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31st, 2012
죽음은 발언이다. 인생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으니, 죽음은 그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그 생 전체를 두고 던지는 마지막 발언이다. 어떤 점에서, 그 발언에 귀 기울여 기억하고 의례라는 기억장치를 통하여 되새기는 일이 종교이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보려는 생각으로 종교가 창안되었다고 하든, 그보다 더 심오한 신학적 변증을 하든, 실상 종교는 죽음을 둘러싼 생의 종말이라는 현실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 앉아 삶을 생각하는 틀이다. 그때야 죽음은 계속 발언한다.
역사는 이런 발언의 구성체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둘러싼 발언에 대한 기억이 없는, 소위 망각의 사회는 역사를 구성하지 못한다. 되풀이되는 인간 사회의 악행은 대체로 집단적 망각에 기대어, 혹은 망각을 조장하는 이들의 농간으로 가능하다. 그러니 세상살이는 늘 기억의 정치와 망각의 정치가 겨루고 다투는 곳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다툼을 초월한 곳을 종교가 가리키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종교와 역사의 본연을 덮는 적극적인 이데올로기이거나, 소극적이고 무의식적으로나마 그에 부역하는 이데올로기 장치이다. 비루한 삶을 통과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에 대한 기억의 종교이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의 종교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그 죽음의 발언을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나가는 종교이다. 그러나 순혈(純血)의 기억과 발언이란 없다. 늘 다른 사건으로 겹쳐지고 오염되는 잡종화 과정에서 오히려 그 기억과 발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잡종화를 통한 기억의 진화를 거부하는 순혈복원주의가 수구적 정향과 급진적 해석이라는 두 극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서 축자주의는 이런 수구적 교리주의의 행동 방식이고, 성서의 ‘역사적 비평’은 종종 축자주의에 대한 반 명제를 넘지 못하는 지식인의 오락거리가 되기도 한다.
한편, 잡종화에 대한 고민은 명확한 선을 그어주지 못하니, 분명한 전선 형성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 다만, 종교는 논증과 설득과 전선 형성이 아니라, 생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자잘한 사건이 역사 속의 기억과 발언과 나누는 유비(analogy)를 제공할 뿐이다. 그러니 종교는 이러한 유비의 상상력을 부추기고, 그 상상력 체험의 시공간을 마련해 주는 틀이다. 이때,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죽음 자체가 남겨놓는 발언은 인간적이며 신적이다. 삶에 뿌리 내린 인간의 죽음이라는 종말적 전이(transitus)에 놓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신-인적 상상력과 기억은 무수한 죽음의 발언과 원초적 성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남긴 발언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을 그치면, 신학과 교회는 교권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신-인적 상상력과 기억은 그 과정만큼이나 잡종적인 형태를 무수히 만들어 낸다. 다만, 그 잡종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예술적 미(美)일 것이다. 찰나와 억겁을 교차시키는 작업으로서 예술, 그 지속되는 발언을 부추기는 가치로서 미를 생각한다. 특히 종교 안에서 의례와 그와 관련된 예술은 이런 잡종적인 예술과 미를 마련하고 실험하는 무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그것들이 마련하는 시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접목시키는 일이 신앙 훈련이요, 영성 수련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잡감은 늘 행간이 넓고 서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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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4th, 2011
미국 성공회 캐서린 쇼리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이사 62:11).
예수님에 앞서 위대한 예언자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라와 구원받은 받은 백성에 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성탄 성가를 부르며 그 열망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날의 희망과 두려움이 이 밤에 만나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랍 세계와 동유럽의 격변, 그리고 전 세계적인 점령 운동 속에서 그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를 추구하며, 창조의 모든 결정 과정과 창조 세계의 선물을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요구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이해하는 구원은 바로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을 위한 도움과 치유가 성육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구원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 가난하고 천한 부부 사이에 흉흉한 소문을 갖고 태어난 나약한 아기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성육신 사건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방법만이 모든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내내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고 외쳤지만, 그 구원은 아직 온전히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성취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모든 인간과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치유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는 미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신다는 이사야의 선포(이사 62:6-12)는 성탄 미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행여 그걸 기회가 없다면, 전체를 찾아 읽어 봅시다. 그 구원이 어떠한지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셨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외국인들에게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곡식을 먹으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리라.
포도를 거둔 사람이 자기 포도주를 나의 성소 뜰 안에서 마시게 되리라. (이사 62:8-9)
이것은 순진하게 자기만 챙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에 늘 고통당하고 외세에 점령당하며, 힘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위로와 치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생산품을 권력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현실의 두려움을 이제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선물을 모든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오실 때, 그 사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제 너희를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이라 부르겠고,
이제 너희를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부르리라. (이사 62:12)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평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인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가진 열망을 선포하며 실현하십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마련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서로 맺는 관계를 똑같이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이 오십니다. 이 치유를 환영하시겠습니까?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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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ScsJ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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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15th, 2011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벗들에게,
“나는 이제 곧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뒤흔들고, 뭇 나라도 뒤흔들리라.” (하깨 2:6-7)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뭇 나라”가 흔들리는 시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들, 유럽과 미국을 덮친 경제 위기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구조들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되새겨주었습니다. 정치적 동일성이나 재정적인 안정성도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만 흔들리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여러 사상가가 최근에 사용했던 한 문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흔들리는 이들의 연대”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가 얼마나 상처입기 쉬우며, 이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달은 이들이 함께 이루는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서로에게서 같은 연약함을 깨닫는 일은 정말로 깊은 의미의 연대입니다. 이 연대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 연대는 인간이 지닌 조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전략을 세우든, 진실은 인간은 변화에 종속된 존재이며, 고통의 위험에 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깨지기 쉬운 우리 인간이 본질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그리고 모든 나라가 흔들릴 때, 우리가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진리는 우리의 궁핍과 우리의 가난입니다.
성탄의 복음은 사회 개선 정책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이 인간의 공통 숙명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하는 이들 위에 내리는 심판입니다. 그 복음은 사람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복음은 또한 이러한 연결과 연대는 겸손과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한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형태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탄의 복음은 인간 역사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을 거듭하여 지적하며 그 점을 우직하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힘이 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대 세계의 현자들과 정치가들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이성,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 안에서 참된 인간성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가난한 아기를 참된 인간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나요? 우리의 연약함을 보면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태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 않나요? 이 점을 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 하느님과 같은 자유, 사랑을 주고받는 자유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이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터전에 서게 됩니다. 그 터전 위에 우리의 희망, 정의와 자비를 위한 우리의 행동을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이 터전 위에 우리를 새롭게 세우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우신 교회를 보살피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기도의 인사를 전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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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zfcz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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