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전례의 현실 II – 기본에 관한 상념들

March 7th, 2007

올 1월 초에 이메일로 한국 성공회 전례의 현실과 의미들에 대해서 나눈 생각들의 토막을 좀더 넓게 나누고자 이제야 여기에 옮겨 본다. 메일을 주신 분의 허락을 받았으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첫번째 내용은 전례 상의 관습과 행동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거의 가감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고, 두번째 내용은 메일 주신 분의 고민과 더불어서 전례의 의미를 다루는 기본에 관한 잡다한 생각을 적어 본 것이다. 두번째 글을 먼저 읽고, 첫번째 글로 돌아와 읽는 것도 좋겠다. 이 허튼 생각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소중한 경험과 통찰을 진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자리를 빌어 소중한 질문을 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주님의 평화

** 교우님이 다시 주신 글을 읽으면서 아픈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들었습니다. 매우 좋은 전통의 교회에 찾아온 이들을 박대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떤 형태로든 도전을 받아들여 성찰을 깊이하지 않는 교회들의 현실에 저 또한 먹은 게 얹힌 것처럼 내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 이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주저 앉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차근히 한번 생각해보고 실마리들을 찾아 새로운 실타래를 마련할 밖에요. 

무엇보다 먼저, ** 교우님이 몇몇 교회 안에서 겪으신 경험들에 대해서, 그 논란 혹은 책임 여부가 어디에 있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저 마주 앉아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었어도 그러질 않을 텐데요. 대화를 중요시하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을 신학적 성찰의 기본으로 삼았던 성공회 정신과 한참 동떨어진 경험들이 만연한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아픈 사례들을 함께 나눠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례들에 대해서 일일이 토를 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만 몇가지 드는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 교우님이 어떤 식으로든 교회 안에서 – 그것이 어떤 전통 안에 있는 교회나 교단이건 – 전례를 통한 신앙의 형성에서 염두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점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건 또한 제 자신을 향한 독백이기도 합니다.

1.
편의를 위해서는 큰 의미의 전례와 구체적인 전례 행동들을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고, 그런 다음 좀더 심층적으로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빗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으로서는 ** 교우님은 전례 행동의 여러가지에 대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많은 문제들은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얕기 때문에 생긴 게 분명합니다. 특별히 어떤 관습적인 행동이나 매우 이상한 행태들이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고 지속되거나, 다른 생각을 짓누르는 것은 그 관습과 행동을 지키는 것말고는 그 의미나 이상을 추구할 수 만한 내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한국성공회 안에서 전례에 대한 논란 혹은 어떤 낭패감들은 모두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2.
사실 이것은 전례적 전통을 가진 모든 교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 교우님이 좋은 사례로 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는 불필요한 것에, 자잘한 행동들에 대한 의미 부여의 과잉이 문제인 경우도 많고, 그것이 폐쇄적인 교회적 권위와 연결되면 사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이런 처지에 한국성공회의 문제는 전례학적인 성찰이 교회의 현실 안에서 단절된지 오래되다 보니, 관습적 혹은 경험적 유산으로만 남아 있는 특정 전례 행동이 성찰의 권위가 사라진 빈 틈을 타서 군림하는 양상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3.
성찰없는 권위는 “오래된 신자” “대대로 신자” 혹은 “수박겉핥기로 맛보고 주섬주섬 이어서 만들어낸 근거 불명의 설명과 이에 곁들여진 약간의 억압적 권위”로 대치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지요. 이러나보니 제대로 된 지식과 성찰이 다시 그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틈이 없어져버리고 맙니다. 이른바 적반하장인 경우가 생깁니다. 저도 이게 걱정입니다. 공부하는 제 말에 얼마나 귀기울여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업습합니다. 사실 저는 제 말을 할 생각은 없고,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과 대화를 부추기면서, 이를 위한 근거들을 채워주는 일이겠지요. 그것이 전례학자들의 일입니다. 

4.
다만 여기서 책임소재를 물어 굳이 비판하고자 한다면, 제 자신이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습니다. 평신도를 탓하기보다는 그 교육과 사목 지도의 책임을 가진 성직자들이 또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러 성직자들이 전례를 지도할 수 없는 권위와 근거가 부족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이를 “사목적인 배려”라는 이름으로 변명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지요. 

5.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풀어볼까? 아마도 대화의 창구들을 만드는 것이겠고요, 문제를 나누고, 근거를 찾아보고, 대안을 마련해 보는 통로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 교우님이 예로 들어주신 천주교의 “전례학 동호회”도 좋은 예입니다. 저 또한 이런 형태를 마련해보고자 노력해왔고, 그 때문에 홈페이지 질문 답변란 같은 것을 운영하기도 했지요 – 하지만 전례에 대한 질문은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성공회 위키 지식 백과 등과 같이 그것이겠고, 인터넷을 통한 “성공회 전례 포럼”이 그 예이겠습니다. 곧 띄워볼 생각입니다.

6.
이제 ** 교우님의 제기하신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성공회 쪽에 자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자료도 다시 뒤져서 확인해보지 않거나, 서로 물어보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이것은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없다는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기가 없으면, 황금이 옆에 있은 들 뭐로 하나 가공해낼 수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성공회 예전 안내서”도 성찬례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거니와, 이를 통해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 굳이 외국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맞는 좀더 창조적인 전례와 그 구체적인 행동들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요. 자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관심이 더 중요한 거지요. 저도 멀리서나마 아직 공부하는 중에 있지만, 저 자체를 하나의 자료로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물어오는 사람이 드뭅니다. 많은 자료들을 개개인이 흩어져 스스로 일일이 설렵하기보다는 이를 업으로 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참 빠르고 편할텐데요. 게다가 이러면 저같이 책상물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욱 현실감각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고립되어 왜소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이…

7.
이런 가운데, ** 교우님이 지적하신대로 천주교 쪽의 자료는 매우 중요하기도 합니다. 저라도 당장 신학교에서 전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현대의 중요한 전례 문서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전례 헌장”을 숙독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전례 헌장”의 정신이 전례 행동에 진정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경험적 회의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전례 헌장”의 핵심은 전례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이러한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텐데, 많은 경우 천주교에서 전례는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더불어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방해하는 일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례 헌장” 자체의 신학적 문제와 한계도 명백히 지적되어야겠지요.) 매우 세심하게 규정된 전례 행동들은, 달리보면, 매우 세밀한 전례적 통제 장치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관 관계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적용할 때라야, 이른바 “헌장”의 정신이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례의 “의미”와 전례의 구체적 “행동들” 사이에 진정한 일관성이 마련되겠지요.

8.
성공회는 영국적인 성향이어서 느슨하거나 단호적 교리적 체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성공회 전통에서 형성된 하나의 기질(에토스)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공회의 신학하기(doing theology)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공회에는 이른바 전일적인 교도적 지침 (magisterium)이 없으며, 이를 반대해왔습니다. 이러한 전일적인 교도적 지침의 태도들은 개신교 내에서 그 창시자나 주도적인 신학자의 이름을 딴 어떤 “**주의”(-ism)로 잔존하고, 로마 가톨릭에는 그 이름 그대로 맹위를 떨치는 교리 체계로 남아 있습니다. 

9.
이 때문에 전례에 관해서 성공회는 매우 다양한 태도들과 더불어, 그 단계 혹은 정도가 천양지차로 서로 다른 전례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는 분명 강점과 단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공회의 태도와 전통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그것을 “대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문제는 이런 대화가 지속되지 못하다는 것이고, 이것이 역시 성공회를 개신교 편향, 혹은 천주교 편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봅니다. 한가지를 지적하자면, ** 교우님의 지적 속에서 성사와 관련하여 “람베스 회의가 종교개혁자들을 추종한 것”이라는 지적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람베스-시카고 4개 조항에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성공회의 여러 교회들, 그리고 더 넓게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와 같은 다른 교단 전통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해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마련하고자 나온 것이며,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두가지 성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자면… 어느 천주교 신자가 저명한 정교회 전례학자들에게 물었답니다. “정교회에도 칠성사가 있고 이를 행하나요?” “그럼요, 있지요.” … “허나, 칠성사뿐이겠습니까? 세상은 성사로 가득차 있어서 헤아릴 수 없답니다.” 성사를 숫자로 따지는 것은 서방교회의 못된 관습 가운데 하나지요. 개신교나 천주교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10.
천주교의 신학과 체제에 대해서 바람직한 인상을 두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할 말이 많습니다. 다만 그 내용이 적시되지 않았기에 넘겨 짚는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제 자신이 신앙 형성의 중요한 시기에 천주교에서 신앙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도 천주교 쪽의 신학의 영향과 대화하고, 또한 교회의 현실도 아는 처지에서 바라보자면, 천주교의 신학 – 아무래도 교리가 되겠지요 – 과 체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쉽게 말해서 판단할 사항은 아니라고 봅니다.

11.
“양형 영성체”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실은 이미 천주교회는 모두 떡과 잔을 모든 신자들이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독 안되고 있는 곳이 한국 천주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예외가 있긴 하지만). 오죽하면 저랑 같이 공부하는 여러 천주교 신부님들이 한국천주교는 바티칸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개탄을 할까요. 

12.
한국성공회가 이른바 “복음주의”를 운운하며, 이상한 개신교 흉내를 내고 있는 일은 개탄할 일입니다. 아무도 이는 앞서 말할대로 자신의 근거없음에 대한 어떤 열등의식의 발로이겠고, 달리 보면 작은 교단으로서 살아가다보니 생겨나는 생존의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동정해할 지점과 비판해야 할 지점이 겹쳐있기에, 서로 상처나지 않도록 보듬고 품어서 길을 찾도록 서로 얼굴과 마음을 맞대야 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그러질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비관적이고 암울한 처지인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13.
“사족”이라고 하신 것에 대한 제 나름의 “사족”도 유효하리라 생각합니다.

# “독서대”의 중요성을 성공회가 폄하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문제라면, 설교대와 독서대를 나눠서 사용했던 문제들이 지적될 수 있어야 하리라 봅니다. 독서대와 설교대는 하나로 통일하면 그만입니다. 아니면 설교자가 회중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면 되지요. 복음서를 “회중 안에서” 읽는 전통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정교회의 독서대인 “베마” (이것이 회중 한가운데 자리한 갓집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를 좀더 역동적인 형태도 성공회 안에 적용시킨 것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회중을 둘러 세워놓고 선포하신 말씀을 상징하기에 적절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천주교 미사와 성공회 미사를 비교하면서 이런 복음서 독서 전통이 참 그립웠습니다. 물론 공간적인 맥락을 고려해야 하고, 적절하지 않은 곳에서 이를 억지로 행하는 것은 더 우습지요. 비좁은 곳에서는 독서대를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예배 중 프리젠테이션에 대해서는 저도 ** 교우님과 크게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전례의 공간적 맥락을 고려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종종 찾아가서 미사를 드리는 인근의 큰 천주교 성당이 있습니다. 일반 교회이면서 동시에 대학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전례를 통한 선교”에 열심인 이 성당은 전례 중에 “파워포인트”를 이용합니다만, 그리 어색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문제는 사용 여부,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 “전례가 곧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성공회만큼 중요하게 여긴 교회 전통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이 교회의 현실이 아닌 경우가 많을 뿐이지요. 지적하신 말씀에 절대로 동의합니다. 전례를 하나의 치장으로 보는 태도가 만연해 있거나, 일반적인 개신교처럼 “머리로만 드리는 예배”와는 달리 “몸과 삶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전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 교우님은 여러가지 실망스러운 일들만 계속해서 겪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매우 유감스럽고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몸담아 사랑하며, 자신도 변하면서, 그곳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시켜나가는 그런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교회가 성공회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러가지 어처구니 없는 행태와 처지에서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느 대주교님이 말씀하신대로, 성공회는 교회의 일치와,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스스로가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라는 점에서 그 겸손함과 열림에 제 신앙의 자리를 둥지틀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좋은 전통이 있으면서도 허점이 많은 곳이기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도 어느 교회보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 교우님께도 감히 그런 제 경험과 고민 속에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성공회를 위해,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우리 교회 전통 안에서 남아 애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참 깊고 좋은 대화의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2007년 1월 3일)

성사적 사회주의 Sacramental Socialism

March 7th, 2007

성공회 전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아쉬운 흐름이 있다면, 이른바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라 이름지어 부를만한 성공회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전통이라 하겠다. 이것이 프레데릭 모리스(F.D. Maurice)와 같은 광교회 전통에서 시작되어, 이후 성공회 가톨릭주의(Anglo-Catholicism)의 일군에게로 이어졌을 때, 말그대로 “성사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 연장 선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이나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와 같은 캔터베리 대주교들이 있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고, 희미하게나마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 현 대주교에게도 이어지는 것은 다행이다. 이런 흐름이 희미해지고 주목을 끌지 못하는 처지에 콘라드 노엘(Conrad Noel)과 이 운동을 미국으로 옮겨준 헤이스팅스 스마이스(F.Hastings Smyth)까지를 되돌아 보자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되고 만다. 케네스 리치(Kenneth Reech)가 여전히 분투하고 있나?

지난 관구장 회의에서 주교들이 잔지바르(Zanzibar) 주교좌성당에 방문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곳 성당은 노예 시장터에 위에 노예제 폐지를 기념하고, 노예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제대는 바로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채 경매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자리잡았다. 교회 건축과 공간 배치에서 전통적으로 제대는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십자가를 제대 위에 매달아 배치한 것을 되새겨 보면, 잔지바르 성당 자체는 근대사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고난과 구원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데도 그곳에 드린 성찬례에서 성찬을 나누지 않은 주교들은 몰신학과 몰역사 이해의 증인들로 뼈아프게 기억될 것이다.)

이 잔지바르 교구에 프랭크 웨스턴 주교(Bishop Frank Weston:1871-1924)가 있었으니, 그는 이 “성사적 사회주의”의 전망과 실천의 단면을 분명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1923년 런던에서 열린 “성공회 가톨릭 대회”의 폐회 설교의 한 부분이다. 제목은 “오늘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싸울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싸우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체를 모신 성막을 지켜내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재일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위대한 진리가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는 물질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물질을 통해서, 하느님을 육체 안에서, 하느님을 성체 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성막을 나와, 여러분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여러분은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사명은 이것입니다… 나가서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사이에서, 헐벗은 이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과 저임금에 찌든 이들 안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하여 싸우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만나거든, 그분의 수건을 여러분의 허리에 메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시오.

Frank Weston, “Our Present Duty” Concluding Address, Anglo-Catholic Congress, 1923, with a foreword by Sidney Dark (London: Society of Ss. Peter and Paul, nd.)
via http://anglicanhistory.org/weston/weston2.html

사순절에 받은 편지 하나

February 25th, 2007

한국의 친구 신부님에게서 문안 편지를 받았다. 사순절에 맞추어 똑바로 살라는 죽비로 들어야겠다. 서툴게 관구 홈페이지에 올린 글생겨난 논란을 옆에서 보고 안타까워 했노라고 위로도 전했다. 그러나 정작 내 부끄러움이 깊어진다. 이 무렵에 신부님 자신도 내내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대로 드러내 나누려 했다. 굳이 전화하여 이런 부끄러움을 되돌아보며 사순절을 보내고 싶노라면서 허락을 받아 그 부분을 옮겨 본다.

얼마전 주 신부님 맘 고생이 심했을 것 같아서 어떻게 위로를 하나 하고 고심하다가 그냥 지나쳤습니다. 관구 홈페이지에서 일고 있던 논쟁을 보고 나도 한 숟갈 보태는 심정에서 주 신부님 입장에 지지를 보내는 글을 올릴까 하다 그냥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글 재주도 없지만 신앙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 또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중요한 현안들에 대해서 워낙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온라인 상에서 논쟁을 한다는 게 제게는 익숙치 않을뿐 아니라 그들과 논쟁해서 얻는 것이란 게 결국엔 깊은 상처입은 내 마음밖에 남지 않는다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주 신부님 혼자서 고군 분투 하시는 걸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작심하고 공격적으로 따져묻고 비수를 날리는 이들에게 일일이 점잖케 대꾸하시며 사제로서 품위를 지키시는 걸 보면서 힘겨워 하시는 주 신부님을 뵙는 듯 했습니다.

내가 좀 저만치 가면 그만큼의 여유가 우리 신부님들께도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차라리 건방진 생각이 앞섰던 일이었다. 또한 논란의 초점을 분명히 해야 우리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키울 수 있겠다 싶어서 설익은 이야기나마 나누려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게 내 뜻하는 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역시 내 부족함이 큰 탓이리라. 그러나 힘겨웠던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나중에 털어 놓을 기회가 있겠다.

친구 신부님은 교회의 부끄러움을 토로하고자 마음 먹은 듯하다.

**교구는 갈수록 재밌어 집니다.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곳이라서(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터 놓고 뭔가 진지하게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그런 곳이 돼가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우리들 안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시하고 폄하하는 그런 풍토가 갈수록 짙어 지는 듯 여겨집니다. 나 아니면 안돼라는 식의 오만함과 독선의 힘이 갈수록 커져서 자신 이외에는 **교구에서 제대로 일을 할 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 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저 같은 사람들은 발 붙일 곳이 별로 없는 곳이 돼가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지내지요.

웬 욕심과 지배욕들이 그리 강하고 많은지… 사제들을 가만 살펴보고 있노라면 우리 자신들이 뭔가에 미친듯 허기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무서울 정도입니다. 여유라곤 보이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단단히 잘못가고 있구나! 하는 탄식과 두려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모두들 열심히 살고 있는 듯 한데 제 정신들을 못차리고 살고 있는 듯 보이지요.

예수님께서 늘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이 지금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요.

삶에서 행복과 불행 그리고 우리들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복이란 게 하늘에서 하느님이 이쁜 놈들에게 뚝 떨어뜨려주는 그런 게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내가 창조해 내는 나의 창조물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으로부터 일체의 모든 것이 시작되고 창조됨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체유심조라 했지요… 주 신부님께서도 마음로부터 짓는 행복과 복을 많이 많이 창조하시길 빕니다.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를 우리 성직자들은 신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했을까? 내 자신에게 이 유혹 이기신 이야기를 다시 돌려서 새김질하는 중이다.

사순절 편지 감사합니다, 신부님. 이어서 전화로나마 잠시 바다 건너 나눈 목소리가 정말 반가웠어요. 주신 말씀에서 많은 걸 다시 배웠습니다. 신부님도 마음에 많은 행복을 만들어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