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위로와 도전 사이에서

May 12th, 2008

아무리 시급한 걱정거리라 해도, 아무리 친형보다 가까운 신부님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객지에서 만난 분을 붙잡아 두고 따져 묻고 비판을 하는 일은 성급하거나 철 없는 일이었다. 그리 행동했기에 일말의 후회가 밀려오고, 잠시나마 함께 말없이 바닷 바람 쐰 것으로 무마하고 싶은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렇다. 우리가 속한 작은 것 안에서는 아웅다웅하다가도, 자연이 주는 신비 앞에서는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곤 한다.)

그분을 보내드린 뒤, 여러 생각과 함께 돌고 돌아서 다다른 생각의 편린은 종교의 근본적인 행동적 기능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양태에 관한 성찰들이었다.

종교의 “기능”에만 집중해서 깊이 내려가면 두 가지 근본적이며 대립적인 면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곧 “위로”와 “도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를 “사제적 기능”과 “예언자적 기능”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두 관계의 긴장 혹은 균형이 무너질 때 종교는 한쪽으로는 사이비 종교 집단, 다른 한쪽으로는 사회의 한 운동 단체가 된다. 이럴 바에는 종교에 참여하기 보다는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봉헌하거나, 시민 운동 단체에 기부하는 일이 “실용과 효과” 면에서 훨씬 낫다.

종교가 사회에 대한 통합적 기능을 상실한 “근대” 이후, 종교는 그 여러 기능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킨 분야들에 기득권을 내줘야 했다. 여전히 종교가 필요한가? “그래도 그렇다”고 당연한 말로 대답하기 전에, 그 근본적인 “위로”와 “도전”의 긴장감이 어떻게 작동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겠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이야기를 넘어서야 한다. 이는 자기 변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은 종교가 사회와 정치에 도전할 때, 영적인 책무와 ‘위로’를 꺼내들어 맞불 놓는 일로 드러나고, 반대로 어떤 이들을 향한 위로를 말할라 치면, 교회 안에서는 전통 교리에 입각한 심판으로 도전하고, 행동하는 사회 운동 진영에서는 “종교는 아편이다”는 해묵은 명제로 종교 자체에 도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참에 그 사이에 선 선한 사람들의 자리는 좁아진다. (그래,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성직자든 신자든 이런 자기 변명에 스스로를 적절히 적응시켜 살아가는 일이 편만하다. 적절하게 눈 뜨고 눈 감거나, 짐짓 모르는 체 사팔뜨기가 되기로 작정한다. (신자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성직자의 잘못은 신자들 탓이 아니지만, 신자들의 잘못은 성직자들 탓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변명을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른 것들은 뒤로 미루고, ‘위로’와 ‘도전’을 적용하는 기준 설정이 최우선이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이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적용될 보편적인 말이 아니다. 최소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이 말들 앞에 있는 어떤 수식어들을 늘 염두했다. 그 제한적 수식어들이 사라지는 과정과 교회 권력의 보편화는 같이 갔다. (모든 일반화와 보편화는 항상 위험하다! 그 안에서 어떤 작은 목소리들이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 잊혀졌던 수식어들을 성서와 복음에 비추어 되살려 본다면, “약한 이들과 함께 하는 위로”와,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위로과 보살핌은 약한 이들이에게 우선적으로 가고, 도전과 비판은 힘 있는 자들을 먼저 향한다. 물론 그 약함과 힘 있음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해 모든 약한 것이 다 위로의 대상이 아니요, 모든 힘 있는 것들이 도전의 대상도 아니다. 어떻게 약하고, 어떻게 힘 있는지를 따져서 그리 한다. 여전히 식별의 문제이다.

궁한 백성의 배고픔과 아우성은 위로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이기적인 욕망까지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군중의 이름으로 누구를 십자가의 못박는, 하나된 욕망의 분출이 되면 그것은 비판과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 한편, 돈의 힘이든, 권력의 힘이든 힘 있는 자들이 행하는 그 억압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도전해야 하지만, 그 힘의 구조 안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개입하여 자유롭지 못한 약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위로와 보살핌도 함께 가야 한다([대장금] 정상궁의 대사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여기서 여전히 유효한 식별의 기준은 영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약함과 권력에 관한 것이다.

교회와 성직자가 이 식별에서 엇나갈 때, 본의든 아니든, 그 적용은 전혀 반대의 행동을 낳는 일이 빈번하다. 사실 계급 의식 혹은 의식화 같은 거창한 말의 본연은 자기 성찰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결과는 작으나마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자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고 영성 수련하고, 때마다 예배에 참여하고, 말씀 읽고 듣는게 아닌가? 그러자고 신학하고 대화하는 것 아닌가?

우리 성공회 안을 들여다 볼까? 치부 자체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른체 하거나,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아, 여기서 그만 두고, 몇 사람의 글을 인용하여 마친다.

성공회 신자로 자랐다가 종교보다는 도덕론이 낫다고 생각했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기도가 쉽기때문에 사람들은 대체로 기도를 선택한다.

마틴 루터 킹은 좀더 신랄했다.

인간의 영혼에 관여한다고 고백하는 어떤 종교가 그 인간들을 내치는 빈곤과, 그들을 목 죄는 경제적 조건과,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메마른 먼지 같은 종교일 뿐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떠오르는 정상궁([대장금])의 마지막 부탁

그러나 어릴 적 내가 본 화려한 궁은 허상이었어.

늘 사람이 바글거렸지만 궁(宮)은 외로웠다.

모두들 아마도 그 외로움에 지쳐 그렇게들 시기와 질투가 있었을 게야.

외로움에 지쳐 승은이라도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아등바등 했을 테고..
외로움에 지쳐 부(富)라도 얻어야 겠으니 남에게 빌 붙었을테고
외로움에 지쳐 권력이라도 얻어야 겠으니.. 권모술수라도 써야했겠지..

어여삐 여기거라. 불쌍히 여겨…

네가 네 원칙을 지키고싶은 것만큼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그러지 않으면 네 단호함이 사람들에게는 무섭고 낮설 게만 느껴질게다.

쉽지않지! 단호하게 하는 것과 융통성 있게 하는 것!

하지만 너는 할 수 있다.
조금만 여유를 가져!
그게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마지막 말이다.

교회와 구원: 성사적 원칙과 성공회 전통

May 8th, 2008

그동안 몇몇 신부님과 대화하는 참에 사목적 경험에서 나온 신학적 관심들은 결국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나눴다. 그렇다. 전통적인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교회 분열까지 야기하는 최근의 신학적 논란들도 실은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한 변주인 경우가 많다.

역사적 경험과 신학적 자료를 통해서 좀더 너른 성공회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 온 폴 에이비스(Paul Avis)는 Anglicanism and Christian Church 개정 증보판(2002)을 거의 새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교회와 구원”이라는 장을 새로 섰다.

에이비스에 따르면,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의 생각에서 어떤 통일된 이념을 잡아내기는 어렵겠지만, 거칠게 나마 교회와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잡아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한다.

  •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이 구원과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드러나는 근본적인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는 원칙이다.
  • 이 새로운 삶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사회, 즉 교회 안에 자리한다.
  • 교회의 삶 속에서 성사적 원칙(the sacramental principle)이 중심이 된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세상 전체를 위한, 특별히 사회적 문제들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몸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이끌어 낸다.
  •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는 우주(cosmos)의 구원을 향한 희망을 동반한다.
  • 이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은 하느님의 전망에 담겨진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리킨다.

상세한 개념풀이가 필요해서 이를 당대의 신학자들과 대화하며 설명하는 것이 그 새로운 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생각을 진척시켜 나가 볼까? 이 특징들은 서구적 근대 신학과 성공회 전통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 안에서 두루 확인되는 것들인데다, 또 현대 신학의 몇몇 흐름에 대해 매우 고전적인 도전을 담고 있으니 깊이 살펴보기에 적절한 것들이다.

위의 특징들은 에큐메니칼 신학 대화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교회와 세상 안에서 성사 혹은 전례의 위치(cf. Karl Rahner)에 대한 확장시킬 수도 있겠다. 이 점은 곧장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교회와 전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선교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에 대한 종말론적인 선체험(foretaste)이라 할 전례와도 연결된다.

도전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우선 소위 몇몇 포스트(post)주의의 변종 신학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거나, 그것이 혹은 전통주의나 근대주의로 도매금 처리되면서 “이 세상”을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긍정과 바라 볼 저 세상 사이의 긴장감이 약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긴장감 상실이 이른바 근대 성공회 신학 자체 안에도 여러모로 깊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전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성공회는 우선 성사론적 이해(cf. Avery Dulles, Models of the Church)에 기운 특성이 강하므로, 여기서 비롯한 “세례적 교회론”(Baptismal Ecclesiology)과 “성찬례적 교회론”(Eucharistic Ecclesiology)은 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하겠다. 이런 근거와 실천에서라야 교회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를 비추고 몸소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폴 에이비스가 최근 이 점에서 다시금 “선교”1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마땅한 방향이다(Ministry Shaped by Mission, 2005).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전례와 선교를 이어가는 점들이 뚜렷하지 않아 아쉽다. 아니 그건 전례학자들의 몫이겠다. 이를 위해서라면 근대 전례 운동의 지향점들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특별히 성공회 전통 안에서 실험되었던 이런 성사주의 운동의 경험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다시 이런 말들을 정리하자면… 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

  1. 여기서 말하는 “선교”는 내내 “하느님의 선교”에서 바라본 것이니, 19세기 제국주의 선교의 역사를 흉내낸 “전도 여행” “단기 선교 여행” 혹은 “교회 성장 전략” 등과는 아무런 혈친적 관계가 없다. 노파심이다. []

마지막 강의: 죽음에 대한 태도

May 7th, 2008

간 밤에 읽은 랜디 포쉬 교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니, 아내가 눈물을 보인다(함께 유투브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두 살이 채 안된 딸에게 남겨준 말을 전해 주자 아침 밥 숟가락을 놓는다. (못됐다, 밥 먹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 그런데 가만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밥 먹을 때 가장 커진다.)

랜디 교수는 그 “마지막 강의”에서 경이로운 평정심을 보여 주었고, 그 자리에서 그걸 지켜보던 아내의 모습을 보는게 눈물겨웠다. 이제 그는 가족들과 함께 사랑의 기억을 남기는 마지막 강의를 살고 있다.

결고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운명이니, 결국 죽음 앞에 선 태도가 문제겠다. 일찍이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 M.D. 1926-2004)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아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다섯 단계 감정 반응을 살핀 적이 있다(부정-분노-타협-의기소침-인정). 랜디 교수가 보여준 평정심은 타고난 낙천적 성격에서 비롯했을 몰라도 역시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리라.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런 죽음에 깊이 관여한다. 그 가르침들의 차원을 어떻게 보든 간에 그 가르침들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태도를 준비시키고 이를 맞이들이기 위한 훈련으로 들린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단계이다. 이 가르침의 변주들이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졌다. 때로 이미지는 신학의 총화이기도 하니, 두 가지 이콘과 성화가 떠오른다. 성모 마리아의 안식(Dormition of the Theotokos)과 프란시스 성인의 전이(Transitus of St. Francis)이다.

성모 마리아의 안식 성 프란시스의 트란지투스

성모 마리아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강보로 싸인 아기로의 탄생이다. 성모가 안았던 아기 예수의 전복이다. 저 하늘의 질서는 이 세상의 전복이다.

이 세상에서 이미 전복적인 삶을 살았던 탓일까, 프란시스 성인의 죽음에 대한 표현은 “전이”(Transitus)이다. 성인은 죽은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로 옮아 갔다.

이런 가르침들로 그리스도교 전통은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도록 사람들을 도왔다. 심지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 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사귐(communion of saints)을 공언했고, 이것이 전례 상에서, 특히 성찬례 안에서 여전히 이뤄지는 것으로 가르쳤다. 모두 죽음에 맞선 인간의 태도를 위한 것이다.

삶에 대한 낙관은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보고, 완전히 다른 삶에 대한 희망을 가져오지만, 삶에 대한 집착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보고, 다른 삶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한국의 몇몇 교회는 죽음에 대한 이런 신앙을 가르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삼박자 축복(영혼구원, 건강, 재산)에 몰두하고, 저 세상을 이 세상의 연장으로 여기는 욕망을 부추긴다. 삶에 대한 집착을 나무랄 것이 없겠으나, 그걸 강화하고 그 너머를 보여주지 않으니 여타 사이비 종교와 다름 없겠다. (교회는 사람들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와야 한다. 병상에 가서 큰소리로 안수하고 찬송하며 뻔히 아는 허망한 치유의 약속은 좀 삼가고.)

랜디 교수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까, 어떻게 죽을까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비주의의 고상한 기치가 된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의 본 뜻을 몸소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 “멋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가 만들어 내는 마지막 강의는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에게 “멋진 존재”로 기억될 것이고, 그 기억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며 남은 생을 이끌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런 희망에 대한 설명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을 당장 위로하지는 못한다. 지금 할 일은 같이 울며 그 슬픔에 동참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