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성령 강림, 람베스 회의
May 16th, 2008세계성공회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을 만한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가 올 여름에 열린다. 이 회의가 이미 벌어지는 교회의 분열을 멈출 수 있을까? 성공회 계약(the Anglican Covenant)은 그 분열의 치유책이 될까?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을 둘러싼 논쟁이, 세계의 가난과 질병, 불의와 같은 산적한 주요 선교 과제를 부차적으로 만들고 있는 처지이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일치는 세계를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교 사명(창조-구원-자유)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수구파들이 벌인 람베스 회의 보이코트는 성공적이지 못한 듯하다. 그게 안되니까 여기저기서 불참을 선언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이들에게 대화를 바라기는 힘들다. 그런 와중에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령강림 축일을 기하여 세계 성공회에 서신을 보냈다. 람베스 회의의 목적을 성령께서 주시는 불과 은총에 마음을 열고, 성령에 대한 식별 속에서 선교 사명을 다하자는 것이다.
거칠게 번역한 서신 전문을 싣는다. 함께 기도해 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세계 성공회 주교들에게 전하는 캔터베리 대주교 성령강림일 서신
성령강림 축일은 성령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뤄진 놀라운 일들을 우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세상 전체에 알릴 수 있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이는 람베스 회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면서 하느님께 그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어, 그 은총을 입고 그분의 이름으로 용감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구하기에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미 저는 이번 람베스 회의가 예전과는 다른 모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서구식의 의회 토론식 모임에 대해서 어려움을 표명한 분들의 목소리에 조심스레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의 준비 모임은 새로운 방식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선물을 받았던 성령 강림 사건을 좀더 반영한 방식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핵심은 “인다바”(indaba)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인다바는 아프리카 줄루 족의 말인데, 서로 평등한 가운데서 토론한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어떤 결정문을 타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따라야 할 하느님의 길을 구하기 전에, 어떤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서, 진정한 도전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다른 여러 문화권에서 그 상응한 예를 발견하거니와, 베네딕트 수도자들이나 퀘이커의 모임에서 모두 함께 하느님께 귀울이면서 이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사랑의 사귐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서로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회의 기간 매일 우리는 사려깊은 조정과 준비를 통하여 모든 목소리들(또한 모든 언어들!)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함께 하는 두 주간 동안 이 모임들을 통하여, 세계 성공회 안에서 서로에게 반목해야만 했던 벽들을 무너뜨리는데 도움이 되는 어떤 신뢰의 수준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집중적인 기도와 작은 성서 연구 모임을 결합하여,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가 할 일에 대한 좀더 선명한 전망과 식별을 가져 올 것입니다.
지난 대림절기 서신에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대로, 이를 위해서는 람베스 회의에 참석하는 분들이 윈저 보고서와 성공회 계약 과정이 계획하는 좀더 친밀한 일치를 향하여 기꺼이 온전히 참여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자신만의 어떤 제안이나,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지역적 우선성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여 본 분들은 알겠지만, 분열적이고 논란이 되는 행동이 있는 상황 속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몇몇 주교들과 공동의 전망과 과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논의했습니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양떼를 보살피는 사목자로서, 우리는 어떤 낮은 단계의 합의를 찾으려거나, 서로 정중하게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한 동의를 구하자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성령의 불을 구합니다. 그 불은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 제공된 하느님의 은총을 신실하게 선포하기 위하여 서로를 위하여, 서로에게 책임있게 행동하고, 그리고 하느님께는 책임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더해 줍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길은 고통스러울는지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이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즉 가난과 폭력과 불의로 각인된 세계에 도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 드러날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잠재력은 매우 큽니다. 우리가 관심하는 바는 우리 세계성공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려는 것이고, 모든 주교들이 선교에 좀더 효과적으로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영원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길 안에서 우리를 묶어 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이신 성령만이 우리에게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말씀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불어 기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이러한 열매의 가능성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람베스 회의를 준비한 사람들은 함께 일하면서 이러한 성령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한가지, 우리를 위해 계획한 것들을 통해 우리의 사귐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쇄신과 기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회의는 갈망이 가득한 사건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갈망입니다. 람베스 회의의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갈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와 그 성령의 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쇄신하고 부흥하는 것 뿐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날마다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http://viamedia.or.kr
원문: http://www.aco.org/acns/news.cfm/2008/5/13/ACNS4403
일자: 2008년 5월 13일 (번역: 2008년 5월 16일)
마음 속 어둠: 보수와 진보 사이
May 13th, 2008자기 성찰 없이는 한발짝도 못 나간다. 어떤 사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도 개입과 거리두기가 동시에 필요하다. 특히 신앙적인 반성은 자기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는 일이다. 공부나 논리나 체험이나 연륜이 딸려서 걸려 넘어지는게 아니다. 사회든 교회든 간에, 개혁 혹은 변화를 외치고 이를 끌고 가는 동인의 내막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일이다. 그 짐짓 심각한 의논과 표정과 “으싸, 으싸”하는 움직임 안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의 어둠을 덮어버린다면, 그건 변화가 아니라 곧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김치수는 탁월하게 그 식별의 기준을 제공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진다.
[via 김현 via 민노씨]
덧붙임: 돌아보니 이미 한 말이로구나. 다른 맥락에 언급한 것인데, 이 자리가 더 어울리겠다.
좋은 진보와 나쁜 보수라는 틀은 식상할 뿐만 아니라 바르지도 않다. 그건 경험해 봐서 다들 안다. 게다가 좀더 들여다 보면 “좋다-나쁘다”는 가치의 형용사를 자신있게 붙일만한 인간이 많지 않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신앙 전통에 기대어 인간을 종교적으로 폄하하자는 건가? 아니다. 이건 평등의 원리에 대한 종교적 인식이고 표현이다. 각설하고, 좀더 느슨하게 “태도”로 표현하는게 더 수월하고 살갗에도 더 가깝겠다. 다시 말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는 것이다. 혼자 살지 않는 바에야 소통하고 관계해야 할 터, “열림”과 “닫힘”을 좀더 도드라지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닫힌 진보”(실은 진보로 자처하는)보다 “열린 보수”(실은 사람이 다 보수적이 아닌가?)에 더 미래가 있다.
이를 이어 가자면 “자기반성과 성찰”의 여부가 그 밑에 있다. 성찰(reflection)과 자기애(narcissism)는 한끝 차이다. 성찰없는 비판은 비난, 공격, 중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목소리 크고 좋은 말들을 한껏 쓸어다 동원하는 바람에 다른 성실한 비판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종교적인 성찰은 이런 말뿐인 공허한 수사학적 비판들에 인간의 하릴없는 어떤 속내 혹은 욕망이 작용하는가, 혹은 왜 거기에 쉽게 굴복하고 마는가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 혹은 종교는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나 광신의 상태와 쉽게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자) 혹은 무한(자) 앞에 서서 한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 혹은 무한(자)인 척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비춰보고(반성)하고 딴지(비판)를 걸어보는 마음가짐이요 행동이다.
http://viamedia.or.kr/2008/02/05/1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