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가까운 – [최승자]에 기댄 친구 생각

February 13th, 2010

1.
선의(善意)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최승자 시집을 받아들고는 단골 카페로 출근했다. 마감을 넘겨 바동거리는 일이 있는 터에, 달랑 시집 하나만 들고 나갈 수 없어서 읽어야 할 의무의 책들을 액세사리로 싸왔다. 거대한 주제의 영어 제목들에 정신이 잠시 흐릿해진다고 우선 변명을 삼았다. 뻐겨보자는 투로 오랜만에 시킨 카푸치노를 찍어 트윗하는 일로 호흡을 고르고, 시집을 들췄다. 이런 뻐김을 용납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내 어린 날에 대한 복수처럼. (내 의식은, 이 정도면 충분히 감상적이 되었다, 고 속삭인다.)

2.
“시간”이었다. 시인이 견딜 수 없는 것. 세월이었다. 그는 무의식에도 숨고, 병에도 핑계를 대보지만, 그가 맞닥뜨린 것은 흐르는 시간과, 얼마남지 않은 세월에 대한 원초적 ‘무의식’의 바동거림이었다. 이제 흐르는 시간을 쓸쓸하게 응시하는 일로, 세월은 지속하는 지루함의 일부분이라고 태연해할지라도, 그 몸부림은 선연했다. 아니라면, 내가 투사한 내 몸부림일 테다. 삶 뒤에는 삶이 있고, 죽음 뒤에는 죽음이 있다. 이는 종교인의 전매품이 아니다. 시간과 세월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가장 가녀리고 끈질긴 마지막 욕망이다. 종교가 그 보편성을 기대는 몸부림, 모든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는 지점.

3.
시가 베푸는 덕은, 생각의 너른 행간. 단절된 비약이 마련한 틈새로 끼어드는 잡념은 시인의 ‘시간’에 대한 응시와 더불어 쓸쓸해서 가까운 내 친구들 생각으로 데려간다. 허름했던 고교 시절의 자취방에 모여 점심은 후다닥 까먹고, 둘러 누워 서로 읽었던 최승자를 비롯한 다른 시인들. 지치면 들었던 성내운 교수의 시 낭송 불법 테이프. 흥이 나면 불렀던 프랑스 국가 “La Marseillaise.” 속이 ‘꾸리꾸리’하면 소화제로 듣던 나나무스꾸리. 그 사이에 늘 있었던 새파란 이십 수년 전의 얼굴들. 시의 행간을 뛸 적마다 내 잡념은 그 쓸쓸하게 가까운 그 얼굴들에 걸려 넘어졌다.

4.
이 고교 시절의 친구들은 오랫동안 내 삶에 헤집고 들어와 다른 이들을 거들떠보지 못하게 했다. ‘우리 지방’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친구는 문학이나 철학을 하고 싶어했지만, 가난 때문에 법대에 진학했다. 가난과 문학과 철학의 고민은 그를 한시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눈 많이 오던 날 아르바이트하던 학교 일터에 수배 중인 몸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주머니에 있던 삼천 원밖에 쥐여 주지 못했다. 최루탄에 한쪽 눈을 잃은 한 친구는 몸을 추스르다 도를 닦으러 떠났다. 몇 년 전 인도(India)에서 영양실조로 실려온 그를 얼마 후 다시 찾았을 때, 많이 괜찮아졌노라며 내 걱정을 위로했다.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마르크스주의 인권운동가로 내달음친 친구 하나는 귀농했다. 조직사건으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거물과 함께 체포되어 몇 년을 감방살이한 친구 하나는 사면 복권 후 지금은 시골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문학평론가를 꿈꾸던 한 친구는 갑자기 마음을 접고 공무원이 되었다가 이제는 회계사로 일한다. 선천병으로 늘 습기 어린 충혈된 눈으로 손을 꼭 잡고는 했던 친구는 자기 병에 관한 한 의학 전문가가 되어 출판사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대학 갈 일 없노라고 떼쓰듯 입대해서 백령도에서 3년 푹 고아져 돌아온 한 친구는 한국 최대 노조의 간부로 일한다. 반년이 멀다 하고 직장을 때려치우다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몇 년 버텨온 친구 하나는 곧 이직할 것이라고 밝혀온다. 같은 대학에 있었으면서도 경찰에 쫓기는 골목이나 뒤풀이 술판에서 만나곤 했던 한 친구는 유학 후 지금은 시골 어디에서 연구원으로 살아간다는 안부를 전한다. 시간을 무릅쓰고 그 쓸쓸해서 가까운 얼굴들이 내게 다가온다.

5.
내 친구들의 희망과 절망, 그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그들의 몸부림과 갈망은 내 것보다 더 깊고 넓고 치열했으며 도저했다. 내 하릴없는 시선과 몸뚱어리는 그 ‘사이’에서 늘 불안하게 왔다 갔다 했을 뿐이었다. “문턱에서 문턱으로, 경계에서 경계로.”

6.
늦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내 어머니와 설맞이 안부 전화를 했다. 베갯머리 이야기를 청하다가 지쳐 제가 도리어 이야기를 풀어놓던 딸 아이를 결국 재우나 싶더니, 등 뒤로 이상한 콧소리가 났다. 등을 두드리지 말 걸 그랬다. 무언가에 닿는 순간 모든 게 왈칵 한다, 우리는. 얼마 후 어두워 낮아지는 기온으로 구식 히터에 ‘퍼벅’하고 불이 붙자, 우리는 라면 두 봉지를 마늘 양파 듬뿍 넣고 끓여서, 후루룩후루룩 먹었다. 눈물 뒤에는 입맛이 당기는 법인가?

7.
죽음은 사람을 모은다. 지난 12월의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 슬픔의 한 가운데서 아내와 나는, 그 친구들이 반가워서 함께 웃고 떠들었다. 어느 친구에게 ‘너 군대 있을 때, 세상의 모든 단조의 음악을 다 듣고 싶다고 편지한 적 있었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다른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전화기 너머로 몇몇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사진도 두어 장 박고는 다시 아쉽게 작별 인사를 했다. 쓸쓸해서 너무나 가까운 친구들.

8.
시인은 더더욱 혼자가 된 것 같다. 역사는 여럿이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면, 죽음은 혼자서 맞아야 하니까. 그 와중에 시인은 시간의 무의식이 저 멀리까지 펼쳐질 수 있다는 먼 여유의 공간을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아직 시인보다 젊고, 아직 시인보다 건강하다. 그러니 내 몫은 쓸쓸해서 가까운 친구들과 이웃에게 눈을 돌릴 시간을 누리는 일이겠다. 아내와 그 친구들에게 축복을.

블로깅의 기쁨 – 소요유님에 답하여

February 10th, 2010

1.
블로깅에 대한 상념을 올리고 나서, 이상하게 오른쪽 어깨에 큰 통증이 왔다. 밤늦게 이메일을 열어보니, 그 상념에 트랙백된 글이 배달되어 있었다. 소요유님의 글 “블로깅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이라는 글이었다. 죽비로 시원하게 얻어맞는 듯했다. 물론 그 효과가 내 어깨의 통증을 없애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소요유님의 글에 대한 긴 댓글이다.

2.
죽비의 정체는 ‘기쁨’의 문제였다. 초심(初心)에 관한 일갈이었다. 처음에 품은 마음을 잊고, 몇몇 걸림돌에 예민해졌던 것이다. 사람살이 저마다에 감춰진 기쁨을 들춰내어 나누고 누리도록 부추기는 일은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마음을 보살피기 위해서 엄살 부리고 칭얼거릴 필요도 있지만, 그 본연의 기쁨과 그에 대한 희망이 그늘지도록 내버려 둬선 안된다. 얼마 전 누군가에게 ‘분노’하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짐짓 고상한 조언을 했던 일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죽비 한 대 얻어맞아 뻐적지근한 어깨가 풀리듯 블로깅의 목적을 다시 발견했으니. 소요유님께 감사의 합장.

기쁨의 큰 자리를 차지한 것은 새로운 인연이다. 게시판 형태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다, 블로그라는 도구를 발견하게 하고, 그 소통과 나눔의 의미를 가르쳐 준 지인들을 역시 블로그에서 만났다. 내 도량이 작고 내용이 부실한 지라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지 못했으나, 이를 헤아리면서도 함께 이야기 나눠 준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공교롭게 소요유님이 언급한 분 중에 두 분이 내게도 특별하다. 아거(gatorlog)님과 민노씨(minoci)이다. 그동안 감사의 표현을 적당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서, 특히 두 분께 깊은 감사의 합장.

3.
소요유님이 ‘독립형’ 블로그에 대한 생각을 나눴는데, 나도 덩달아 유감을 덧붙여 본다.

1) ‘독립형’ 블로그 – 내 블로그 역시 외국 웹호스팅을 사용한다. 다른 관련 인터넷 프로젝트 관리 문제도 있지만, 계정에 대한 자유를 누구에게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내 이야기가 검열에 걸릴 여지는 없겠으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 나마 항의의 표시는 되겠다 싶었다. 게다가 이메일도 한국의 서비스는 포털의 몇몇 카페/클럽 접속 말고는 전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리하고 있었지만, 지난 피디 수첩 사건 때 개인의 이메일을 열어젖히는 권력에 치가 떨렸다.

2) 한국의 포털 사이트 – 한국의 인터넷 포털에서 지원하는 여러 서비스 폐쇄성과 그 행태들 역시 용납하기 어렵다.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질적 수준을 가로막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 기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만족할 만한 검색 결과를 얻은 적이 없다. 포털의 폐쇄성에 큰 탓이 있다. 이미 누차 지적되었지만, 내 블로그 글들이나 관련 검색도 다른 사람들이 퍼다 놓은 블로그나 카페에서 먼저 검색된다. 이런 황당한 서비스를 하는 곳에 기회를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생각 있다는 블로거들이 이런 포털 서비스에 둥지 트는 일이 그 블로거들의 몇몇 주장과 일관되는가 하고 슬쩍 참견해 본다.

4.
다시 돌아가, 블로그 초심을 소요유님의 글에서 되새긴다. “블로깅을 통해 좀 더 자유로와져야 하고, 블로그로 인한 소통과 공감을 통해 좀 더 기쁨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심할 말이다. 기쁨을 누리도록 비는 격려가 더없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잠시 잊었으나, 나 역시 블로깅을 통해 숨은 기쁨이 크고 많았노라고, 대답해 드린다. 다만, 나는 누구를 “일깨울” 만한 사람은 아니니, 애초에 기대를 접으시는 게 좋겠다. 어떤 선한 이에게 트윗으로 ‘리플’한대로, 나는 그저 “적나라하게 명확하게 보이고 들리는 것들에 딴죽 걸고 희미하게 하고 의심하도록 대화하는 사람”일 뿐. 대화 상대로 여겨주시면 그걸로 넘치는 일이다.

5.
자칫 아래 상념이나 이 기이한 댓글 또한 소위 ‘인정 투쟁’으로 들릴까 저어한다. 그런 유치함이 발견되거들랑 한국식 말고 일본식 죽비로 후려쳐달라고 부탁한다.

블로깅 – 변명 어린 잡감

February 10th, 2010

1.
블로깅에 대해서는 지난 몇 달 동안 한 번도 개운한 마음이 없었다. 그리 성실하지 않은 블로깅이었으니 쉰다고 해도 티 나지 않은 것이었다. 민노씨 같은 이가 베푼 선의의 과대평가가 쑥스럽게 퍼지긴 했지만,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으니 애써 모른 체했다. 독자들이 읽어보면 뻔히 드러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운치 않았던 것은, 내 안에 작동하는 여러 검열 기제 때문이었다. 특히 성직자 신분이 노출되는 처지에서 하고픈 이야기와 주장에 스스로 제동이 걸렸다. 어떤 이들에게는 내 블로깅이 여전히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매우 위험한 이야기를 담아서 교회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짓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 검열의 압박에 굴복했다. 그 때문에 켕겼다.

2.
이런 내적인 검열을 강화하는 외적 요인도 있었다. 여러 통로로, 직간접적으로, 내 블로깅의 내용에 시비거는 일이 있었다. 아니 직접 블로그 안에서 토론이라도 했으면 했는데, 대체로 공격은 익명으로, 뒷구멍으로 와서 일격을 가했다. 마음의 상처를 애써 부인한다고 덮어질 일이 아니었다. 급속도로 보수화되고 있는, 아니 실제로는 그다지 진보적인 적이 없는 우리 교회(이 표현은 모두 ‘한국 성공회’를 가리킨다)에서 어느 사안 하나 차분하게 짚어보기 어려웠다. 어떤 이들은 필요할 때 내 블로그의 내용이나 논지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구별 짓기’위한 허울로도 사용했다. 종종 같은 이들이 다른 이들의 악평을 이용해서 핀잔하기도 했다. 마음이 쓰렸다.

3.
허튼일이나마 블로깅에 일말의 책임감을 가진 것은 두 부류의 독자들 때문이었다. 숨죽여서 가만 읽고 가는 우리 교회 내의 독자들, 그리고 몇 안 되지만 허튼소리를 새롭게 들어주는 우리 교회 밖의 독자들이다. 공개 블로깅이니 애초에 두 부류의 독자들을 늘 염두에 뒀다. 숨죽인 교회 내부의 독자들에게는 어떤 논의의 맥락과 언어를 실험적으로 제시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 그리고 외부의 독자들에게는 한 줌도 되지 않는데다 ‘성공회’가 무슨 ‘성공하는 모임’인지 ‘승공회’의 잘못된 발음인지도 구별할 수 없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계에서 이름자 홍보라도 하겠다는, 내 안의 기대가 있었다. 이런 이기적인 기대를 알아차리고 여러 방식으로 호응한 이들에게 감사한다.

4.
교회의 독자들을 생각할 때, 내가 저만치 앞장서 경계를 넓혀 놓으면, 다른 이들에게는 그만큼 여유로운 공간이 생기리라 여겼다. 그런데 뒤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보폭에 맞지 않게 앞서가는 이가 야속할 테다. 종종 주저 앉아버리거나, 뒤꽁무니만 바라보며 좇아오기에 바쁘다. 아직 나는 그 보폭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난처함을 되돌아 보되, 경계의 지경을 넓히는 일, 자기 보폭으로 부지런히 걷는 일, 풍경을 깊이 조망하며 관상하는 일, 섬세하고 자비로운 사목적 시선과 실천, 그 어느 하나를 그만둘 수도 늦출 수도 없는 일이라 다짐하고는 있다. 이 난처함을 넘으려면, 좀 더 많은 이가 자신의 독특한 은사를 식별하고, 다른 이들과 다양한 은사의 끈들을 이어 얽어야 한다. 쉬이 한사람이 다 해주길 바랄 수 없다. 이 지점이 막혀 있다. 불평을 그만두려면 자기 은사를 발견하고 보완할 사람을 벗으로 삼을 일이다. 그게 연대다. 내 작은 호소이다.

5.
외부의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물론 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너무 성공회라는 특정 전통에 대한 홍보가 과했다고 할 수 있다. 소수자인 교회 전통(한국에서는)에 대해 알리려는 동기가 컸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쓰는 내 마음이지만, 한국의 그리스도교계 전반이나 종교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도움은 주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다른 교회 전통(특히 한국 개신교의 주류)에 마음이 별로 가지 않는 탓이 크다. 한편, 이들에 대한 비판을 배경 삼아 우리 교회를 돋보이게 하려 했던 얄팍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곳곳에서 들켰다. 그런데도 선의로 발라내어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미안함과 감사함이 겹치는 와중에 우리 교회 외부의 독자(그리스도교 신자이든 아니든)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있다. 기회 닿으면 곧 쓰겠다.

6.
좀 쉬면 마음 정리가 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더더욱 게을러지고 감을 잃었다. 되든 말든 써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다만, 감정의 쓰레기를 공적인 공간에 퍼뜨리지나 않는지는 살피겠다. 이 말은 내 안에서 ‘이제부터 좀 더 열심히 블로깅하겠다는 거냐?’ ‘이제는 주제나 독자 눈치에서 좀 더 자유롭겠다는 것이냐?’ ‘이제 좀 과격하게 속내를 내보이겠다는 것?’ 등의 물음을 키운다. 모르겠다. 개운치 않은 마음을 살피려는 내 안의 보호장치가 작동해서인지, 그저 오늘 이 변명 어린 잡상이 떠올라, 두서없이 적어본 것이다.

늘 응원해 준 민노씨에게 이 글을 드린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