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와 평화를 만드는 신앙

Sunday, July 3rd,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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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와 평화를 만드는 신앙 (루가 10:1~11, 16~20)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이리 떼를 어린 양들 가운데 보내는 것 같구나.” 오늘 복음 말씀을 뒤틀어, 어느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 졸업식 강론에서 던지신 우스개였다고 합니다. ‘사목 현장에 나가는 이들에게 격려는 못할망정, 이렇게 자존감을 내리누르는 말이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할 성도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종교의 현실을 향해 던지는 이 우려와 경고가 실제로 이곳저곳에서 한탄이 되어 되돌아오는 일이 숱합니다. ‘지갑과 카드, 자동차와 인맥’을 우선순위로 두는 삶에서 벗어나, 신앙인이 먼저 찾아야 할 가치와 멈추지 말아야 할 길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길을 함께 걷겠다는 동행의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쁜 발걸음으로 여행하시는 까닭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받거나 대접받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사랑과 배려에 젖은 ‘옛 예루살렘 성’을 무너뜨리고, 낯선 타인을 향해 베푸는 사랑과 배려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를 세우시려는 뜻입니다. 이 여정에 주님께서 우리를 모두 초대하셔서 함께 걷자고 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하여 예수님의 삶에 동행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새 예루살렘’을 우리 삶에 매일 짓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삶을 새롭고 낯선 곳에서 펼쳐나가라는 파송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수동적 환대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고, 환대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 나아가 손님이 되어주라는 당부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안에서만 낯익고 평화로운 관습에서 벗어나, 낯설고 불안정한 삶의 처지를 돌아보며 몸소 겪습니다. 모자라고 빈궁한 처지가 되어 환대의 기쁨이 무엇인지 스스로 새롭게 경험합니다. 아울러, 낯선 이를 어떻게 맞이할지 모르는 문화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누신 사랑과 용서의 환대를 가르칩니다.

이 동행과 파송의 신앙은 갈등하고 불화하는 세상에 평화를 선물하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실천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힘 있는 편에만 머물면, 힘없고 약한 사람의 아픔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이익에 군침을 흘리는 ‘이리 떼’의 문화에 젖어들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걷는 길마다, 머무는 곳마다 화해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몸과 마음이 뒤틀린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간 동료인 ‘어린 양들’이 아파하는 목소리에 먼저 귀 기울여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입니다.

자기 이익과 안위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는 인간과 그 시대는 불안합니다. 삶의 외면 조건이 나아지는데도 인간의 내면이 더 힘들어지는 이유입니다. 세상이 너나없이 ‘이리 떼’가 되면 갈등과 상처는 깊어집니다. 오직 평화와 치유를 선물하시려는 예수님의 길에 동행하고 파송 받는 신앙만이 새로운 삶을 만듭니다. 이것이 ‘사탄을 이기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기록된 사람’으로 생활하는 기쁨입니다. 이제 복음 말씀을 다시 세워야겠습니다.

“내가 힘없는 어린 양인 너희를 사나운 ‘이리 떼’ 가운데 보낸다. 그러나 내가 동행할 터이니, 힘을 내어라. 가서 환대하고 평화를 세우라.”

신앙 – ‘뒤를 돌아보지 않는’ 나그네 길

Sunday, June 2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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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뒤를 돌아보지 않는’ 나그네 길 (루가 9:51~62)

복음은 종종 우리가 바라는 기대와 어긋나기도 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품고 성당에 들어왔는데, 전례에서 들려오는 복음은 우리에게 매우 낯선 명령을 내립니다. 지친 마음과 몸을 위로하러 찾았는데, 복음의 풀이인 설교는 우리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더 복잡하고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설교자도 사람을 괴롭히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데, 하느님께서야 그 사랑하는 자녀들을 외면하실까요?

다만, 신앙의 길은 우리가 일상에서 평범하게 기대하는 것 너머를 바라볼 때 열립니다. 우리 생각을 초월한 공간을 향해 몸을 한 번 맡겨보겠노라고 굳게 마음먹을 때, 우리 소원과 위로의 길이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오늘 예수님은 ‘마음을 결연하게 다지시고’ 새로운 일이 펼쳐질 ‘예루살렘’으로 길을 걷습니다. 권력과 부의 집착이 쌓은 ‘옛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자기 포기와 헌신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건설하시려는 의지입니다. 그 길목마저 쉽지 않습니다. 낯선 땅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며, 스스로 낯선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낯익은 관습과 땅을 지키는 사람의 ‘냉대’마저 받아야 합니다.

사람 마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자신을 환대하지 않으면 섭섭하고,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분개합니다. 종교와 정치는 더 위험해서 믿음과 이념이 다르면 쉽게 정죄하고 심판하려 듭니다. 제자들처럼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는 분노가 우리 사회와 종교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태도를 호되게 꾸짖습니다. 그곳에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나올 테니까요.

예수님은 심판의 분노를 우회하고, 집착을 버리는 자유의 길을 걷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신세 한탄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여우와 새’가 상징하는 생존 자체가 목적인 동물의 질서를 떠나고, ‘굴과 보금자리’가 뜻하는 안위의 집착에서 벗어난 선택입니다. 신앙의 길은 ‘나를 따르라’는 초대에 응답하여,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삶의 쳇바퀴와 자신이 세운 기대에서 실제로 떠나는 연습입니다. 과거의 부채감과 죄책감에서 자신을 풀어주어 자유를 얻는 훈련입니다. 자신과 자녀, 가족과 친구 관계에도 해당합니다.

예수님의 조건이 마음에 걸리나요? 부모 장례도 못 치르고, 작별 인사도 막는 냉혹한 주문은 당시 상황에서 나온 과장법입니다. 엘리야도 제자 엘리사에게 작별 인사의 기회는 주었습니다. 제자가 되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악의 유혹은 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일 때 파고들어 번져갑니다. ‘이쯤이야’ 하고 눈 감아서 미끄러지고 망가지는 일이 세상에 숱합니다. 당연하고 익숙한 질서, 그리고 과거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다 보아서는” 신앙의 길이 계속 흔들린다는 경고입니다. 우리 삶에 새로운 사고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촉구입니다.

신앙의 길은 체험과 신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성을 결연하게 떠날 때 시작합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스스로 낯선 나그네가 되어 새로운 만남에 자신을 여는 길입니다. 처음에는 괴롭고 불편한 길처럼 들리지만, 곧 여행의 새로운 은총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처럼 신앙의 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 사랑으로 품는 예언자 교회

Sunday, February 21st,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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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 사랑으로 품는 예언자 교회 (루가 13:31~35)1

빛의 속도로 13억 년을 달려와 지구에 다다른 ‘중력파’라는 우주의 물결이 연일 뉴스입니다. 현대 과학의 난해한 이론이 어떻든, 상상하기 어려운 속도와 거리를 뚫고 그 오랜 시간을 견디며 어떤 힘이 와 닿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먼 여행 끝에 다가와 우리를 가녀리게 감싼 우주의 파장은 우리 신앙 여정의 비밀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낯익고 편안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으로 향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아브람’은 두려움에 떱니다. 자기 고향에서도 이룬 것이 미미한데, 정처없는 여행을 떠나라 하시냐는 볼멘소리도 들립니다. 하느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하늘을 쳐다보게 하신 다음” “별들을 세어보라”고 하십니다. 신앙은 ‘자기 안’에 있지 않고, 세상 가치인 ‘땅’에 있지 않고, 약삭빠른 ‘셈’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선언입니다. 유혹하는 악마는 자기 안에서 당장 움켜쥐는 성과를 찾으라고 속삭이지만, 신앙의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멀리 떠나서 자기 ‘너머’에 있는 더 큰 세상을 길게 바라보라 하십니다.

바울로 성인도 유혹받는 인생과 신앙의 인생을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유혹의 ‘세상 시민’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수치스러운 성과마저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입니다. 반면에, 신앙의 ‘하늘 시민’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어려움과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굳세게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 가치로 유혹하는 “원수들이 미워하더라도”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삶을 갈망하는 시편 노래와 맥이 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노리는 ‘여우’와 이를 지키려는 ‘암탉’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촉구하십니다. 헤로데는 권력과 부를 누리면서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위협하며 죽이려 합니다. 자리 보존과 이익에 따라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이용하는 사람은 생명을 짓밟는 ‘여우’입니다. 그러나 ‘암탉’은 세상 가치에 눈을 돌리지 않고, 깨지기 쉬운 ‘알’의 가능성을 보호하고, 병아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하여 온몸에 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멀고 험한 길이 계속되더라도, 자기 생애에 다 마치지 못하더라도, 연약한 가능성을 먼저 사랑하고 품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선교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는 예언자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가 준엄합니다. 밖에 있는 낯선 사람, 연약한 사람, 정처 없이 서성이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지 않으면 ‘성전’은 곧 무너지고 맙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단단한 성당일지라도 구원의 배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직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세상 밖을 걸으며 낯설고 연약한 이를 초대하여 사랑으로 품을 때, 그리스도의 구원이 긴 여행 끝에 다가와 우리를 어루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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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2월 21일 사순 2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