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서평: 디아메드 맥컬로흐, 그리스도교 역사: 그 첫 3천년

February 9th, 2010


Book Review: Diamaird MacCulloch, A History of Christianity: The First Three Thousand Years, 2009.

By Dr. Rowan Williams, Archbishop of Canterbury

이 책에 붙은 자극적인 부제목은 이 책이 한권의 교재를 넘어서리라는 걸 알려준다. 디어메드 맥클로흐는 많은 역작 가운데 하나인 이 책을 유대교 세계와 아울러 고전의 세계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교의 지적, 사회적 배경을 요약하면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앙이 놀랍고 새로운 응답을 제공했는 지를 보게 된다.

그리스-로마 종교는 황제 숭배(황제가 군사적인 독재자가 되어 피비린내나는 갈등 뒤에 계속 손을 대면서 더욱 이상해진)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했던 지방의 의식들과 신화들이 쉽지 않은 혼합을 이루게 되었다. 유대교 세계는 유대교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생생한 긴장으로 점철됐다. 이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져 온 것은 새롭게 열린 유대교의 정체성으로서, 어떤 특정한 국가적 장치에서도 독립된 인간의 정체성이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정치적인 충성심에 기대지 않고, 서로에게 소속된 어떤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상을 창조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재빠르게 정치적 힘을 이용하는 쪽으로 나갔고, 그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맥컬로흐는 회의적인 교회사가를 늘 유혹하는 쇠퇴와 타락이라는 구색만 맞춘 진술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리스도교적인 삶과 신앙의 기본 형태들이 구성된 지극히 다양한 방법들을 추적한다. 엄격한 역사가인 저자는 무성하게 피어나는 음모 이론 – 영지주의자, 막달레나 마리아, 템플 기사단과 같은 환상의 세계 – 를 말끔히 털어낸다. 그러나 저자는 과거 시대의 소수파나 분리파가 나름대로 깨인 근대인과 같았다는 요즘의 대중적인 가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자면, 원죄 문제로 어거스틴에 반대했던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그리 밝고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나온게 아니라, 인간의 경험의 빛과 어둠에 대해서 별 여지를 두지 않았던 극히 혹독한 도덕성에 기초한 것으로, 우리가 부르는 자유와는 질이 다른 것이었다.

맥컬로흐가 어거스틴을 다룬 부분은 이 책의 탁월함을 말해주는 한 예일 뿐이다. 저자는 공정하고, 놀랍도록 넓은 식견을 드러내지만, 무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다. 게다가 저자는 실제로 모든 영역에서 전문적인 문헌에 아주 정통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교의 동진 확장과 중앙 아시아 교회들의 비참한 역사에 관한 부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가 되지 않은 처지를 생각할 때,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하다. 그 밖에 뛰어난 부분이 여럿이다. 유럽 그리스도교의 선교(저자는 인도에서 그 정치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실행한 개신교의 선교적 노력은 “최대의 실패”라고 기술한다)가 이룬 성과와 한계를 다루는 부분,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러시아 제국 경계 지역에 있었던 개신교, 천주교, 정교회의,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 그리고 칼빈의 독보적인 유산, 즉 기존 제도의 부분적인 개혁이 아니라, 교황 교회를 옹호했던 이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성서적, 전통적인 자료에 기반하여 보편적(Catholic) 신앙을 새롭게 상상하려 했다고 저자가 평가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잃어버린 세계와, 반짝했다 사라진 가능성들에 대한 언급도 있다. 13세기 중국의 그리스도교 제국, 16세기 폴란드의 유니테리안 공국뿐만 아니라, 중앙 아메리카 이슬람 공화국(스페인에 대항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기 튜더 왕조와 모로코 사이에 마련된 협력안으로 단명으로 끝난 제안) 등이 그 예이다. 맥컬로흐는 지적이면서도 당연히 필연적으로 일어난 발전을 독자들이 볼 수 있도록 돕는 역사학자의 몫을 해내고 있다 (특히 이 점에서 교황제를 다룬 부분이 뛰어나다). 저자는 또 이렇게 상실된 가능성들이 필연이었었음을 명백히 한다. 그 사라진 이유는 교회 내의 갈등과 식민주의 그리스도교 권력의 개입이었다. 저자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용할 줄 알지만, 어떤 신학적인 제안도 없이 이에 집착하는 여느 역사가들과는 다르다.

세부적인 면에서 몇가지 실수는 피할 수 없는 법이다. 주교가 쓴 주교관(mitre)은 로마의 공적인 예복에서 나온 게 아니라, 중세 교황이 머리에 쓰던 것들을 변용한 것이다. 흑사병이란 명칭 자체는 언급한 때보다 몇 세기 후에 사용되었다. 또 어쩔 수 없이 몇가지 틈도 보인다. 폭군 이반 대제(Ivan the Terrible) 재임기에 관한 아주 훌륭한 설명 속에서도, 짜르의 포악함을 비판했다가 죽임을 당한 모스크바의 필립 총대주교에 대한 언급과, 흔히들 이야기하는 바와는 달리 동방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서 늘 무관심하지만은 않았던 여러 사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렘브란트를 최고의 개신교 성서 주석가라 말한다면, 저자의 방향에 좀더 머리를 끄덕일 만한 여지가 있을 뻔했다. 다시 말해, 단테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쉽다. 많지 않지만 상투적인 교재 냄새가 나는 부분도 있다. 맥컬로흐는 어거스틴과 아퀴나스가 말하는 “자기 충만한 신적 존재”와 프란시스 성인의 인격적인 하느님을 비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철학적이면서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면을 함께 추구하려고 했으며, 단테의 신곡 천국편은 상상력과 영성을 통하여 신앙의 이러한 면모들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 성공적인 성과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 분야의 획기적인 저작이다. 그 범위의 섭렵이 놀랍고, 읽기 쉽거니와, 물릴대로 물린 전문가에게는 통찰을,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에게는 해명을 제공할 것이다. 영어권에는 이에 맞설 만한 책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분명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풀려 나간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도 그리 광범위하지도 않은 시대와 문화 속에서, 이 책은 놀랍도록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활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중대한 증언이다. 그 첫 삼천년은 또한 마지막이 될 것 같지 않다.

저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Guardian, 23th September, 2009

번역 교정: 2009년 9월 24일 / 26일
위치: http://liturgy.skhcafe.org

[아바타]와 브룩스의 “메시아 콤플렉스”

January 11th, 2010

아거(gatorlog)님이 전문 번역한 뉴욕 타임즈 데이빗 브룩스의 [아바타]에 관한 글 “아바타와 메시아 콤플렉스”를 읽고 갑자기 부조리한 생각이 동하니 흐르는 대로 두드려 본다.

1.
영화 [아바타]는 ‘메시아 콤플렉스’의 영화일까? 그래서 어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영화’일까? 아니면 이런 비판은 영화사에 획기적인 사건을 그은 어떤 기술적 성과와 이미지의 풍요로운 혼성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비난일 뿐인가? 논쟁의 전선이 전자는 서구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읽기로, 후자는 엄청난 자본의 힘을 입은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의 발로로 분명히 그어지기만 한다면, 논쟁의 독자나 관람자는 정작 내용보다는 치고받는 흥미로운 싸움에만 관전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실 모든 일이 이렇게 간단했으면 싶다.

그런데 처지가 그렇지 않다. 미국의 어느 ‘세련된 보수 논객’과 한국의 어느 비판적 관람자의 비평이 한 쌍을 이루는 듯하고, 모든 일에 꽤 회의적이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듯한 어느 비판적 블로거들에게는 영화사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거나, 전자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이 과도한 일반화로 그 속내를 비추지 못했다는 반박이 나오는 처지에서 보면, 도대체 피아가 구분이 되지 않는 몹시 ‘포스트모던’한 양상이 되어 버린다.

2.
여느 전문가적인 논쟁에서 느끼듯, 이런 화려한 논쟁의 수사와는 멀리, 나는 그저, 슬픈 일을 당한 우리 가족을 위로한다며 그전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어떤 이가 [아바타] 관람권을 손수 마련해 건네 준 탓에, 한 저녁의 호사를 누렸을 뿐이다. 영화 [아바타]는 우리에게 ‘가족 영화’였다.

열한 살 난 아들 녀석은 곧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만화’ 판타지를 넘어서 실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모든 시각 효과에 압도되었다. 막 아홉 살이 된 딸 아이가 관람 후 대뜸 슬픈 영화로 단정 짓자, 둘은 입을 맞춘 듯 나비 족 공동체의 뿌리였던 멋진 나무가 폭격당해 무너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노라고 했다. 아내는 제이크와 나비 족 여인의 사랑과 그 배경의 아름다움이 선연한, 어찌 보면 전체적으로 사랑 영화로도 다가온다며 다소 엉뚱한 관람평을 내놓았다. 영화 막바지 제이크가 이끄는 전쟁 승리의 쾌감은 뒷전이었다. 영화를 잘못 보고 제임스 캐머런을 배반한 것인가?

내게도 역시 판에 박힌 영화의 줄거리보다는 현란한 수많은 이미지의 차용과 합성, 그리고 어떤 상상력에 따라 마련한 아름다운 배경이 눈을 즐겁게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가끔 선연하게 등장하는 종교적인 상징들과 이미지들, 그리고 의례(ritual)들이 눈에 들어 머리를 환기시키곤 했다. 그 가운데 영화 막바지 네이티리가 정신을 잃은 진짜 제이크를 안은 피에타(pieta) 이미지를 보고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 영화라 불러야 할까 하는 다소 ‘스놉'(snob)한 얕은 잔꾀를 생각해 내기도 했다.

다만, 영화를 본 뒤 트위터에 몇 마디 보탰다. 이런 것이었다.

인태(@tuesdaymoon)님이 가족 위로차 마련해 준 극장표로 [아바타] 감상. 현실에 떠다니는 온갖 이미지들을 총집합하여 현란하게 요리하고 있었는데, 종교적인 면에서는 ‘창조 질서’ ‘욕망’ ‘아름다움’ ‘구원’의 연관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바타] 신학적 반성과 되새김의 이미지들: 신(God)이 아닌 신성(deity)과 그 여성성, 창조(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닌 교감, 공동체(네트워크)를 통한 서품(ordination) 의식,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피에타(pieta) 등.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적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온갖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서로 모순되듯 교차하여, 뻔한 시나리오에 대한 판단을 교란하고 있었다. 줄거리나 시나리오가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들의 복잡한 운동이다. 이미지의 움직임은 시나리오를 뛰어넘는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수천억 원을 들여 빤한 ‘콤플렉스’ 영화를 만들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명백한 지루함, 혹은 발가벗은 메시지들은 시나리오를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3.
데이빗 브룩스의 글을 다시 읽는다. 이 세련되고 명석한 보수 논객은 분명하고도 영리한 덫을 놓는다. 제목부터가 “메시아 콤플렉스”. 사람들은 ‘메시아’ 표상에 혹하겠으나, 그의 방점은 ‘콤플렉스’에 있다. 게다가 그는 이 영화를 ‘우화’로 단정해 버린다. 영화가 내포할 수 있거나 해석될 수 있는 현실성을 저만큼 비켜나가게 하고 저열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는 뻔하다며 볼멘소리하던 그 줄거리를 주구장창 스포일러를 감내하며 풀어놓는다. 그것도 이리저리 비꼬는 투로. 마지막에 이런 논점이 불편할 정도로 공격적이라고 묻는 그는 교활하다. “미국 군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구경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실은 자신이 불편한 것이다. 대답을 위한 가정은 이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고, 여기에 독자들은 걸려 들어, 짐짓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하고 나선 것은 아닌가 하고 헷갈려 하기 시작한다. ‘이 보수 논객, 웬만한 진보 논객보다 관점 좋고 훨씬 날카롭잖아?’ 이럴 만하다.

세상 아래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캐머런 감독이 개과천선하여 자본주의를 뒤엎자는 혁명을 할 사람도 아니요, 그걸 기대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가 우화라 할지라도, 그 우화에서도 우화를 넘어서 배울 수는 있는 법이다. 게다가 온갖 이미지의 운동 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여러 모순은 시나리오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수많은 모순의 경계 안에서, 독자/관람자는 자신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해석을 다양하게 펼쳐 나갈 것이다. 그 수용과 해석의 다양성과 폭이 넓은 만큼 그 영화는 문제작, 나아가 좋은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더 많은 여지를 얻을 것이다.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브룩스가 이 영화에 대고 이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다. 오바마의 대선 수락 연설을 비꼬아 중계하던 브룩스는 언젠가 부시(G.W.Bush)에 대한 심기 복잡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이번 아바타 평과 제목이 비슷하다. 이른바 “부시 역설”(The Bush Paradox). 이 글에서 그는 부시의 장단점을 균형 있게 지적하는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약점들이 어떻게 그의 이라크 전쟁 전략에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를 설명하려 든다. “인생은 복잡한 거야.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이유는 한 쪽이 언제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이지. 정말 위험한 사람은 분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야”라며, 부시가 아니라 독자들을 타일렀다. 실은 그 글이야말로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가 되고, 이 영화평이야말로 “아바타의 메시아 역설”이라고 했어야 정직한 것이었다. ‘복잡한 인생’과 ‘명백한 사실’ 운운은 실은 자신에게 돌려야 할 말이었다. 허위 정보에 입각한 부시의 이라크 전쟁이야말로 비뚤어진 ‘메시아 콤플렉스’였고, 아바타는 ‘군산복합체’와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서도 ‘부시의 메시아 콤플렉스’를 다룬 적이 없다. 그런 그의 말들이 낯 간지럽다.

그나저나 ‘콤플렉스’를 겪는 이는 브룩스 자신이 아닐까? 그는 제 주장과 비판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어디에는 갖다 붙일 수 있는 ‘전능하고 보편적인 신의 컴플렉스’를 가졌는지 모른다. 오지랖 넓은 그 보편성은 매혹적인 비판점을 아우르는 듯하지만, 그 밑으로 감추는 것들이 많다. 대체로 많은 보수주의자에게서 보이는 이 버릇과 복합감정은 종종 근본주의자들과 근사치를 이루는 일이 빈번하다. 부시와 빈 라덴의 사례처럼. 자기 말고는 다른 메시아의 등장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아 예수를 죽였던, 그 어떤 무리처럼. 한사코 자신이 인정하는 메시아가 아니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마침내 ‘선택된 민족’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버린 시온주의자들처럼.

4.
영화를 두고 두어 마디 트위터에 적은 며칠 후, 전투적 여성 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죽음 소식을 접했다. 그를 되새기며 그의 책 어느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 그가 최전방까지 밀고 가 마련한 신학적 비판과 상상력의 경계와 공간 때문에, 여전히 마초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같은 이마저 얼마나 너른 자유의 숨을 쉬었던가!

그러더니 다시 영화 아바타의 모순된 이미지들의 향연이 떠올랐다. 다시 트윗팅.

이미지들의 복합체인 영화 아바타의 궤도를 교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역시 메리 데일리 같은 이들이 제안하는, 잊혀진 전통의 복원을 통한 상상력과 (남성적) 지배의 의미 구조와 역사에 대한 급진적(근본적) 비판과 반성이겠다.

중첩된 이미지들과 오염된(순수는 환상이니까) 이야기들이 겹친 시나리오는 언제나 ‘제멋대로’ 해석을 열어둔다. 그 해석의 다양성은 좋은 작품임을 드러내지만, 종종 그 중첩과 오염 속에서 그 비판적 의미의 궤도를 잃기 때문이다.

비판과 반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지 않는 것이었으면 한다.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렸다.”

(허튼 글이지만, 우리 식구를 위로하려고 영화표를 마련해 준 김인태(@tuesdaymoon)님의 따뜻한 마음에 드린다.)

신앙인, 그 낯선 이방인

December 27th, 2009

갑작스레 당한 집안의 슬픈 일로 잠시 한국에 방문했다. 혼자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은 아내와 함께 돌아오려다 일정에 차질이 생겨 잠시 더 머물렀다. 그 틈에 분당 교회임종호 신부님께서 설교와 강연을 요청하셔서, 상중이었으나 오랜 우의로 받아들여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후에 잠시 임신부님과도 나누었듯이, 낯선 형식에 낯선 내용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의 내 설교와는 달리 꽤 길어서 청중을 지루하게 했다. 내 여러 처지에서 비롯한 마음의 불안이 드러난 탓이었다. 그 불안하게 떠도는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죽비 맞고 싶은 생각에, 설교문 전체를 올려놓는다.

성공회 분당 교회
성탄 첫 주일 (2009년 12월 27일)
1사무 2:18-20,26 / 시편 148 / 골로 3:12-17 / 루가 2:41-5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

어머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에 급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채 도착하기 전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셔서 그 슬픔이 더 컸습니다. 이런 슬픔 탓인지, 마음에 휑한 구멍이 난 탓인지, 지난 며칠 동안 우리 사회가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이 조금씩 멀리 느껴졌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사회, 특별히 도시의 삶이 그토록 빨리 변했던 탓이겠고, 저와 제 가족의 마음 상태도 그전과 달라진 탓이라 생각합니다.

틈이 나서 다른 가족을 만나러 고향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여러 곳도 많이 변해 있더군요. 혼자, 혹은 가족과 거닐고 생각하기에 좋았던 절집에 다시 가보았더니 그마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열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많이 달랐습니다. 늘 보아 왔던 어떤 집이 기차길 옆에 있었습니다. 작은 언덕을 등지고 대 숲을 뒤안으로 삼은 아름답던 집이었는데, 이제는 섬처럼 남아, 외곽으로 확장되는 아파트의 파도에 막 삼켜질 찰나였습니다.

객관적인 삶의 변화 때문이든, 제 심경의 변화 때문이든, 저는 어떤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래서인지 제가 이 사회에 속해 있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딘가에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당연히 이 느낌은 저 자신을 불안하게 하더군요. 환영받지 못할 것 같은,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습니다.

한편, 이런 낯선 거리감을 응시하다 보니, 제게 또 다른 시선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두거나, 바깥에서 보니 사물의 다른 면이 보입니다. 보는 각도 정도가 아니라, 위치와 처지가 달라져서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이 다른 시선은 신앙인의 처지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어 가곤 합니다. 신(神)은 없다고 외치는 시대에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 그 하느님이 살과 뼈를 가진 아기가 되어 한없이 낮게 왔다고 믿는 이 기괴한 종교를 가진 신앙인의 어떤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 신앙인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그렇지 않다고 보는 낯설고 기괴한 사람입니다. 종교, 혹은 신앙이 이 세상과 사회와는 조금은 다르게 낯설고, 거리가 있지 않다면 이를 종교라고 부르기 참 어렵습니다. 성탄을 통한 성육신 사건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 사건 자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기괴한 사건으로 남습니다. 세상 끝날에 이르러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하기까지 이 낯선 거리감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찌 보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리와 경계가 깨지는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것들을 낯설게 보도록 하는 또 다른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성탄을 통하여 솜 결보다 부드러운 아기 예수의 친밀함과 따스함을 느껴야 하는 마당에, 거듭해서 낯선 거리감을 말하는 일은 참으로 민망하고 불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낯선 거리감과 불편함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어떤 중요한 물줄기를 마련해 왔습니다. 좀 잘난 체 하는 말로, 그것은 어떤 사태를 해석하고 바라보는 ‘해석학적인 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개인에게 내내 뽀송뽀송한 편안함과 위안의 말만 건네는 성서 풀이나 어떤 안락한 경험이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역사 이야기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참 종교를 식별하는 기준과 방법을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지난 20세기 서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으로 거론되는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이비 종교와 유사 종교, 그리고 참 종교를 구분하여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는 종교적인 언어와 모양새, 교리 체계, 신앙 행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이비 종교는 그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만을 축복합니다. 좀 더 깊이 보면, 사람이 가진 어떤 욕망과 심지어는 욕심을 배불리는 일에 봉사합니다. 종내에 이 사이비 종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축복, 자기 가족 혹은 자기 공동체의 번영을 꾀하는데 몰두합니다. 나보다 큰 것, 어떤 초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해도 실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화려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여러 종교가 이런 사이비 종교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는 자기와 같은 전략을 갖지 않으면 망하리라는 생각을 협박처럼 퍼뜨립니다.

한편, 유사 종교는 종교의 형태를 보이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용어나 예배 같은 것이 명확히 보이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가 자기 자신의 복지와 축복에 집중한다면, 유사 종교는 좀 더 넓고 보편적인 것을 지향합니다.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예입니다. 좀 더 보편적인 인간성, 인류애, 아니면 사회의 체제 등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사회 전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어떤 가치를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사이비 종교보다 이런 유사 종교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이념, 윤리적 이념이 차라리 낫다고들 합니다. 사이비 종교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설득력 있는 말입니다. 무신론이 득세하는 이유는 어떤 비판적인 이념의 확장 때문이 아니라, 실은 사이비 종교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참 종교는 그 형태와 논리가 복잡합니다. 그래서 쉽게 간파하기도 발을 들이기도 어렵습니다. 특정한 종교적인 언어나 신앙의 형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의 축복과 어떤 집단적인 가치의 실현을 생각하면서도, 그 가치를 넘어서는 더 큰 어떤 것에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것, 자기 집단보다 더 큰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바로 참 종교의 태도라고 합니다. 이 개방성이 바로 자신과 어떤 집단을 초월한 하느님을 향한 비전과 상상력입니다. 참 종교는 모든 바른 것이 자기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 너머인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초월’이라고 합니다.

초월에 참 종교의 길목이 있습니다. 이 초월을 향한 열림의 길로 들어서려면, 세상의 편하고 낯익은 것들과 결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고, 이 세상과는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 초월이 열립니다. ‘이곳’에 근거하여 축복을 끌어들여 만족하는 이들은 사이비 종교의 신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 종교나 교회를 어떤 특정 이념에 다른 사회 변혁의 근거지로 만들려 하면 유사 종교의 활동가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참 종교인은 ‘이곳’이 불편하고 낯설고, ‘이곳’과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여러모로 매우 낯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성장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다른 외경 말고는 낯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오늘 본문만이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도 매우 이상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번 주일을 성 가정 주일이라고 칭하며 축하했습니다. 성탄 첫 주일에 그럴 듯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의 이야기는 그 설정을 배반하는 듯합니다. 무슨 성 가정의 부모가 자기 아들 챙겼는지도 모르고 하루나 여행하고 나서 그 사실을 알아차립니까? 아니 무슨 아들이, 자식을 잃어버려서 애간장이 탔을 어머니의 염려에 뭘 모르는 소리 말라고 오히려 타박을 합니까? 이게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성 가정의 실체일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님의 삶을 좀 낯설게 보라는 초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조금은 낯설게 보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시각에서 무엇을 당연하게만 듣지 말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면 어떤 도전을 들으라는 말이 아닐까요?

3.

신앙은 이러한 도전에 대한 개방성입니다. 그 열림 속에서 새로운 비전을 보고 상상력을 키워나가라는 초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떤 특정 교리를 따르고 지키는 것만으로 해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신앙의 몇 가지 비전과 도전을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은 예수께서 일으키신 운동에 대한 믿음이요, 이를 따르는 행동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특히 복음서를 읽을 때, 눈여겨보면 좋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움직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움직임에서 전체를 비추는 어떤 실마리가 드러나곤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서 지키기로 되어 있는 명절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세상의 공간을 떠나 거룩한 공간인 성전으로 이동하는 운동입니다. 이 성과 속 사이의 지속적인 반복 운동은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원형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상을 떠나 적어도 매주에 한번 성찬례를 드리러 구별된 공간에 모이는 탓은 이러한 예수의 운동을 따르려는 중대한 훈련입니다.

다만, 하나 더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운동은 금세 매너리즘에 빠지곤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얼른 정해진 일을 치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에 바빴습니다. 아들을 챙겼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영화 ‘나홀로 집에’서나 보일 법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열두 살 난 예수님의 대응은 달랐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성전에서 기도하고 율법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종교와 신앙의 일이 자명한 대답을 건네주는 것이라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자명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숙지한다고 모든 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포되는 성서의 말씀과 그 해석, 그리고 성찬례의 신비에 대한 경험과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으며, 그 안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을 붙잡고 늘어질 때, 신앙의 발돋움이 있습니다. 바로 소년 예수가 보여주는 신앙 성장의 한 정점입니다. 여러 궁금증과 더불어 질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는 신앙생활의 운동은 정지하고 맙니다.

어느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자명하게 주어진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시다. 교회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한 교회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교회에 대한 비난과 그 생명력에 대한 비관이 넘쳐나는 이유는 하느님을 질문 속에서 찾기보다는, 자명한 대답을 주려 하거나 강요하고, 여러 질문과 씨름하지 않으려는 탓이 아닐까요?

둘째, 신앙은 균형 있는 긴장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이의 조화입니다.

균형 있는 긴장을 말하기는 쉬워도,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은 이러한 긴장감을 몸으로 훈련하는 사람입니다. 이 긴장이 주는 조화를 세상 속에서 만들어가는 낯선 사람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오해받거나 욕먹기 쉬운 일은 갈등하는 두 사람을 중재하는 일입니다. 입장을 선택해서 주장하는 일은 쉬어도, 서로 다른 입장 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기란 쉽지 않습니다. 화해를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그 낯설고 힘든 화해의 여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그 희생의 대가가 너무나 아프고 컸습니다. 그럼에도, 분열된 것들을 화해시키고 조화롭게 하기 노력은 우리 신앙인이 받은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막바지에는 소년 예수의 성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나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우리 사회는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요? 몸을 극단으로 훈련하는 스포츠가 있는가 하면, 머리 사용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놀라운 입시 지옥의 교육 현실이 있습니다. 몸을 가볍고 날씬하게 만들고, 예쁘게 고치는 일에 놀라운 투자를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국민 월평균 독서량은 한 권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례와 예배 생활은 애초에 몸과 머리가 함께하는 일이지만, 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좋은 ‘말씀’만 머리에 차곡차곡 쌓고, 내 몸의 실천은 나 몰라라 합니다. 몸과 지혜가 함께 자라나지 않습니다.

한편, 하느님께만 잘 보이면 되고, 이웃은 나 몰라라 하는 일이 이제 한국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상실된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이웃’의 총애를 받는 소년 예수의 성장이 드러내려는 복음의 가치가 보이질 않습니다.

바울로 성인께서는 오늘 서신 본문에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덕목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에서는 그저 말 뿐입니다.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실천을 말하고, 감사의 생활을 입에 달고 살지만, 우리의 몸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라는 권고 있지만, 절대로 가르침을 받거나 충고를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강남의 어느 교회가 교회당 건축에 2천억을 들이는 동안에, 국가 예산 절감 이유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사회를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로 서신의 원문에는 “옷을 입어라” “옷을 벗어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뒤덮은 몸과 머리의 불균형을 벗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의 분리라는 우리 신앙의 분열증을 벗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동정과 친절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옷을 입어라”하는 권고를 듣습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이른바 ‘신상’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에 균형 잡히고 긴장감 있는 복음의 가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신앙적 결단과 실천 속에서 우리는 세상 속에서 낯선 사람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되, 비판적인 거리 두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사이비 종교인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한 사람들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유사 종교를 넘어서서, 참 종교의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낯선 거리두기의 시선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서 낯선 사람들이기를 자처해야 합니다.

4.

우리 인생에는 모든 익숙한 것들이 낯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슬픔과 실패와 배신의 고통이 우리를 뒤덮어, 이 세상이 낯설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 이러한 낯설어짐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림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성육신 사건은 우리의 상식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이미 떠나간 우리의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자녀과 함께 하는 ‘성인들의 친교’는 이 세상이 주는 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기괴한 신비 사건들을 믿으며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하느님 나라 백성만이 누리는 희망과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모인 낯선 이방인 여러분, 하느님의 집 안에서 머물러 질문하고 대화하기를 즐깁시다. 집으로 향하는 길과 예배의 공동체로 향하는 길의 반복된 긴장과 균형 속에서 여러분의 몸과 지혜를 날로 키워나갑시다. 하느님께서 주신 놀라운 지혜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신앙의 실천이라는 몸을 단련합시다. 복음의 가치 속에서 피차 낯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내는 초월의 공동체를 경험하고 이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합시다. 그 즐김과 키움과 단련과 분투 속에서,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역설의 사건, 임마누엘의 신비를 높이 찬양합시다. 오늘 시편의 가수와 함께 그 신비를 목청껏 노래합시다.

“이제 당신 백성의 영광을 드높여주시니,
당신을 가까이 모신 이 백성,
당신을 믿는 모든 신도들에게 자랑이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