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성공회 분란을 보는 한 방법

Tuesday, September 11th, 2007

세계성공회 안의 적잖은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의의 여러 지형들과 그 얼개를 살펴보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이미 두쪽으로 결단난 마음들을 봉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일보다 힘들 게다. 우리와 관계없는 저만치 떨어진 일이라고 불구경하는 것도 게으름이거나 현실 파악 못하고 내용없이 고상한체 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어떤 입장을 더해봐야 두쪽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어 몰매맞기 십상이다.

이 논쟁의 속내가 무엇이고, 어떻게 연구하고 적용하고 관여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길이 이 논쟁때문에 해칠지도 모를 우리 교회의 건강에 예방약이 될 것이다. 그러지도 저러지도 않고는 왈가왈부할 수 없는거다. 이 논란에서 비롯한 생각들에 스스로 질문하여 떠오른 문제들을 나열해 본다.

1. 동성애가 문제의 핵심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동성애는 하나의 ‘정치적’ 이슈이다. 어떤 논쟁이든 전쟁이든 기싸움이 있는데, 어떤 이슈/개념을 선점하면 유리해진다. 오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나온 하나의 ‘정치적’ 이슈이다. 이슈를 선점하면 절반을 이기고 갈 확률이 높다. 종교는 초기 “운동”이 끝날 무렵부터는 보수적이 되는지라, 새로운 주장을 이기려면 전통적인 오랜 주장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도 승산이 높다.

2. 이것은 신학의 문제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당연히 신학의 문제이겠지만, 어떤 신학이나 교리는 그 역사적 맥락이 있는 법. 오랜 동안 그것을 만들어온 역사적 맥락을 짚어가며 말해야 한다. 그 현재 논란의 맥락을 성공회 안에서 좁혀보면, 식민지 선교의 신학적 유산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대척점을 이룬 지역 성공회 관구들을 보면, 선교했던 선교회들의 신학과 그 입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특히 자칭 “글로벌 사우스”에 처음 들어갔던 선교회들을 알아보면 흥미로운게 보인다.

3. 그럼 정치적인 문제인가?
과거의 정치적 유산과 현재의 정치적 갈등이 이 논쟁 안에 깃들어 있다. 한국만 보수-진보로 나뉘고, 보수 회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성공회 안에서는 이런 보수화가 전 세계적이라고 할 만한데, 위의 선교사 신학의 유산과, 새로운 힘을 얻고 있는 현재의 보수적 종교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 주목할 것은 미국 부시 정권을 지원했던 우파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전선은 그야말로 에큐메니칼하다. 서로 으르렁대던 이들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가 되었다. 이 우파 전선 안에서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내부의 우파들이 한 솥밥을 먹게 된 시대이니, 가히 또다른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4. 뒤에 미국이 있는가?
최소한 이 논란을 일으키는 거간꾼을 보면 그렇다(정확히는 위에서 말한 대로 미국의 우파 정치적 담론 권력이다). 자기들 내부의 갈등과 싸움을 세계성공회로 확대시켜 대리전을 시키는 모양새다. 왜? 보수파들이 그나마 진보적인 미국성공회를 뭉개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다. 또 장기적으로는 세계의 미국적 보수화에 디딤돌이 될 것이다. IRD (종교와 민주주의 연구소)라는 이 기독교 우파들의 싱크탱크는 그 한 예인데, 그 거간꾼 일을 마다 하지 않고, 위에서 말한 보수적 정치 담론을 신학과 교회를 통해서 지원한다.

5. 뒷거래가 있는가?
예를 들어 아프리카 성공회 몇몇 관구들은 미국성공회의 지원을 거부했다. 과연 “진리 수호를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실제로 많은 아프리카 교회들은 다른 나라 성공회의 지원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용기있는 행동이 어디서 나왔을까? 최소한 앞서 말한 미국 보수 진영의 돈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6. 도대체 이런 싸움으로 얻는게 뭘까?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대로, 미국의 우파 기독교인들은 그들대로 얻는게 있다. 이건 여러가지 면에서 파워 게임이다. 아프리카, 특히 나이지리아 교회만 신자가 2천만명이 넘는다. 세계성공회의 3할이다. 이 싸움에서 손해볼게 없다. 지면, 독립 교회를 꾸릴 명분이 생긴다. 이기면, 전 세계성공회를 차지하여 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 과거 제국의 식민지 선교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될 수 있겠다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교황권에 근접한 교회 정치체제가 나올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징직인 일치의 힘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대치할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서는 우파 기독교인들은 이로써 60년대 이후로 잃었던 교계 지배력을 회복할 것이다.

7. 정치에 신물난다. 신앙적 진정성이 있지 않나?
누구에게라도 신앙적 진정성이 있다고 믿고 싶다. 문제는 그 진정성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 진정성을 확인하고 설득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최소한 성공회는 신앙을 ‘순례의 여정’으로 보면서, 이 입장에서 교리와 신학을 본다. 교회 역시 순례하는 교회로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을 보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걸어간다. 그러니 지금은 판단하고 정죄할 때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서로 연구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례는 열린 길인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진정성에 대한 주장은 이런 대화 없이는 불순한 것이다.

8. 신학 연구, 성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서의 문자, 교리, 전통, 신학, 이런 것들이 통째로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을 바로 잡지 않고 자기 주장만 되뇌어서 진전이 있을 턱이 없다. 누구는 이런 혼란을 부추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성서적”이라고 하는 주장들, 교리적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은 내내 어떤 뿌리와 맥락이 있다. 자기 주장에는 기원들이 있다. 그걸 열어 놓고 검토하고 연구하여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범주들을 벼려 내어 접근해야 한다. 게다가 신학의 방법 차이도 있고, 신학의 정보량 차이도 있다.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열린 자세로 신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동하는 것이다.

9. 그러니 이 참에 “계약 문서”로 선을 그으면 되지 않는가?
최소한 성공회 전통은 이른바 “고백 문서” 전통과 거리가 있다. 성공회는 이런 종교적 문서에 따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사실 우리 성공회 신자는 성서와 더불어, 우리는 기도서가 우리 성공회 신학과 전통과 삶을 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거기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참 좋은 “언약 문서”를 우리 기도서에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 언약”이 그것이다.

10. 관구장 회의가 부각되고 있는데…
세계성공회 역사에서 이른바 4개의 일치 도구로 여겨져온 것들, 즉 캔터베리 대주교, 람베스 (주교) 회의, 세계성공회협의회(ACC), 그리고 관구장 회의 가운데서, 관구장 회의가 가장 늦게 생겼고, 원래 친교 모임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관구장 회의가 부각되기 시작하여, 급기야 “계약 문서”에서는 관구장 회의가 세계성공회 회원 자격 결정 여부 권한을 갖도록 제안하고 있다. 관구장 회의 자체에는 그럴 어떤 권한이 없다. 관구장들의 힘의 과시인가? 힘의 집중화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게다가 소위 ‘일치의 도구’가 회원 자격 박탈을 결정하는 분열의 도구로 등극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가운데서 세계성공회의 일치에 가장 구체적인 일을 해왔던 가장 중요한 기구인 ACC (주교, 성직자, 평신도, 여성, 청년 대표들로 구성)가 약화되고 있다. 세계성공회의 권위주의화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세계성공회 안에서 회원 자격과 관한 논란은 ACC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관구장들의 목소리에 가려져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다른 여러 교구와 교구장들의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11. 어쨌거나 문제는 동성애다.
그렇다. 역시 문제는 남는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해서 논의하려면 그걸 좀 알아야 한다. 교회를 결단낼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어떤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에 근거해서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하고 있는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자신이 읽은 이 주제와 관련 책이나 정보들을 나열해 보자. 동성애를 반대하는 신학적 주장들의 큰 맹점 가운데 하나는 이미 폐기된 의학, 심리학 전제들을 기초하고 있으며, 대중들의 이해, 그것도 감정적 이해 수준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갖고 말하려면 거기에 대해서 최소한 다양한 정보를 갖고 말해야 한다. 결론이 아니라 출발부터 되짚어 보아야 한다.

12. 동성애는 성 도덕의 문제 아닌가?
윤리이든 도덕이든,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다. 혼자 살면 윤리나 도덕이 필요 없다. 그렇다면 성도덕의 문제로서 동성애를 살피려면 이런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악영향이 있는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폭력, 강압, 착취와 관련된 성 문제가 성 도덕/윤리의 핵심적인 사안이다. 인간 존엄이 잣대이다. 이 틀에서 동성애든 이성애든 성 도덕을 볼 일이다. 어떤 사안의 범주들을 흐트려서 고정관념에 기대에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13.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여전히 이 논란에는 성서가 가르치는 것, 혹은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되어 온 것, 교회의 전통, 적용 맥락의 상이성, 그리고 사회 공동체 자체의 이해 등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인간의 하느님 경험” 문제이다. “불 받는 경험,” 이런 매우 협소한 종교적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 세계 전체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추동하는 경험이다. 성서는 이런 하느님 경험의 기록이다. 전통 역시 그 맥락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을 그 앞선 경험의 기록인 성서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일이었다. 결국 하느님이 주도하는 한 그 경험은 늘 열려 있는 것이다. 문자와 교리와 전통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사건이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사람마다 다양하니 그 경험이 다양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사건이 펼쳐지는 그 구원의 경험에 먼저 귀를 기울인 후에라야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할 일이다. 지금처럼 귀막고 눈막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귀와 눈까지 막아가면서 진리의 수호를 외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경험들에서 서로 영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두려움이 문제다.

불혹 (不惑), 혹은 두려움

Tuesday, September 11th, 2007

머뭇거리다가 올리지 못한 작은 생각이 한해 내내 가위누르듯 했다. 올해를 마감하기 전에는 이 생각을 정리해봐야지 했지만 통 생각이 익질 않고 무거움만 늘었다. 삭여보야 곪을 것이 뻔할 경우에는 팔삭동이 생각이랄지라도 밖으로 내놓는 것이 살리는 길이다. 그런 다음에야 가늠하고 보살피는 일이 상책이다.

그저 나이 타령이다. 우리 나이로 마흔에 들어섰다는 자각은 늙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이 나이되도록 뭐했나 하는 자괴감에서 비롯했을지 모르겠고, 가당치 않게 공자님의 인생 셈법에 비춘 탓에 불쑥 나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불혹(不惑)이라는 말을 맞이하는 심경이 어떠냐?”는 심중의 물음이다.

이미 20대에는 비장함 반 기대감 반으로 “나이 서른에 우리”를 불러댔고, 정작 서른이 지나자 꼬리를 내리고 예수님의 나이를 앞두고 조바심을 갖게 됐다. 조바심이 이뤄줄 수 있는게 없다. 예수님처럼 당신에게 내린 해방의 성령이 부으시는 힘을 얻어 출사표를 내고 현실에 뛰어 들지 않는 한… 예수님은 아니더라도, 그분과 같은 서른 셋 나이에 말씀을 전하는 중에 절명한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는 것도 참 무거운 것이었다. 때로는 제도적 교회 안에서 함께 가는 일의 한계와 그 울타리때문이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짐짓 그 울타리의 보호에서 안주하지 않았노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철들지 않은 생각이 미치는 게 “불혹”이라는 말이다. 온갖 미혹에서 자유롭다는 그 넓은 생각을 다 헤아리지 못하겠느나, 당장 서로 연결된 두가지 말이 마음에 걸린다. 우선 불혹이란 어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으로 풀어지고, 그 욕망의 실체는 기실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욕망을 사적인 것으로만 좁힐 일이 아니다. 개인적 관계의 욕망이 해를 끼치는 일은 제한적이다. (사랑이 욕망인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사랑에 열려있다면 그처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 본다. 명예욕, 권력욕, 금전욕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게 종교 인사들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나이들면 욕심 말고는 남는게 없다고들 하는데, 공자님은 이때문에 이런 사회적 욕망의 유혹을 견제하려고 나이 마흔에 선을 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의 조건 또한 종합진단을 받아야 할 수위라는 뜻이겠다.

나이와 욕망의 비례 법칙은 어디서 비롯될까? 두려움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소극적으로는 이 생애에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조바심이 그 속내라면, 적극적으로는 내 이름 걸고 세상에 마련해 놓은 어떤 실체와 다른 이들이 우러러 볼 어떤 성과를 위해 치닿는 것은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모양새다. 여기에 다시 여지껏 온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덧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번 차지한 명예, 자리, 재산을 내려 놓기 어려운 법이다.

머리를 돌리면 종교 선전에도 이런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은 대체로 두려움을 이용한 자작극이다. 지옥불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금새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가련함으로 바꿔치기하고는 결국 외로운 자신의 두려움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외로움을 덜려는 시도로 밖에 안보인다. 이들 선전의 “천국”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저승의 천당쪽으로만 기우는 것도, 하느님 나라를 대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표식이거니와, 요즘의 교회 모양 같아서는 이승의 기득권을 저승까지도 이어보자는 심산으로도 들린다.

(정치나 종교는 내내 이런 두려움을 이용한다. 테러리즘이나 대(對)테러리즘은 실상 같은 두려움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작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부시는 이 점에서 동족이다. 근본주의 역시 늘 이 두려움에 기반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대체로 종교란 고래로 이런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에 기반하여, 이를 제거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하지 않았던가? 과연 그럴까?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기대어 죽음을 피해보자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목표인가? 교회는 대체로 그런 쪽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주님이 대면하여 극복하신 두려움에 대해서는 성찰했던가? 부활하신 주님의 사목 활동이 가르치는 두려움에 관한 대면은 사뭇 다르다. 문을 꽁꽁 잠그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 안으로 파고 드셨다. 안개처럼 희미한 인생 해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제자들에게 그분은 “나다,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을 건네셨다. 두려움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두려움과 대면하라는 것이다. 그 길에 그분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

불혹은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고 걷는 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백척간두 진일보”는 더욱 살갗돋는 표현이다. 두려움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걷는 길, 두려움을 피하고 덮으려 할 때 줄곧 솟는 욕망들을 식별하는 길, 그것이 불혹일게다.

마흔인데도, 여전히 생각이 지저분하다. 아직 무언가 두려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