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 잠시 멈춰가는 나그네

June 9th, 2013

성공회 안에서 나를 깊이 염려하신 분들이 내 처지와 행동에 안타까움을 전한다. 요즘 보이는 내 글이 남들을 불편하게 하고, 그 효용이 남들이 기대하며 내게 매겨놓은 가치에 맞지 않으며, 더욱이 현실 안에서 ‘적절한 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이다. 비슷한 말이라도 이 말을 전하는 사람이 다르기에, 그들의 깊고 안타까운 마음을 안다.

그 고마운 마음과 충고에 여전히 주저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그런 기대치에 형편없이 모자란 사람이거나(이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런 ‘효용성 기대’ 자체를 ‘철든 기성 사회’의 한 미끼라고 나 스스로 경계하는 탓일는지 모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못하는 용기없는 말이라고 핀잔할지 몰라도, 내 주위에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 잡았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블로그 등에 쓰는 ‘잡감’은 진솔한 내 목소리인 탓에 내게 더 귀하다. 메아리가 별로 없지만, 이런 블로깅이야말로 깊이 고민하며 소통하려는 도구요 실천이다. 당장 산뜻한 지식 정보를 내놓고 짐짓 권위자인 체하거나, 그것으로 위험 없는 원만한 관계와 명성을 쌓기보다는(그럴 능력도 없음을 이미 밝혔다), 지식과 성찰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모습을 그대로 내보이고, 그렇게 살아가자고 다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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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난감한 표정!)

(그렇다고 지식 연구가요 생산자, 그리고 신학 교육에 책임을 느끼는 자로서 그걸 나누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 성공회 지식 프로젝트, 번역 프로젝트, 성공회 신문 기고 등을 꾸준히 했고, 사적으로 몇몇과 교회를 위한 대화의 통로를 마련했다. 그렇다면, 어떤 이들의 요구는 자기 입맛에 맞는 내용을 적어달라는 볼멘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 80년대에 생각했던 “세상의 변화”에 관한 고민이 “세상이 왜 변하지 않는가?”라는 색깔 다른 질문으로 옮겨갔을 때, ‘자기 변화 먼저’ ‘세상 원래 그래’라는 도통한 체념적 답에 나 스스로 기대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 ‘세상 물정 모른 채’로, 나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며, 여전히 흔들리며 산다. 단호한 지도자나 명석한 학자, 지혜로운 선생을 기대했다면 일찍 포기하라고 말씀드리련다. 요셉 성인처럼 나는 길섶에 주저앉은 이들에게 잠시 멈춰가는 나그네일 뿐.

나그네는 적어도, 권력을 부리지 않는다.

사제직 – 그늘에 핀 작은 꽃을 품는 일

June 6th, 2013

아침 침묵 중에 슬며시 떠오른 회고를 옮긴다. 사제로서 지난 십수 년 동안 다양한 공동체와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며 성서와 복음의 말씀을 나누는 동안 주된 초점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고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해당 공동체의 상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일 터이나, 나이에 따른 나 자신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 초점은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2) “용서, 사랑, 환대의 가치와 실천”, 3) “측은지심의 공동체”로 나뉜다. 그러나 같은 성서와 복음을 읽고 살피며 기도하는 처지인지라, 시기나 상황에 관계없이 이 초점들은 언제나 겹친다.

1.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 전통적인 수도공동체에 초대받아 함께 주일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며 나누던 복음 해석의 렌즈였다. 그 수도회가 갓 서품받은 사제를 불러 채플린으로 삼은 이유라고 믿었기에 젊은 혈기에 상당한 객기를 부렸고, 수도자들답게 늘 너그럽게 들어주셨다. 고정관념을 이겨내자고 말했지만, 수도자들의 너그러움과 공동체 현실 속에서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배우는 시간이었다.

2. 용서/사랑/환대의 가치와 실천: 풍비박산이 난 공동체를 타국 타향에서 만나서 돌보는 일은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다. 공동체의 내력을 들춰보니 온갖 비난과 미움의 상처가 엿보였고, 사람이 떠난 텅 빈 쓸쓸함에 짓눌려 있었다. 이런 처지에 복음은, 우리 자신을 잘 돌보는 방법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환대하는 일이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가진 것 없이 남은 쓸쓸한 이들의 겸손이 마련한 작은 공간에서 나는 마음껏 내 소리 내며 살기고 했고, 종내에 내력이 지닌 하릴없는 쓸쓸함에 나 자신이 짓눌리기도 했다.

3. 측은지심의 공동체: 복음을 들고 세상의 변화를 바라고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 복음이 특정한 형태의 정치-이념적 주장의 외피가 될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20년 넘게 지켜봤고 성찰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거기서 얻은 배움은 신앙 공동체의 이상은 ‘측은지심의 공동체’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복음에 깊이 흐르는 마음은 ‘측은지심’이다. 종교는 새로운 시선을 얻는 훈련이다. 이런 생각은 나이 드는 탓일까? 이런 공동체를 ‘리버럴’ 사이에서 마련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과 초점의 변화는 하느님의 이끄심이리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돌멩이처럼 여기까지 왔다. 다시 차여 어디로 굴러갈지 모른다. 그러나 내 의지로 하느님의 자유를 종종 거부하지 않았는지 돌아다 본다. 그 기도 공동체를 통해서 만났던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기도 한다. 여러 얼굴과 표정이다. 고맙고 아쉽고 미안하다. 지금 스스로 위로와 힘을 얻는 말은 이것뿐.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고 감동을 줬는지,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얼마나 깊이 어루만졌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우리 행동이 어떻게 이 세상을 움직이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가 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언제 적었듯이, 그림자 짙은 그늘이 많은 내 삶. 다만, 그 안에 수줍은 작은 꽃들이나마 품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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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락 – 눈물의 대화

May 31st, 2013

깊은 우정의 대화 속에서 감정과 에너지를 완전히 쏟아내고, 다시 새로운 사랑과 격려의 에너지를 얻은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 다닌 길처럼 돌고도는 인생. 고마운 친구요, 선생님이요, 신부님을 가진 복락을 누렸다. 그 복락의 한 조각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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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Visions of the Daughters of Albion” circa 1795)

신부님을 5개월 만에 다시 뵈었다. 신부님께서 홍콩에 계시는 동안 이메일 몇 통만 간단히 나누고 말았다. 뵙고 싶었다. 여전하셨다. 그분의 건강한 모습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환대하며 염려하고 경청하시는 모습이 여전하셨다. 어느 처지에서든 당신 자신을 열어 놓고 여전히 배우시는 분임을 다시 확인했다. 삶에서 얻은 그 배움을 신부님과 나누는 일은 참으로 유쾌하다.

유쾌한 대화 후에 속을 찢어 토로하는 시간을 나누었다.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내 모습이었다. 딴에 권력이랍시고 가진 것을 의식, 무의식으로 휘두르는 이들을 향한 혐오감, 그들에게 도움이 되거나 이용당하느니 아예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성급한 생각, 가치 없는 동네에 나 자신과 고민의 산물을 나눌 필요도 없겠다는 건방진 태도, 나도 어느 권력이나 특권을 얻으면 온갖 변명을 들이대며 적절히 즐기고 남을 짓누르게 될까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기대했던 이들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던 길동무의 모델을 접어야 했을 때의 허탈함 등이 지난 몇 년의 내 허송 세월, 그에 따른 가족의 희생과 겹치며 눈물을 타고 흘렀다.

이것들은 지난 몇 년의 경험이었거니와 그 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얻는 내 식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별 자체로 일이 풀리지는 않는다. 분노는 분노대로 쌓일 뿐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나누고 경청하며 도전하고 도전받는 길동무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남남이 되고 만다. 저마다 얻은 식별이 즐거운 내용이든 어둔 내용이든 그 식별 자체의 진가에 마음을 두어 깊이 서로 기도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자 친구, 그리고 말 그대로 아버지가 되어주신 신부님(Father)께 늘 감사하다. 대화 중에 신부님은 연신 함께 눈을 적시며, 아픈 속내를 나눠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돌아서서 떠나는 나를 다시 불러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오는 10월쯤에 신부님과 함께 운전하여 콜로라도에 다녀오는 계획이 성사되었으면 좋겠다.

***

“이렇게 에너지를 다 쓰고 그를 만나러 갈 수 있겠어요?”

온갖 감정을 다 쏟아낸 터라 신부님의 염려가 컸다.

“예, 에너지를 쏟은 만큼, 새 기운을 얻었으니까요.”

다시 한 시간을 달려, 이제는 어머니 같은 친구 신부님을 만났다. 내 안의 분노를 다스리고, 내 안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잘 보호하는 방법을 나눠줄 테니, 어서 건너오라던 신부님이었다. 개와 고양이가 여러 마리인데다, 곧 이사를 준비하는 터라 집안이 어지러웠다. 이것저것을 밀쳐 치우고 너른 공간을 마련하여 서로 마주 앉아 차를 나누었다.

“무슨 차 마실래요?”

“난 커피가 좋은데요” “우리 집엔 커피 없어요.”

“흠… 음, 여기 detox 라 이름 붙은 허브 차가 있네요? 이걸로 하죠. 오늘 만남이랑 딱 어울리는데요?”

이미 한 시간 전에 어떤 묵은 감정을 토로했던 탓일까? 신부님과 나누는 몇몇 방법은 간단하고 손쉬웠다. 내부에서 어떤 격정이나 반항이 없었다. 그러나 매일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충분하게 연습했다.

다시금 깨닫거니와 자신을 잘 보살피려면 내 안의 분노를 적절하게 내보내야 한다. 치미는 분노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다만 그것을 바로바로 내보내야 한다는 말이다. 분노를 쌓아놓으면, 작은 일을 타고 묵었던 분노가, 그 일과 상관없는 과거의 분노까지 한꺼번에 치고 올라와 일을 망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망친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잘 돌봐줘야 한다. 예전에 여러 친구 신부님과 나누던 생각이 났다. 나도 늘 친구 신부님들께 간절하게 부탁했다. “신부님, 자기 자신을 잘 대해 주세요. 분노가 신부님을 삼키지 않도록 하세요.” 이 말은 내게도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적절하고 유용한 자기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세상은 상처 입을 일로 가득하다. 어떤 선한 만남도 그렇다. 그렇다면 신발을 신고 길에 나가듯, 내 마음에 보호막 하나, 외투 하나를 걸치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를 보호해야 한다.

막바지에 신부님과 사목 이야기도 나눴다. 5~6년 정도 후에 은퇴하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아마도 지금 맡은 공동체는 자신의 은퇴와 더불어 생을 마감하리라 내다봤다. 슬프고 아픈 일이 되리고 담담히 말했다. 내 지난 4월이 생각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예, 나는 이미 겪었잖아요. 그런데 그거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말 그대로 어머니 같은 신부님(Mother)과 넉넉한 작별의 포옹을 하고, 다시 한 시간 반을 달려 돌아왔다. 남쪽으로 향하는 1번 국도 옆에 펼쳐진 바다가 상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