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 단상 – 관구장 회의

February 21st, 2007

이마에 재를 받는 순간의 그 엄숙함을 지키며 스스로를 침잠시키고 있는 참이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선언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 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다들 죽을 존재들이라는 운명을 되새겨주는 것만도 아니다. 이 선언은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끝에 새로운 생명, 즉 우리가 먼지와 흙에서 창조되었듯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롭게 빗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삶에 대한 기대까지도 담고 있다. 이 이중 의미의 선언이 관구장 회의 이후의 세계성공회, 특히 미국 성공회에게 더욱 깊고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관구장 회의 전체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들이 서로 충돌하기에 바빴던 허약한 모임이 또다른 희생양 잡기로 전락한 모습을 보노라니 답답할 뿐이다. 게다가 이런 모임이 이제는 [성공회 계약] 초안을 통하여 버젓이 교리적 파수견으로 등극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성공회의 역사가 새로 쓰일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성공회가 가져왔던 깊이와 넓이가 이런 알량한 모임으로 왜소화될 것을 예상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일치”라는 가치가 교묘하게 분열주의자들에게는 일치론자를 압박하는 좋은 무기가 되고, 새로운 “한 몸인 그리스도가 되어 스스로를 봉헌하는 일”이 목적인 성찬례는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볼모가 되어 버리는 광경이 관구장 회의에서 일어나는 다반사라면, 어찌 그들을 지도자로 따를 수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떼쓰기와 협박이 신앙의 보수를 덧입고 날뛰는 괴기한 광경들이다. 자신은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서, 성반을 받아들어 주님의 몸을 나눠주는 괴이한 행동은 도대체 어떤 신학에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남부끄럽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관구장 회의에 때맞춰 참으로 깊은 신열을 앓았다. 그 와중에도 관구장 회의의 진행 내용을 꼼꼼히 챙겨서 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반면교사가 아닌 이상 배울게 없는 사태로 막을 내렸고, 나도 더이상 힘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흘 동안이나 침대와 책상 앞에 눕기와 앉기를 반복하다 지친 몸의 기운들이 재의 수요일을 통해서야 새로워지는 역설을 경험하고 있다.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리하여 주님과 새로운 부활한 몸을 얻으리라는 희망 만이 힘이다. 신실한 세계성공회의 신자들과, 실망과 좌절로 이 사순절을 맞고 있는 미국 성공회의 여러 신자들에게 이런 희망에서 나오는 깊은 연대의 기도를 바치는 사순절을 만들어야 하겠다.

이 와중에 동료요 친구 사제인 리차드 헬머(The Rev. Richard Helmer) 신부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축복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자신에게 축복이었으며, 하느님의 손길이었는지를 깊은 성찰로 증언하고 있었다. 귀가 있는 자들은 이 외침을 들어라. 그리고 그가 감싸고 있는 사랑 안에서 함께 눈물 흘리는 이들을 보라!

이제 나는 그들과 함께 한다. 꼭 해야 한다면 그들과 함께 쓰러질 것이다. 하느님, 필요할 때에 그런 용기를 내게 주십시오.

아멘, 내 친구!

재의 수요일 참회 연도 Litany of Penitence

February 21st, 2007

재의 수요일뿐만 아니라 사순절 매일의 아침기도와 끝기도가 되도록, 글 귀 하나 하나를 숙고하며, 소리내어 바쳐야 하겠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는 주님과 우리 서로에게, 그리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성인들 앞에서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생각과 말과 행실로 저지른 죄와,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고백합니다.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온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우리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고, 우리가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섬기셨듯이 우리도 서로 섬기라 하신 말씀을 따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뜻에 진실하지 못했으며, 주님의 성령을 슬프게 했습니다.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지난 날 우리의 불충과 교만과 위선과, 우리 생활 안에서 인내가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 주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을 착취했습니다.
* 주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 자신의 좌절로 분노하며, 다른 사람이 가진 행운을 자신과 비교하여 시기하였습니다.
* 주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좋은 것들과 그 안락함에 빠져들었으며, 우리 일상 생활 속에서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 주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기도와 에배를 게을리하고, 우리 마음의 믿음을 다잡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 주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들을 회개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궁핍과 고통에 눈감았으며, 불의와 폭력에 무관심했습니다.
* 주님,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소서.

우리의 그릇된 판단과, 이웃에 대한 무정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와 편견을 보낸 것을 회개합니다.
* 주님,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소서.

주님의 창조세계를 낭비하고 오염시켰으며, 우리 후세에 대해 배려하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 주님,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소서.

선하신 주님,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의 진노를 거두어 주소서.
* 주님은 크신 자비이시니,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이루소서.
* 그리하여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통하여,
* 주님의 모든 성인과 성도들이 주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부이시니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사악함에서 돌이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일꾼들에게 분부하시어 회개하는 이들에게 사죄를 선포하게 하시고 죄를 없애는 힘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거룩한 복음을 믿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 죄를 없애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주님께 구하고, 성령을 구하여,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참회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제부터 우리의 남은 삶이 정결하고 거룩하게 되어 마지막 날에 주님의 영원한 기쁨에 참여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미국성공회 기도서 267-269, cf. 한국성공회 기도서 116-117)

성찬례와 교회 공동체

February 20th, 2007

성찬례에서 실제로 봉헌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이 봉헌을 드리는가? 중세 말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은 간단 명료한 답을 제공한다.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간단 명료한 답을 제공한다. 예배자들이 봉헌한다 – 첫째로 찬양을 드리고, 그 다음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는 것이다. 봉헌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전체를 위해 단 한번 스스로를 봉헌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분의 봉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일치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부조화를 넘어서서 완벽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이처럼 말한다.

“구원된 공동체 전체, 즉 교회와 성도(성인)들의 공동체가 대사제이시며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으로 그 자신을 봉헌하신 분을 통하여, 희생제물로 하느님께 봉헌된다. 이로써 우리는 위대한 머리이신 분의 몸이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희생제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제대의 성사를 축하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아는 바와 같이 교회는 봉헌된 교회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De Civ. Dei, X. vi)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전체(the whole Christ), 즉 머리와 그 구성원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에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찬례의 의미이며, 이것이 성찬례를 개정할 때 구체화도록 해야 할 내용이다.

E.L. Mascall, The Recovery of Unity (London: Longmans, 1958) 140-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