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신비, 신앙과 이성 사이 –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

Saturday, January 27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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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 신앙과 이성 사이 –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1225-1274)은 그리스도교, 특히 서방교회 최고의 신학자로 꼽힌다. 그가 남긴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은 당시 그리스도교에 큰 도전이자 집대성이었으며, 이후로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교회는 그를 ‘천사와 같이 위대한 학자’로 불렀다. 그가 세상을 떠난 3월 7일이 축일이었으나 사순절기인 탓에 그의 위대한 생애를 적절히 기념할 수 없었다. 1969년 천주교의 전례력 개정에서는 그의 유해를 프랑스 툴루즈 자코뱅 성당으로 옮긴 600주년을 기념하여 축일을 1월 28일로 옮겼고, 성공회도 이날을 따른다.

토마스 성인은 이탈리아 아퀴노 지방의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 부모의 강요로 당시 출세가 보장된 베네딕트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곧 ‘탈출’하여, 새롭게 등장한 설교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몸을 담았다. 이 수도회는 겸손과 절제와 가난의 삶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하는 일에 힘썼다.

오늘처럼 13세기 교회도 혼란스러웠다. 교회 권력자들은 관습과 교리에 기대어 자신의 입지를 변명하기 일쑤였다. 새로운 영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사적인 종교체험을 부풀려 전통과 신학을 내치고 지성을 거부했다. 성찰하는 지식과 연구에 소홀하면 교회의 기초는 무너진다. 부패와 타락이 스며들고, 근거와 논리가 몹시 부족한 주장이 깨달음인 양 판을 친다. 토마스 성인의 의지는 뚜렷했다. 신앙인은 성서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 맞게 새로운 언어와 논리로 끈질기게 묻고 대답해야 한다.

토마스는 고위 성직자나 신학자와 논쟁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성인을 시기하고 질투한 사람도 많았다. 처세술도 모르고 ‘무식한 황소’처럼 덤비는 ‘젊은 급진파’라고 핀잔했다. 그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교회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스승 알베르토는 토마스의 성실함과 총명함이 교회를 구할 것이라며 변호하고 응원했다. 이러한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성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며 글을 썼다.

성인의 관심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였다. 신앙의 은총은 자연 세계와 인간 이성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자연과 이성의 완성이었다.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울 때라야 오히려 둘이 건강하게 제대로 선다. 그는 시대의 질문을 궁리하고 시대 학문과 대화했다. 당시 떠오르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소통하려고 애썼다. 그 결실이 <신학대전>이다.

위대한 성인 학자는 신비 앞에 겸손했다. 어느 날 신비 체험을 한 뒤 그는 붓을 놓고 글을 멈추었다. 그의 제자가 옆에서 물었다. “선생님, 왜 글을 쓰지 않고 멈추십니까?” “이제는 글을 쓸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쓴 모든 것이 다 지푸라기와 같구나.” 성인은 자신과 시대의 한계를 분명히 식별하고 손을 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후로 그는 글을 쓰지 않았다. 3개월 후, 교회 공의회에 참가하는 여행길에서 세상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후대의 역사가는 토마스 성인이 경험한 또 다른 신비 체험을 전했다. 절필 선언 후 자신의 저작을 모두 ‘지푸라기’ 같다고 말하던 성인에게 예수께서 나타나 위로하셨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서 정말 잘 썼다. 너에게 어떤 보상을 줘야 할까?” 성인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1월 27일 치 (↩)

하느님의 잔치와 신앙의 예법

Sunday, October 1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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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잔치와 신앙의 예법 (마태 22:1-14)

성찬례는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미리 맛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마련하신 잔치의 목적은 뚜렷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세계와 그 생명을 함께 축하하고 즐기라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치와 경제는 이 초대를 자주 위태롭게 합니다. 울타리를 치고 몇몇이 독식하거나 갖가지 인맥과 이권이 만든 차별의 벽을 높이 쌓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맞서 하느님의 잔치를 이어가십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흥을 이어가시려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시고, 배고픈 이들의 처지를 측은히 여겨 배부르게 먹고 남도록 풍성히 차려 주십니다. 세상 기준으로 손가락질받는 이들을 초대하여 먹고 마시는 일로 기꺼이 그들의 동료가 되십니다. 그 잔칫상은 자신의 몸을 제자와 친구에게 내어주는 일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침내, 새로운 생명을 축하하는 부활 잔치의 성찬례로 완성됩니다. 난해한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 비유는 이 맥락에서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초대하려는 의지마저 돋보입니다. 그러나 함께 참여하여 누릴 잔치의 흥을 깨는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사적인 성취와 손익 계산에 따라 참여를 거부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초대가 사적인 이익의 기회를 빼앗는다고 판단하여 폭력으로 자기 이익을 보호하려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앙은 손익계산을 넘어설 때 다가오는데도 말입니다. 최근 세계의 정치경제, 그리고 우리 주변 상황과도 무척 닮았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세상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새로운 초대에 응답하여 자신의 태도를 바꿀 때 희망이 열립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할 것 없이, 모두 생명 잔치의 혜택을 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하느님의 단비가 차별 없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참여했다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맞는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을 벗어나 신앙의 길에 초대받는 은총을 누렸다면, 자신에게 친숙한 세상의 관습을 버리고 신앙과 은총의 예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에 둘러 모인 사람은 나이와 성별, 학력과 재력, 오래된 이와 새로운 이의 구분을 넘습니다. 사람따라 존대하거나 친근하다는 빌미를 대며 반말로 하대하지 않습니다.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며, 서로 좋은 것을 권하고 보살피는 예법을 따릅니다.

신앙 공동체는 성찬례로 하느님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나눕니다. 세상의 삶이 우리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교회 공동체의 공간과 시간에서만은 새로운 행동과 예법으로 살며 훈련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손님인 사람이기에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예법을 무시하는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는 한탄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생명의 기쁨을 서로 축하하고 서로 드높이며 살아갑니다. 교회는 이 생명 존중의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 공동체입니다.

함께 들어갈 하느님 나라

Sunday, October 8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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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들어갈 하느님 나라 (마태 21:33-46)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2).

지난 주일 복음 말씀 끝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우리 인생의 걸음걸이가 어떻든 교회로 모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의 백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사회의 윤리적 잣대에서 비난을 받던 세리들과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정관념이 만든 혼란과 당황을 넘어서서 새로운 신앙의 결단과 행동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버티면서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악한 소작인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입니다.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질서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질서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맛있는 포도 열매를 맺어서 우리에게 달콤한 영양을 주는 일입니다. 쌓아놓으면 썩어버릴 포도를 술틀에 이겨서 포도주를 만들어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니다. 생명이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이 포도원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그곳은 탐욕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출을 나누지 않고 쌓아놓고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습니다. 누가 그에 항의할라치면 내쫓거나 두들겨 패는 폭력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가로채겠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고 누리려던 세계가 탐욕과 폭력과 전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탐욕과 폭력과 전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 우리도 의식 무의식으로든 이 현실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의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은지, 다른 사람과 나눌 기쁨을 울타리 쳐서 독차지하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반성에서 신앙이 출발하고 영성이 뿌리를 내리며 바른 식별이 자라납니다. 이 신앙과 영적인 식별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사회와 세계를 성찰해야 합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협잡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서로 받아들여 함께 수고하고 서로 격려하여 다 같이 넉넉하게 덤을 주어 보내는 일로 열립니다. 우리 땀과 눈물로 맺은 탱탱한 포도의 달콤한 맛을 함께 나누고,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함께 나누어 마실 때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