약 300명을 넘기면 개교회는 성장주의의 유혹에 빠진다. 성장을 원하는 작은 교회는 200명을 목표로 하다가 자기 정체성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작은 교회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보기에 딱할 정도이다. 2-30명부터, 4-50명, 7-80명의 출석 인원까지 다양한데, 모두 생존 때문에 원래의 추구하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스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도 이른바 ‘악’만 바친 몇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 교회들이 충분히 사목적/목회적이도록 따뜻할 여지가 많지 않다. 새로운 찾아온 사람들은 낯설어하고,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뺀다. 이 상처입은 작은 교회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또 다른 악순환이다.

글 꽁무니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짐짓 타이르듯이 쓰려 했건만, 그 처지를 다시 돌아보니, 넋두리에 구걸이 되었다. 그렇다. 뜻있는 작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구걸이라도 해야 할 참이다. 교회를 포기하는 분들, 혹은 반(反) 교회, 무(無) 교회를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 길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그 길의 방향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교회 안으로/안에서 서품받은 사람으로서 보수적인 교회주의자인지 모른다. 내 깐에는 이것도 중요한 하나의 길이라고 믿는다. 이 길에 걸어보겠다. 어리석은 판단이라 해서 혀를 찰 분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 생각을 바꿀 지언정,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넋두리에 섞인 구걸도 후회하지 않는다.

허튼 생각을 얼기설기 엮은 탓에 틈이 많다. 그 틈을 교회 안팎의 경계에서 서성이고 고민하는 이들이 메워주시라. 그 과정에서 비판을 달게 받겠다.

재의 수요일 (VI) – T. S. 엘리엇

February 16th, 2010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VI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희망하지 않더라도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흔들리느니
꿈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를 꿈처럼 교차하는 황혼은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내 비록 이를 바라노라 바라지 않더라도
바위 해안을 향해 난 넓은 창으로부터
하얀 돛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비상하느니,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그리고 추락한 마음은 뻣뻣해져서 기뻐하느니
떨어진 라일락 꽃과 잃어버린 바다의 목소리 안에서
그리고 나약한 영은 급히도 반항하느니
굽은 금 지팡이를 얻으려고, 그리고 잃어버린 바다 내음은
급히도 되찾으려 하느니
메추라기의 울음소리와 급선회하는 물새떼를
그리고 멀어 버린 눈이 만드나니
상아로 만든 문 사이의 빈 형상을
그리고 내음은 모래땅의 소금 냄새를 새롭게 하느니

이는 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긴장된 시간
세 개의 꿈이 교차하는 고독의 장소
푸른 바위 사이에서
그러나 주목(朱木)을 흔들고 나온 목소리가 흘러갈 때
다른 주목이 흔들리고 답하게 하라.

복된 누이여, 거룩한 어머니, 샘의 영, 정원의 영이여,
어리석은 우리가 스스로 조롱하지 않도록 하소서.
보살피고 보살피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
정지하여 앉아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이 바위들 사이에서마저
누이여, 어머니여,
강의 영이여, 바다의 영이여
내가 분열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울부짖음이 주님께 사무치게 하소서.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