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직 – 애틋함의 영성

November 30th, 2013

한 달 전 한국 성공회 서울교구 성직자 모임인 “성우회”(聖友會) 소식지에 실을 글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거듭 고사했으나 외국에 계신 신부님들의 사소한 근황을 소개하는 특집이니 한 분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친구 신부님은 거듭 부탁했다. 마지못해 글을 편지 형식으로 적어 보냈다. 늘 글을 너무 무겁게 풀어간다는 말을 듣는 참이니, 편지 형식이면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한 듯하다. 지난주에 소식지가 나와 배포됐으니, 이곳에도 올린다. (너무 사적인 한 문장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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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 – 애틋함의 영성

신부님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머뭇거렸어요.

그동안 몇 분과는 소식을 깊이 주고받았지만, 신부님께는 연락드리려는 손이 좀체 움직이질 않더군요. 한국을 떠나온지 10여 년이 흘러서 생긴 삶의 간극이기도 하겠지요. 물론 처음 몇 년은 그 틈을 쉽사리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손을 내밀며 당기며 격려했던 시간이었어요. 활기와 의지를 다지며 나누기도 했지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인연에도 세월따라 부침이 크지요. 물리적인 공간의 간격이 너무 큰 탓에 긴밀하게 서로 보살필 처지도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바빠야만 일이 되는 듯한 강박증의 사회 속에서 모든 일에 마음을 주려는 신부님도 덩달아 바쁘실 테니, 그 틈을 노리거나 겨우 쉬는 시간을 훼방할 수 없노라 미리 판단한 탓도 있겠지요. 제 탓입니다.

기억하고 있어요.

늦은 시각 원근에서 바쁜 일 제쳐놓고 찾아와 이야기 나누며 토로하던 시간들. 어느 가을 산속에서 며칠 동안 워크숍을 마치고 지쳐버린 저를 격려했던 눈길과 말. 말없이 다가와 손에 쥐여 주었던 작은 선물. 혹은 남이 볼세라 얼른 주머니에 쑥스럽게 넣어주시던 봉투. 바쁘지만 정성스럽게 쓰인 격려와 기도의 카드. 고마운 기억은 늘 애틋합니다.

애틋함이었어요.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공부하며, 사목하고, 이민자로 살아가며 얻은 마음의 감기 같은 것도요.

공부는 대체로 새로운 지식과 그 지식의 효용을 목표로 하죠.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지만, 즐거움과 기쁨은 그런 어려움을 훨씬 웃돕니다. 그런 공부를 친구들이랑 나눌 생각을 하면 더욱 힘이 납니다. 나눌 생각 없이 고통스럽게만 공부한 이들도 있는데, 입신양명을 위해 자기 살을 깍는 독종과 괴물로 변하는 일을 여럿 보았습니다. 어느 분이 현대 교회의 현실을 보며 개탄한 대로, 신학교의 교실과 성당의 제단과 세상의 거리가 따로 놀면서, 제 영역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그 안에 하릴없이 사로잡힌 일이 숱합니다. 이럴수록 제 공부의 근거와 내용, 방향과 목적을 늘 돌아보고 반성합니다.

보살피는 이 없이 불꽃이 잦아든 신앙 공동체의 사목을 얼떨결에 맡은 것은 어쩌면 피하고 싶었던 축복이었어요. 소속 교구가 눈길을 주지 않는 작은 신앙 공동체와 지난 10년 동안 살아왔어요. 작든 크든 사목은 마음을 주는 일이며 상처와 위로가 늘 교차하는 공간이니 시간과 에너지가 소진될 밖에요. 그러나 신학 공부는 이처럼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를 진단하며, 그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경험을 근거로 세워져야 할 테니, 그 10년은 사목자인 제게 뜻밖의 은총이었어요.

은총은 늘 가난과 주변부에서 다가옵니다. 한국에서 성공회가 소수자 교단으로 여러 어려움을 겪듯이, 이민자의 성공회 사목은 이중으로 불리합니다. 미국 성공회가 미국 사회에서 꽤 영향력 있다 하더라도 이민 사회에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민 사회는 자기 본국의 문화와 종교의 지도를 재현하려 하니까요. 게다가 이민자의 성공회 사목은 미국 성공회 안에서 또 다른 소수자로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파격적 조치가 없는 한 이런 어려움을 가까운 미래에 이겨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다만, 이민 사회의 중심부에서마저 밀려난 이들을 신앙 공동체에서 만나며 사귄 은총은 제 공부와 삶, 그리고 사목에 큰 도전이요 배움이었어요.

(중략) 아이들이 그나마 불평 없이 무탈하게 자라니 하느님께 감사하고, 여러 어려움을 단단한 사랑과 신뢰로 이겨나가면서, 야위는 아내에게 고맙지요. 성직자는 가족에게도 신세를 지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하느냐는, 성공회 성직자의 보편적이고 쓸쓸한 물음을, 저도 신부님과도 매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애틋함이에요. 그 안에서라야 은총과 사랑이 눈물처럼 밀려오고, 눈물로 맑아진 눈으로 더 넖고 깊게 세상을 응시할 수 있으니까요. 경제적 효용과 성과를 따져 묻는 세간의 기준이 팽배한 시절인지라, 쓸쓸한 사물과 사람을 향한 애틋한 시선을 지켜나가는 일은 이제 몇몇 소수자의 일이 된 듯해요. 성직자들이나마 이 시선을 더 깊이 성찰하며 붙들어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어져요. 공부에서든, 사목에서든, 일상의 생활에서든. 그 애틋한 시선이 마련하는 연대가 희망이라고 믿어요.

그 성찰과 다짐의 한켠에서 신부님께 편지를 쓸 용기가 났어요. “성우”라는 말이 성직자들의 친교와 우정을 뜻한다면, 앞에 적은 애틋함은 ‘서로 친구인 성직자들’의 영성이라고 믿어요. 그 촉촉한 영성에서라야 사물과 사람 사이를 잇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를 잇는 희망과 생명의 사제직이 자라날 테니까요.

곧 뵐 날을 기다립니다. 건강하세요.

주낙현 신부 합장

성 베네딕트 축일

July 11th, 2013

성 베네딕트(c.480~c.540) 축일인 탓에, 축일 본기도와 성인의 <규칙> (RB:the Rule of Benedict)에서 마음을 붙잡는 부분과 짧은 생각을 옮긴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이신 성부에 관한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니,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주님의 종 베네딕트의 가르침과 모본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기꺼운 의지로 걷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에 주님의 귀를 열어 들어주시고, 주님의 축복으로 우리 손이 펼치는 일을 번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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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교회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트의 <규칙>(RB)에는 이런 말이 있다.

“주님의 거룩한 산에 쉴 이는 누군가요?”
“잔꾀 없이 걸어가는 이, 옳은 일을 하는 이, 마음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 사기를 혀에 담지 않는 이,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는 이, 남에 대해 모함하는 악마를 믿지 않는 이”(RB).

시편 15편을 따다 쓴 스승의 대답인데, “남에 대해서 모함하는 악마를 믿지 않는 이”(RB 서언 27)라고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이는 의역이다. 직역하면 “제 이웃에 대한 모욕을 용납하지 말라” “이웃에 대한 중상에 귀 기울이지 마라”이다. 의역이 더 강렬하다. 악마의 본질을 못 박듯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악마를 믿지 말고, 귀 기울이지 마라. 이런 악마가 동서고금 일상 곳곳에서 활개친다.

이 때문이었을까? 베네딕트 성인과 여러 교부들은 시편 3편을 하루 기도의 준비로 삼으셨다.

“주님, 저를 괴롭히고 넘어뜨리려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습니까? 빈정대는 자들이 또 많기도 합니다…정녕 주님은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수시는 분.”

다시 이런 권고가 나온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에 눈을 열자꾸나. 그리고 날마다 부르시는 그 소리에 귀를 열자꾸나.” (RB)

그리고 성인은 시편 4편을 끝기도에 사용하도록 했다.

“정의의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들어주소서… 정의를 주님을 향한 제물로 바치고,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께서 큰 기쁨을 제 마음 속에 베푸셨으니…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듭니다.”

베딕딕트 수도 전통에는 독특한 메달이 있고 이런 말이 새겨있다. “우리 죽을 때에 그분이 함께하시어 우리가 힘을 얻게 하소서”(EIUS IN OBITU NRO PRAESENTIA MUNIAMUR). 그 “죽을 때”와 “함께하심”과 두려움 없도록 하는 “힘”을, 곱씹는 시절이다.

한편, 성 베네딕트를 호수성인으로 모신 이들과 그 이름을 지닌 분들에게 평화와 축복!

지적이고 영적인 게걸스러움

July 9th, 2013

지성주의든 반지성주의(cf. 리차드 호프스태터)든, 신학을 학문으로 천착하든 영성으로 해결을 보려 하든, 지난 십여 년간, 이런 흐름을 살피면서 눈에 선연하게 잡힌 현상 하나는 어떤 ‘게걸스러움’이었다. 몸에 좋다면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으려는 유혹이 지성이나 영성을 입에 담거나 훈련하는 이들에게서도 눈에 띄었다.

지성은 정보의 과잉에 유행의 과잉까지 더해 그 수사학과 속도가 현란하기만 하다. 현실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 지성의 핵심이겠으나 유행하는 이론과 학자의 말에 올라타 자신을 치장하여 호객하는 모습이 비친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이론을 통합하거나 꿰뚫는 초월적 인문 멘토를 자처하며 ‘인문학적 교양’에 목말라 하는 이들에게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반지성을 부추기는 아이러니를 자행하기도 한다.

영성은 관심의 대상이 된 순간 상품화와 소비주의의 그늘에서 허덕인다. 영성의 핵심은 ‘비움’이다. 그 비운 공간을 넉넉하게 채우는 자비심과 측은지심이다(텅빈 충만!). 다시 말해, 사랑이다. 이 애틋한 공간을 마련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든 들어온 것을 소화하든 할 테지만, ‘도통’하겠다는 욕심이 지나쳐서 영적인 게걸스러움마저 느끼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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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나시” – 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곳곳에 넘쳐나는 인문학 강좌니, ‘탈’자 붙은 신학 포럼이니, 무슨 영성이나 피정 프로그램이니 하는 것들이 이 게걸스러움에서 자유로운지 살펴볼 일이다. 유행에 뒤져 초조해하듯, 쏟아져 나오는 책들의 제목이라도 주워섬기지 못하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을까 봐, 시대에 동떨어진 사람이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무슨 영성 프로그램을 수료하지 못하거나 특정 기도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단계 뒤처진 신앙인이 될까 봐 좌불안석인 처지와 겹친다. 그리하여 명석하고 재치있고 도통한 이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이 모양이다.

내 단견이고 오해이길 바란다. 게다가 이마저 없으면 겁도 없이 날뛰는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의 세상에서 견디는 일마저 힘들기 때문이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그 권력의 부자들은 값싸고 푸짐한 연쇄점 햄버거로 사람들을 비만으로 만드는 동안(동시에 그들은 거기서 판매 이익도 얻는다), 자신들은 간추린 최고의 식단을 차려 받고 자기 건강을 관리한다.

그런데도 지성을 성취하고 영적으로 도통한 이들은 자신의 설익은 경험과 지식으로, 실제 권력을 향해서 비판하기보다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핀잔하기에 바쁘다. 이는 그들이 원하는 ‘도통’에도 근접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지적이고 영적인 게걸스러움이 지적/영적 비만과 교만을 만든다.

45년 전, W. H. 오든은 이렇게 적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제 사람들이 과거의 걸작 예술을 즐기기 위해서 더는 부자일 필요가 없으니 큰 축복이라 할 만하다. 값싼 책이나, 수준 높은 복제 기술, 그리고 스테레오 레코드를 통해 이 모두를 쉽게 즐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이렇게 쉽게 접하면서 오용이 되면(실제로 우리가 오용한다), 그것은 저주가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더 많은 책을 읽으려 하고, 더 많은 사진과 그림을 보려 하고, 더 많은 음악을 들으려 한다. 실제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폭식은 정신을 키워내지 못하며, 오히려 정신을 소비하게 한다. 읽고 보고 듣는 것을 곧장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그저 어제의 신문에 난 흔적보다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