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생각 –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의 성명서

Saturday, January 21st, 2017

올해 2017년은 1517년 서방교회의 개혁과 창조적인 분열의 사건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잉글랜드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는 이에 관해 공동 성명서를 내고, 종교개혁의 뜻을 되새겨 복음과 섬김의 사명으로 분열과 미움의 과거를 넘어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열어나가자고 촉구한다. 아래에 성명서 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싣고 원문 출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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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생각 – 캔터베리 대주교와 요크 대주교의 성명서

올해 세계의 교회는 유럽에서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의 중대한 의미를 되새길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교회의 사치와 도락에 저항하여 마르틴 루터가 95개 항의 비판문을 내걸면서 시작됐습니다. 잉글랜드 성공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기념 활동에 참여할 것이며, 유럽 대륙의 개신교 동반자 교회들과 행사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유럽 그리스도교인 안에서 일어난 쇄신이자 분열의 과정이었습니다. 올해 종교개혁 [500] 주년을 맞이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은 종교개혁의 공헌을 이어받은 것을 커다란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를 표할 것입니다. 그 많은 공헌 가운데는 은총의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한 일과 자국어 성서가 마련된 사건, 그리고 신자들을 불러 세상과 교회에서 하느님을 섬기게 하신 소명이 포함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또한 교회 일치의 훼손이 지난 5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것도 기억할 것입니다. [교회의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 가운데 일치하라 하신 분명한 명령에 반한 것이었습니다. 이 격동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싸웠으며, 많은 사람이 같은 주님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의 손에 박해받으며 고통당했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수 세기 동안 불신과 경쟁의 유산이 그리스도교의 세계 확장과 더불어 따라다녔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깊이 성찰해야 할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일은 종교개혁자들이 모든 사람의 삶의 중심에 넣어주려 했던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올해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쇄신하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우리는 좀 더 어려운 질문,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 교회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나누고 축하하는 길에 들어서자는 질문을 던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을 기억하는 일은 또한 지속적인 분열들에 관해서 우리가 관여한 부분을 회개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러한 회개는 다른 교회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동이어야 하며, 그들과 나누는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500주년은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시작으로, 이러한 일의 기회를 더 많이 마련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종교개혁 기념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진리 안에서 쇄신하고 일치할 것을, 우리의 분열들에 회개할 것을, 그리고 그분 안에서 함께 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세상을 향한 축복이 되기를 촉구합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영어 원문 링크 (캔터베리 대주교 홈페이지)

신앙의 인생역전 – 부자와 라자로

Sunday, September 25th, 2016

신앙의 인생역전 – 부자와 라자로 (루가 16:19~31)

돈을 둘러싸고 사회와 인생의 희비가 출렁거립니다. 돈과 권력이 많으면 출렁이는 파도가 더 높아서 인생도 위태롭기 일쑤입니다. 복 받아 성공했다는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생명까지 앗아가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비극의 원인을 간명하게 말합니다. 모든 돈과 재산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은총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재산을 바르고 착하게 베풀며 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소유관계가 어긋나면, 우리 인생도 어긋난 비극이 되고 맙니다. 신앙인은 이 비극의 연쇄 현상이 넘실대는 세태를 멈추고 바로잡으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운명은 죽은 후에 완전히 뒤바뀝니다. 세심하고 흥미로운 대조가 눈에 띕니다. 유명했던 부자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천한 거지에게는 ‘나자로’라는 이름을 남겨 후세가 기억하게 합니다.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그러나 무덤덤하고 차가운 땅은 현세를 살면서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살던 인생의 결과입니다. 돈에 사로잡힌 인생은 땅에 묻혀 잊혀집니다. 반면, ‘라자로’는 새로운 신앙의 전통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떠났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외롭고 나그네 같은 생명을 보듬는 따스함과 위로가 신앙의 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약속과 희망을 얻습니다. 세상의 질서에만 묶여서 살면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가 지옥입니다. 고통 안에서도 생명을 지키려 발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품에 듭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재산과 권력에 관한 태도가 신앙과 인생의 건강을 결정합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사람을 등쳐서 얻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는 이들을 호되게 비판합니다. 이들의 행태는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테니 정신 차리라고 경고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안타깝게 호소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입니다”(디모 6:9~10).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목격하는 현상입니다. 재산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다 보면 악한 곳으로 미끄러지고 맙니다. 예언자의 경고와 사도의 가르침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이 부활을 믿을 리 없습니다. 이런 이들의 신앙은 허세입니다.

돈과 재산, 지위와 권력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속한 것을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고집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 땅’에 붙잡힌 사람들이 만든 질서 안에서 남을 빼앗고 억누르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눈과 귀를 가려 악한 유혹과 파멸의 길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깃든 생명의 품’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손길이 될 때, 그것은 함께 누리는 복락과 은총이 되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곳에 선한 재산과 정의로운 권력이 섭니다.

신앙은 생명 없는 돈과 권력에 생명을 보살피는 힘을 주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을 하느님의 생명들에게 되돌려 사용하는 일이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땅의 질서를 벗어나, 세상을 하느님의 품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인생역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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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Sunday, September 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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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