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와 성사성 – 제임스 화이트, 성공회 전통

May 6th, 2008

감리교 목사이자 전례학자인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 1932-2004)는 교편에서 은퇴한 해에 펴낸 책(The Sacraments in Protestant Practice and Faith, 1999)을 천주교 신자인 아내에게 헌정했다.

화이트는 책 말미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를 인용하며 개신교 신학의 미래가 성사성(sacramentality)에 대한 감각과 실천의 회복에 달려 있다고 공언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개신교 신학의 운명은 “자연과 성사”(nature and sacrament)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개신교 신학의 완성은 “성사적 (시공간) 영역”(sacramental sphere)의 재발견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이어서 현대 (개신교) 교회 안에서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있는 장애물 세 가지를 열거했다.

[1] 좀더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 있는 주요 장애물은 성사(sacraments)를 하느님의 현존하는 행동으로 보기를 꺼려하며, 단지 과거에 있었던 하느님 행동에 대한 인간의 기억으로만 보려는 태도에 있다. 이런 처지에서 성사를 하느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성사의 효과에 대한 감각이 개신교인들에게는 너무 없다… 계몽주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모든 연관을 잘라내 버렸다.

[2] 최근에 일어나는 위협 가운데 하나는 교회 성장 운동을 통해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여기서는 교회와 문화의 차이를 극소화하려 한다… 그리고 성사들과 교회력, 그리고 성서정과들이 우리 문화에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이를 주변화시킨다.

[3] 좀더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 있는 세번째 장애물은 대체로 생각없이 대충 대충 성사들을 집전하는 것이다… 준비없이 대충 드리는 성찬례는 그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과의 사귐이라는 신앙을 약화시키고 파괴한다. 성사들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해지면서 이제 성사에 대해 무지한 세대가 되어 버렸다.

근대 전례 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이 태동하여 영향을 주기 시작한지 100년이 넘지만, 그 깨달음과 울림은 식민지 선교의 유산에 파묻혀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는 멀기만 하다. 아니 최소한 주어진 전통에서나마 겨우 그 “감각”을 몸으로 익혀 온 것들 마저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양상이다. 화이트가 지적한 세가지 장애물을 빗대어 우리 교회(최소한 한국성공회의 전례 현실)를 성찰해 볼 일이다.

흥미롭게도 화이트는, 역사적으로 오래 논의되었던 성사(sacraments)와는 달리 “성사성”(sacramentality)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이르러 부각되었다고 하면서, 그 근원을 성공회의 프레데릭 모리스(F. D. Maurice: 1805-1872)의 [그리스도의 왕국] The Kingdom of Christ (1837)에서 찾았다. 모리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으니, 물질적인 것(the physical)은 신성한 것(the divine)을 만나는 수단이요. 물질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에는 어떤 틈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끄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질 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이 물질 세계는 신성의 체취를 풍긴다” (화이트의 요약).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리스의 성사성 이해가 사회 정의를 위한 성사적 행동들과 이어졌고, 그것은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그리고 이후 전례 운동을 통해서 깊어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근대 성공회 전통과 기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점차로 잊혀지는 전통이기도 하다. 화이트가 “성사성”를 설명하면서 성공회 전통의 신학자들(Percy Dearmer, A. G. Herbert, William Temple, John Macquarrie)에 기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어디에 곁눈질하고 있는가?

성찬례의 인간 Homo Eucharisticus

May 4th, 2008

일전에 나눔의 집에서 일하시는 박순진 신부님께서 요즘 한국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탄해 하며, 도대체 “우리의 전례(liturgy)가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야 하는지”를 물어오셨다. 당신의 사목 활동이 이미 그 뜻을 몸소 살고 있는 참이니, 똑바로 공부하여 나누라는 일갈로 여겼다.

하릴없이 나는 원칙만 되새기며 함께 가자고 할 뿐, 그리고 오히려 신부님의 나눔의 집 선교 활동을 통해서 몸으로 배워야 하겠노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상황에서 전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매우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선은 이런 편만한 욕심과 욕망의 분출 현상은 최소한 성찬례라는 전례가 갖는 비전과는 전혀 반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이 비전을 우리 전례 안에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성공회의 위대한 전례학자인 돔 그레고리 딕스(Dom Gregory Dix)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전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 혹은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하고, “성찬례의 인간” 혹은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된다. 이게 성변화(transubstantiation)의 진정한 의미겠지요.

스리랑카의 예수회 신부인 티사 발라수리야(Tissa Balasuriya) 역시 성찬례가 갖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 G. Lohfink)의 전망을 세상에 대한 비판과 연결하여 천명한 바 있다. 성공회의 성사적 사회주의 전통과도 맥을 같이한다.

현존하는 세상의 질서 혹은 무질서는 성찬례의 가치와 분명히 대조적이다. 성찬례가 사랑과 나눔의 성사라면, 세상은 탐욕적인 착취의 체제이다. 성찬례가 공동체를 건설한다면, 세상의 관계는 인격과 인간을 파괴한다. 성찬례가 보편 지향적이라면, 세상은 인종차별적이다. 성찬례의 힘은 평등 사회를 향하지만, 세상의 권력은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다. 성찬례가 겸허한 섬김을 추동한다면, 세상의 국제 관계 속에서는 오만한 지배가 판을 친다. 성찬례의 빵이 모든 이들을 위한 공동의 식사라면, 세상의 빵은 거래를 위한 상품이다. 성찬례의 이상 안에서 땅은 공동 이용을 위한 것이지만, 현재의 국가 체제 안에서 땅은 성공한 정복자를 위한 것이다. 성찬례는 인격을 우선시하지만, 국제 관계 안에서는 권력과 이익이 지배한다.

Tissa Balasuriya, The Eucharist and Human Liberation. Orbis Books, 1979.

다시 ‘이런 세상에서 전례는 무엇이야 하는가?’ 전례가 다만 세계관이나 전망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것은 대조 사회를 위한 몸의 수련이고,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한 훈련이며, 전례적 질서(ordo)를 통해 새로운 질서(order)를 미리 맛보며, 그 대조 사회의 시-공간을 넓혀 나가는 것이어야겠다. 그런데 이를 막아서는 일들이 교회와 전례 안에서 마저 팽배하다면, 교회와 전례는 또 다른 세상 권력의 표현일 뿐이다.

나쁜 전례는 나쁜 신학을 만들고 / 나쁜 신학은 나쁜 전례를 만들고,
나쁜 전례와 신학은 교회와 세상을 망친다.

전례 쇄신은 이래서도 중요하다.

로완 윌리암스, 진 로빈슨, 그리고 사제직

April 30th, 2008

공정함을 잃은 듯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소식을 접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다. 게다가 그분의 학문적 통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는 나같은 학생 처지에서나, 그분의 영적 지도력이 매우 중요한 한 교단 전통에 소속된 한 성직자로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게 민망하다.

그러나 세계성공회 안에서 일고 있는 동성애 관련 논란에 대해 그분이 지난 몇년간 보여준 모습들은 “신학적 주장 따로, 정치-사목적 판단 따로”인 것 같다. 그 아쉬움이 이번에는 좀더 실망스럽게 불거졌다.

캔터베리 대주교 사무실(람베스 궁)이 현재 영국을 방문 중인 미국성공회 뉴햄프셔 교구장 진 로빈슨 주교(미국성공회의 공개적인 첫 동성애자 주교)가 영국 안에서 “사제직 기능 수행”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로빈슨 주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당사자인 진 로빈슨 주교는 곧장 이러한 금지 조치를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수용하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제직 기능의 실제 내용은 교회 안에서 설교하고 미사를 집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 판단은 해당 교구와 교구장 주교가 하면 되는 것이지 캔터베리 대주교가 나설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여러 면에서 오버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로빈슨 주교에 대해서는 공정함을 잃은 듯 하다.

교회법적인 논란이 먼저 일고 있는 모양이다. 미사 집전에 관한 문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설교하는 것은 초청한 교회의 허락만 있으면 된다. 초청한 교회가 있고, 소속 교구장이 잠잠한 처지에 대주교가 이럴 권한이 있느냐는 것이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메일 말미에 세계성공회 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금지 조처를 하게 되었노라고 유감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주교의 활동은 금지하고 다른 괴상한 일들에 연루된 외국 주교들의 활동은? 해당 기사는 이미 익히 알려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세계성공회의 분열을 겁주고 있는 나이지리아 피터 아키놀라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금지 조처를 말하지 않았다.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 내 정부를 도와 동성애자 탄압을 정당화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고, 이는 여러 국제 인권 단체에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게다가 아키놀라 대주교는 자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신자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집단 보복 학살과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시원한 대답을 못내놓고 있는 처지다.

아프리카 다른 성공회의 처지는 더 심각하다. 짐바브웨의 말랑고 대주교는 무가베 정권의 독재와 연루된 한 주교의 행동을 심의하려는 교회 재판소를 이유 없이 해산해 버렸다. 그 대주교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도 그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집전할 수 있었다. 요크 대주교가 통탄할 일이다.

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브라질 성공회에서 탈퇴한 교구들을 자기 관구로 받아들이고, 타 관구에 관구장들의 허락 없이 방문하여 분열을 도모하는 성공회 사상 최고의 극단적 보수파로 이뤄진 서던 콘(남아메리카)의 베나블레스 주교도 윈저 보고서의 경고를 멋대로 무시하고 있으나, 그가 영국에 방문했을 때 어떤 제재 조치를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올 3월 함께 만나서 기도했고 생각을 같이했노라고 떠들고 다닌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런 태도와 행보의 문제점에 대해서 여러번 지적된 바 있거니와, 세계성공회 총무 신부는 언젠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영국 내 보수파들에 휩싸여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다고 불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행보는 캔터베리 대주교 자신의 신학적 주장 혹은 성찰과도 모순된다. 그동안 나는 그분의 글과 책을 여러 권 읽고, 때로는 번역하여 소개하고, 또 그분을 변호하는 글까지 쓴 적이 있다. 며칠 전에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크리스토퍼 수사님이 윌리암스 대주교가 쓴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성찰(“Space for the Divine”)을 보내와, 이를 읽고 그분의 깊은 통찰에 감복하여 내 자신의 사제직을 되새기고 있던 참이었다.

윌리암스 대주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 이해나, 개신교의 성직 이해와는 달리 이렇게 적었다.

십자가 안에서 보이는 하느님은 자신의 ‘영역’ 수호를 거절한 분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영역 수호를 거절하는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그 인간의 삶을 통하여 지극히 역설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은 존재한다. 이 삶 속에 하느님은 모든 순간과 생각과 행동에 침투하시며, 그 삶을 하느님께 순종하게 하신다…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결과] 더 이상 도로 닫힐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열린 문이 마련되었다. 이 공간은 하느님의 행동과 인간의 현실이, 어떤 대결이나 두려움 없이, 함께 하는 곳이며,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직 주어진 것들에 마음을 열며, 하느님은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만 멈추지 않는 사랑 안에 머무신다. 그 사랑은 인간의 세계와 인간의 언어로는 오직 ‘상처입기 쉬움”(vulnerability)을 통해서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에서 인간의 경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공간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이 공간에서는 미리부터 어느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는다.

예수의 행동은 이 공간과 문을 여는 것이었다… 사제직의 임무는 이제… 이 예수를 통하여 마련된 공간을 집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공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제직이란 이제, 예수 안에서 신과 인간의 행동이 겹쳐진 그 공간에 자리잡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런 공간이 존재함을 알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공동체요, 실재의 물리적 공간인 교회는 정기적으로 이곳에 모임으로써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준다…

영국 성공회[sic] 안에서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열어 놓으신 이 공간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는 것이다. 그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혼란스러운 인간이 서서히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돕고, 그 안에서는 모든 복잡한 것들과 감정적인 격동과 영적인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주고 들어준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Rowan Williams, “Space for the Divine: An Essay on Christian Priesthood in Contemporary Culture” in Praying for England: the Heart of the Church edited by Sam Wells ad Sarah Coakley (T. & T. Clark Ltd, forthcoming in June 2008)

이 신학적 성찰은 십자가의 구원 사건과 사제직과 교회론과 선교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매우 깊고 풍요로우며 아름다운 전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캔터베리 대주교는 자신의 이 신학적 성찰을 실제로 자신의 사제직 안에서 펼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