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 깨어 견디는 교회의 신앙

Saturday, November 2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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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 깨어 견디는 교회의 신앙 (마태 24:36-44)

시절이 혼란할수록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줄 해결사를 기대하기 쉽습니다. 전능한 해결사를 바라는 마음은 삶의 당혹감과 절망감 때문에 나옵니다. 이때 절박한 마음을 파고들어 ‘종말 사상’을 뒤집어쓴 사이비 종교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곤 합니다. 그 역사가 길고 자주 되풀이 됩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오늘 복음을 기록한 마태오 때도 그랬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나온 나약한 기대는 현실 도피일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교회 전통은 대림절 신앙 안에서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풀어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연약한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세상 권력이 욕망하는 성취와는 달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실패 안에서 부활을 이루시어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 전통이 교회력을 마련한 까닭은, 주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삶을 교회가 그대로 겹쳐서 살아달라는 부탁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오셔서 시작하신 새로운 세상은 이제 교회가 겪는 탄생과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더 널리 펼쳐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교회의 삶과 신앙의 삶에 겹쳐지는 신비를 대림절 안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재림입니다.

복음서를 쓴 마태오는 지금처럼 희망과 신앙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외부에서는 역겨운 권력의 타락이 끝을 모르고, 내부에서는 불신과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의 희망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며 소비주의에 몸을 맡겼습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하늘만 바라보며 땅의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오셨으니, 주님은 교회 안에서 머리가 되어 그 손발이 세상에 펼쳐져야 합니다. 교회가 이 일을 다 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재림은 계속 연기되고 멀어질 뿐입니다.

재림의 신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삶의 순간마다 복음의 가치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작은 선택과 결정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겪는 정치와 경제, 교육과 복지는 우리가 순간마다 선택했던 일이 쌓여서 만든 결과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의 복음을 되새기는 삶입니다. 오래 견디는 신앙은 복음의 가치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갈등과 고난을 함께 견디는 삶입니다.

깨어 견디는 교회를 향하여 이사야와 시편 기자가 우리의 대림절 신앙을 격려합니다. ‘자, 올라가라. 하느님의 산으로. 생명을 빼앗는 무기를 꺾어 생명을 먹여 살리는 도구로 만들라. 하느님의 평화, 샬롬의 세계를 만들라.”

부서진 몸 – 왕이신 그리스도

Sunday, November 2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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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몸 – 왕이신 그리스도 (루가 23:33-40)

잉글랜드 북부 노스워크셔 지역에는 폐허가 된 리보 수도원 성당(Rievaulx Abbey)이 있습니다. 1538년,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수도원을 철폐하면서 방치되고 결국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에서 나온 ‘전능한 지배자 그리스도’ 상(그림)은 오늘 읽은 복음서의 예수님 십자가 처형 장면과 묘하게 겹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합니다.

교회력의 막바지를 ‘그리스도 왕’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가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이끌고 다스리는 원칙이어야 한다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왕의 통치’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승리감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처형당하는 장면을 읽습니다. 무참하게 짓밟힌 이들이 서로 위로하려고 내놓는 무력한 ‘낙원’의 기대만 엿보일 뿐입니다.

시대가 흘러, 그리스도는 중세 시대에 권력과 부를 자랑하던 ‘지배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배하려는 힘은 경쟁하여 서로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이 싸움에서 한때 지배자였던 상징은 다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파괴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성서와 역사는 그리스도가 무참한 실패와 상처 안에 있다고 되새겨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과 고뇌가 없는 세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생명이 맞이할 병고와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삶에서 겪는 아픔과 슬픔, 불행을 완전히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태와 부서지는 상황에서도 상처 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신앙은 그 확신을 나누는 여럿이 서로 기대어, 세상 여러 곳에서 스러진 이들의 손을 맞잡고 일어서는 행동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렇게 세상에 펼쳐집니다.

우리의 희망은 죽음과 패배의 십자가에서 피어오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역설의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 신비를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경험하듯이, 세상을 권력과 돈으로 지배하고, 협잡과 인맥으로 속이는 이들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종말은 무차별한 파국이 아니라, 휘두르는 지배 권력의 끝이고, 연약한 이들이 함께 이루는 낙원의 시작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욕심과 질시가 망가뜨린 그리스도의 머리를 우리 삶의 가치로 되찾아내는 사람입니다. 고난과 상처, 희생과 위로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자기 삶과 사회의 그늘에서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깃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때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나라와 세계가 바로 섭니다. 여기서 십자가 위에서 무참하게 부서진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하게 우리 삶을 다스립니다.

자캐오 신앙 – 돌무화과 나무 아래

Saturday, October 29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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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 신앙 – 돌무화과 나무 아래 (루가 19:1-10)

자캐오의 삶에는 여러 결이 가로지릅니다. 그 탓에 싹둑 잘라 판단하거나 손쉬운 교훈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겹친 결들을 조심스레 들춰야 합니다. 그는 부자 세관장입니다. 동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세리들의 우두머리인지라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입니다. 한편, 그는 키가 ‘작다’고 합니다. 사람이 겪는 열등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약탈하는 로마제국의 부역자가 된 까닭은 이 복합감정 안에서 자신을 ‘더 크고 높게’ 만들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룬 부와 권력으로 그는 행복할까요?

자캐오가 오른 ‘돌무화과나무’에도 여러 뜻이 겹쳐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다 팔 열매는 맺지는 못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길을 오가다가 잠시 허기를 달래는 데나 쓰입니다. 자캐오가 그 나무에 올랐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의 등에 올라타서 그마저 빼앗아 먹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전혀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며 살기보다는, ‘작다’는 열등감과 창피를 무릅쓰고 소년처럼 나무에 오릅니다. 다른 이들보다 불의한 자신으로서는 결코 가까이할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예수님을 멀리에서나마 꼭 보겠다는 다짐입니다. 인간 양심의 마지막 안간힘입니다. 이 의지가 신앙이며 구원을 향한 도약입니다.

반전은 여기서 일어납니다. 군중의 인기와 환호가 예수님을 둘러쌀 때, 여러 면에서 ‘작고 부도덕한’ 자캐오는 이 사이에 낄 수 없습니다. 대중의 인기와 추종은 고정관념이 되어 종종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사람은 대세에 자신을 맡겨 안위와 안전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군중과 함께 떠밀려 누리는 고정관념의 종교는 얕고 가벼워서 인생의 파도를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더 나쁘게는, 신앙의 진실에 더 깊이 다가오려는 이들도 막아서기 일쑤입니다. 이때는 외로움의 위험과 연약함의 노출을 무릅써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오르는 수고로 넓고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만남은 ‘회복’입니다. 돌무화과나무의 히브리말 ‘쉬크마’의 뜻입니다. 자캐오를 불러 권력과 탐욕의 사다리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자신의 작음을 있는 그대로 세상 사람 앞에 내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캐오는 다시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이 초대에 용감하게 응답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행동으로 과거의 빚을 갚겠노라는 회개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그의 환한 기쁨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이 기쁜 다짐과 행동을 확인하여 회복합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 하느님의 자녀이다.”

세상 종교가 말하는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은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에서 사라집니다.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서나마 더 멀리 보려고 수고할 때,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서로 배우며 초대할 때, 우리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정하며 펼쳐집니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