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Sunday, February 11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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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기도서에 적힌 <병자를 위한 기도일>(2월 11일)은 낯설고 새롭다. 전례 색깔도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한다. 교회마다 주일 전례나 매일 기도 때 병자를 위해 기도하는데, 왜 이날을 따로 정했을까? 어떤 달력은 좀 더 세심하게 ‘세계 병자의 날’이라 적기도 한다. 건강 관련 세계 단체가 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축일은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제정하여,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했다. 그 후로 다른 교단과 사회 단체에 널리 퍼졌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교회력에 넣은 교단일 테다.

교종은 이렇게 부탁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자신도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12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연유도 있다.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겹친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께서 세 번이나 나타났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병자들을 위한 기도일의 연원에서 세 가지 뜻을 살핀다.

첫째, 이날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다. 고통을 없애달라고 하지 않고, 그 고통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부탁이다. 무슨 말인가? 종교는 종종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너무 쉽게 말한다. 성서에도 치유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 전통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고통에 관한 깊은 생각으로 초대한다.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이 신앙이라고 가르친다. 예수의 치유 기적 핵심에는 측은지심과 축복이 있다. 병약자들이 소외당하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 병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라고 선언한다. 예수께서는 고통을 축복하시고 그 가치를 새롭게 선언하신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이다. 기도일을 제정한 교종도, 성모 발현의 복된 증인인 소녀도 결국 죽음을 맞았다. 교종은 파킨슨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소녀는 수녀가 되었지만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모두 죽었다. 오래 사는 사람은 있어도,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병에 들든지 건강하든지 우리는 모두 죽는다.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신앙인은 이 시차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는 큰 안타까움이지만,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진다.

셋째, 사람은 잊어도 하느님은 잊지 않으신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든지 길든지, 생명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히는 일이 없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된다. 그러니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이다. 우리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이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뜻이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2월 10일 치 (↩)

하느님 나라 – 은총의 경제

Sunday, September 24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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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은총의 경제 (마태 20:1-16)

‘기쁜 소식’ 복음을 나누는 첫 문단을 우리 사회의 아프고 슬픈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복음은 그 어두운 현실을 뚫고 들어와 새로운 태도와 행동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국가 가운데 하나인데, 그 지표가 적잖이 우울합니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길고, 자살률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가장 높으며, 남녀임금 격차는 꼴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노동자 임금 문제로 풉니다. 세상의 정의와 평등은 하느님 나라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 비유로 세상 상식의 허점을 보여주십니다. 일찍 와서 더 많은 노동을 한 사람에게 더 많은 품삯을 주는 일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해 질 무렵에 온 사람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급합니다. 게다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나눠주니 먼저 온 사람들이 골을 낼 법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 늦도록 일감을 얻지 못해 바동거리는 마음을 읽으십니다. 뉘엿한 해의 그림자 안에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의 그늘이 더욱 길고 깊었을 테니까요. 신앙의 시선은 먼저 사람의 그늘을 향합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불편하게 자극하여 사람의 속내를 들춰냅니다. 먼저 온 사람을 뒤로 서게 하셔서 그들의 볼멘소리를 자극하신 듯합니다. 사람은 작은 일 하나에서도 자기 권리는 재빨리 주장합니다. 짧은 기다림으로 다른 이들의 염려와 간절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그런데도 좀 더 커다란 사회와 체제의 불의와 불평등에 관해서는 자기 일 아닌 듯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구약 요나 이야기처럼, 자신의 작은 불편함에는 금세 골을 부리면서도, 많은 사람이 은총을 누리는 모습에 억울해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요청입니다. 인내와 자비가 하느님의 길이니까요.

신앙인은 행복의 기준을 하느님께 둡니다. 다른 이들의 불행에 비교하여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넉넉한 은총이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는 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풍성하게 펼쳐지는 은총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니 그분의 처분에 따라 널리 나누는 일이 신앙의 행동입니다. 남을 물리치고 먼저 움켜쥐려는 태도는 우리를 아귀다툼의 지옥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사람 생각으로 정한 정의와 평등을 넘어서, 불편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와 평등을 바라볼 때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이 복음을 따르기 쉽지 않으나, 바울로 성인이 옆에서 격려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 노력하십시오. 그 용기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믿음과 고난과 섬김은 우리의 특권입니다”(필립 2:27-29). 신앙인은 이 특권으로 긴 노동에 지친 이들을 쉬게합니다. 삶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세상의 크고작은 불평등을 조금씩 없애나갑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은총의 경제를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Sunday, September 3r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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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반석과 걸림돌 사이에서 (마태 16:21-28)

주일 복음의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니 혼란스럽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베드로를 두고 ‘믿음의 반석이요,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사람’으로 칭찬하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색하시며 ‘사탄아, 물러가라’ 하시며 꾸짖으시니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할까요? 그러나 세상에 혼란을 더하는 변덕스러움은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자기중심의 시선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옹졸함이 변덕을 일으키니, 주님의 칭찬과 꾸짖음이 번갈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신앙과 행동은 교회의 반석이지만, 자기 중심성은 인생과 신앙의 걸림돌입니다. 이를 식별하는 기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이 닥칠 도전을 예견하십니다. 그 길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미워하고 박해하는 길입니다. 모함에 따른 고난에 굽히지 않는다면 주님의 삶과 가르침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주님과 신앙인을 모함하는 세력은 세상의 정치 권력자들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의 전통을 나누고 있다고 믿는 공동체의 일원들입니다. 오히려 신앙의 내력과 경험을 들먹이며 기득권을 누리고 텃세를 부리는 이들입니다. 출신과 나이, 학력과 재산, 경험과 지위를 자기 안위의 기준으로 삼은 사람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고 맙니다.

이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사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사탄을 객관적 형태를 가진 악귀 정도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이러면 베드로를 ‘사탄’이라 꾸짖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세상의 권력 질서가 유혹하는 편안함에 머물며 자신의 행복감을 식별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런 사람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불렀습니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자기 만족감에 매달려서 자신의 의로움과 정의만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태도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게’ 하는 사탄입니다(23절).

신앙인은 믿음의 반석과 사탄의 걸림돌을 식별합니다. 같은 돌이라도 용도가 전혀 다릅니다. 같은 돌이라도 언제든 건물을 튼실히 떠받치는 주춧돌이 될 수 있고, 애먼 사람을 가로막고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주춧돌이었어도 공동체를 신앙으로 받들지 않고 삐져나와 기득권을 내세우면 금세 다른 사람의 발을 걸고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남에게 버림받고 혼자 굴러다니던 돌이더라도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 걸으면 언제든 주춧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역전의 상황을 뼈아프게 깨닫고 스스로 살피는 이가 신앙인입니다.

십자가는 나약한 인간의 변덕을 깊이 돌아보는 잣대입니다. 자신의 성과는 무시당하는 것 같고 새롭고 낯선 변화가 자신을 밀어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베드로처럼 자신을 내세워 예수님을 꾸짖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이때 십자가는 자기를 내려놓고 아프고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하라는 촉구입니다. 이 길만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을 살립니다. 우리는 과연 십자가의 길 위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