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tember 6th, 2015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마르 7:24~37)
예수님은 가끔 기이한 언행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멋대로 예수님을 기대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을 옥죄고 억압하는 위선자를 향해서 뿜어내신 분노와 독설은 우리로서도 통쾌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더욱 세심하고 근본적인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와 지역, 성차별이 우리 무의식에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밝히시고, 이를 발본색원하는 길을 예수님 몸소 보여주십니다.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여인 이야기에는 대결과 차별 구도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이고 그 여인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지역 차이와 성 차이가 함께 만나면 차별이 곱절로 고약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의 편견을 그대로 시연하시며, ‘이방인 여자’를 강아지에 비유하여 모욕합니다. 이때 여인은 그 모욕을 받아들이면서도 ‘용기를 내어 두려워하지 않고’(이사 35:4)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모든 생명은 그 처지와 신분이 어떻든 여전히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의 ‘옳은 항의’를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고정관념을 바꾸십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는데 우리가 거절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 마귀가 떠나갑니다.
청각장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행동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습니다”(33~34절). 예수님 당시 장애인이 살던 환경과 처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나빴습니다. 예수님은 위생과 정결의 율법을 넘어서서 징그러울 만큼 친밀하게 자신을 장애인과 맞대십니다. 예수님의 ‘한숨’은 마음 아픈 현실을 향한 한숨이며, 생명을 주는 하늘의 숨결입니다. 그 숨과 함께 ‘귀먹은 반벙어리’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소문은 세상에 더 퍼져나갔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그렇습니다.
‘에파타’ 하며 열리는 경험이 예수님의 치유이며,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귀를 열어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고정관념을 고쳐 세상의 고통과 이웃의 아픔을 경청합니다. 입을 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눈을 열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민의 새로운 눈으로 더욱 깊이 응시합니다. 닫힌 신앙을 깨고 귀와 입과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치유되어 서로 열고 살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예수 신앙은 무의식에 깃든 고정관념과 차별이 만든 악령의 질서를 넘어섭니다. 이렇게 예수 영성은 삶의 질곡에 갇힌 사람을 열어주고 살리며 함께 품으며 넉넉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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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30th, 2015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마르 7:1~8, 14~15, 21~23)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라”(신명 4:9). 종교의 계율이든, 사회의 법률이든, 이 표현만큼 법의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 관계에 관한 통찰과 태도, 개인의 영성 생활에 두루 적용할 지침입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과 사물을 모두 자기 뜻 안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도가 없더라도 이런 자기 중심성은 사람 관계를 왜곡하여 깨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떠나서 외로워지며, 다시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마음에 과하고 무례한 행동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불행을 넘어서려면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 자기 ‘밖에 있는 분’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초월한 분을 우리 안에 모셔서 귀 기울이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자기 편의를 따르거나 이익을 바라는 조건으로 찾는 여느 종교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 본문은 하느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자기 편의와 이익에 따라 자기 체험에만 기대어 하느님을 멋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손익계산과 자기 체험을 내세우면, 늘 함께 계셔주려는 하느님을 쫓아내는 꼴입니다. 신앙의 규율과 율법의 목적은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는 방법을 세워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목적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십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방법인 율법이 사람을 옥죄고 억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심스레 삼가며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기쁨을 없애고, 사람이 만든 관습과 종교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속박합니다. ‘사람의 종교’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며 늘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길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습’은 배고픈 사람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간 사회의 복잡한 일에 관하여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넓고 깊게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좁은 경험으로만 간단하게 판단하려 듭니다. 자신이 걸어온 신앙 체험이나 사회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다고 ‘화’를 내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노소 모두에게서 ‘공손함’이 희미해지고 무례함으로 혼탁해집니다.
이런 세태와 달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야고 1:27).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서서 늘 자신을 기쁘게 비춰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세우는 훈련이 참된 율법이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무엇이든 사람을 억누르는 율법, 사회를 더럽히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하느님의 길을 기쁘게 걸을지, 자신을 위한 기복 종교에 안주할지 선택하라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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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3rd, 2015
복음 – ‘귀에 거슬리는’ 진리 (요한 6:56~69)
성당 입구에는 세례대나 성수대가 있어서, 들어올 때 성수를 몸에 찍으며 세례의 은총을 되새깁니다. 세례 때 약속했던 대로, 죄의 과거에서 몸을 돌이켜서 구원의 제대를 향해 순례하겠다는 다짐과 행동이 은총의 첫걸음입니다. 성당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분리된 공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분리와 구별을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상식과 잣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우리를 더욱더 격려합니다. 어둠과 빛, 세상과 진리, 그리고 먹어도 죽을 빵과 영원한 생명의 빵을 구별하고, 빛과 진리와 생명을 선택하라는 부탁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이해하기 쉬운 ‘말씀’과 따라 살기 쉬운 ‘길’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길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못마땅하고’ 귀에 ‘거슬리도록’ 불편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61~62절). 세상과 달리 자주 손해 보고, 더 참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선택과 은총이 만나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과 길을 따르겠다고 작정할 때, 새로운 삶, 세상을 변화하는 삶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영원한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 신앙의 출발입니다. 불편한 선택을 제거하고 손쉽고 값싼 축복을 남발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기대는 오히려 신앙을 ‘배반’하는 길로 빠집니다(64절). 실제로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른바 번영과 축복의 종교를 기대하는 이들을 두고 예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67절).
베드로의 당찬 대답은 우리 대답이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겠습니까?” 이 대답은 우리가 몸담은 교회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작고 불편하고 어렵고 못마땅하고 거슬리더라도, 우리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지니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오해받고 배반당했던 예수님을 우리 안에 성체와 보혈로 모시고, 세상에서 배척받은 사람들, 낯선 사람들까지도 품으면서 주님 걸으셨던 길을 뚜벅뚜벅 뒤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의 부탁대로 우리는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하고, 평화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지니고 걷습니다. 여기에 우리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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