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

Saturday, February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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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사순절기는 여정이요, 순례이다. 사순절기의 ‘밝은 슬픔’ 안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우리는 저 멀리 있는 종착지를 응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요,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정교회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의 말이다.

신앙인의 삶도 기대와 예상처럼 평탄하지 않다. 신앙이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리라는 생각은 오해다. 누구도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신앙인은 이 ‘슬픔’의 세계에 발을 디뎌, 그 길에서 만난 다른 이들의 슬픔과 절망을 손잡고 함께 걸을 뿐이다. 그 끝에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있다. 신앙생활은 이 ‘밝은 슬픔’을 걷는 일이 대부분이다.

사순절은 ‘사십 일’과는 관계없이 시작됐다. 그 기원은 부활절을 기다리며 금식하는 관습이었다. 부활 잔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고 실제 몸이 목마르고 배고프게 했다. 몸이 그러하듯 마음도 그렇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되새길수록, 우리 삶에 사랑과 생명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깊이 실감한다. 자기 욕망을 비우면, 마음에 하느님의 꿈이 들 자리가 그만큼 넓어진다.

사순절은 곧 부활밤의 세례 준비 기간으로 발전했다. 신앙은 배움과 훈련에서 나온다. 초능력자의 도움과 복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종교 ‘신심’일지언정, 신앙에는 못 미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에 담긴 뜻을 배우고 익혀야 신앙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유아세례가 성인세례를 교체하면서 신앙교육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역사를 겪으면서, 4세기 즈음에 ‘사십 일’ 사순절이 정착했다. 예수의 광야 ‘사십’ 일 금식 기간을 모방하는가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도 의미를 따다 붙였다. 이때부터 사순절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다. 역사 안에서 사순절은 자기 절제와 비움, 신앙의 준비와 교육, 그리고 참회의 의미가 겹치고 두꺼워졌다.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동방교회에는 없는 서방교회만의 전통이다. 지역마다 들쭉날쭉한 사순절 기간을 40일로 확실히 정하고, 부활일까지 주일은 제외하면서 ‘수요일’이 사순절 시작이 되었다. 1091년의 첫 기록이 선명하고, 12세기부터 서방교회 전체에 퍼졌다.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흙을 빚어 숨결을 넣어서 우리 생명이 나왔으니, 그 숨결이 없이는 우리 인간이 흙 먼지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되새겨주는 말이요, 다 같이 먼지인 처지에 서로 경쟁하여 지배할 심산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이를 깊이 새기고 뉘우치려고, 성공회 전통에서는 시편 51편을 읽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재를 이마에 바른 뒤 참회연도를 드린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이날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의 말이다.

우리가 걷는 삶이 ‘밝은 슬픔’인 것을 기억하면서 재의 수요일에 참여하고 사순절을 시작하자. 이마에 재를 받고 우리 운명의 본질을 되새기자. 성당에는 잘 보이는 곳에 재와 돌과 십자가를 설치하여 사순절 여정을 되새기자. 가정 어느 한쪽에는 모래와 돌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옆에 재를 담아 두도록 하자. 이제 사순절 순례의 기도처가 마련됐다!

  1.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25일치 5면 []

경계의 파수꾼 – 세례자 요한

Sunday, December 4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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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파수꾼 – 세례자 요한 (마태 3:1-12)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고 방향을 전환하는 회개로만 구원자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치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향해 온몸을 돌리라고 외칩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와 역할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여 다음 세대의 길을 열고 닦아주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늘 이어져 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서로 만나 기뻐 반기던 우정입니다. 요한이 권력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히자, 예수님은 당신의 사목 활동을 시작합니다. 예수님도 권력자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다가 권력자와 대결하십니다. 이 대결이 만든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문을 열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옛 시대를 어떻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열리는지 보여줍니다. 옛 시대가 그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자연스럽게 오지는 않습니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놀랍게 펼쳐집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먼저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기도 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의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주역을 끝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을 종종 잊곤 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고집과 아집이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경륜과 지혜와 경험이 진정으로 존중받고 싹을 틔우는 일은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역사에 맡겨놓고 겸손하게 작아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가 열리지 않습니다. 요한은 새로운 역사를 열려고 자신의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스스로 낮추고, 자기 다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열어 놓은 사람입니다.

요한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옛 시대의 걸림돌을 치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듭니다. 시대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자신마저도 쓸어담아서 스스로 치워버립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예수님이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습니다. 그는 시대의 경계에 선 파수꾼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신앙의 역사 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어른으로 우뚝섰습니다.

대림 – 깨어 견디는 교회의 신앙

Saturday, November 2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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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 깨어 견디는 교회의 신앙 (마태 24:36-44)

시절이 혼란할수록 모든 문제를 단번에 풀어줄 해결사를 기대하기 쉽습니다. 전능한 해결사를 바라는 마음은 삶의 당혹감과 절망감 때문에 나옵니다. 이때 절박한 마음을 파고들어 ‘종말 사상’을 뒤집어쓴 사이비 종교들이 사람들을 유혹하곤 합니다. 그 역사가 길고 자주 되풀이 됩니다. 예수님 때도 그랬고, 오늘 복음을 기록한 마태오 때도 그랬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나온 나약한 기대는 현실 도피일 뿐,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교회 전통은 대림절 신앙 안에서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풀어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연약한 아기로 탄생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세상 권력이 욕망하는 성취와는 달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실패 안에서 부활을 이루시어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 전통이 교회력을 마련한 까닭은, 주님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삶을 교회가 그대로 겹쳐서 살아달라는 부탁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오셔서 시작하신 새로운 세상은 이제 교회가 겪는 탄생과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더 널리 펼쳐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교회의 삶과 신앙의 삶에 겹쳐지는 신비를 대림절 안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재림입니다.

복음서를 쓴 마태오는 지금처럼 희망과 신앙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외부에서는 역겨운 권력의 타락이 끝을 모르고, 내부에서는 불신과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의 희망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며 소비주의에 몸을 맡겼습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하늘만 바라보며 땅의 현실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오셨으니, 주님은 교회 안에서 머리가 되어 그 손발이 세상에 펼쳐져야 합니다. 교회가 이 일을 다 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재림은 계속 연기되고 멀어질 뿐입니다.

재림의 신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삶의 순간마다 복음의 가치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우리 삶의 작은 선택과 결정이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금 겪는 정치와 경제, 교육과 복지는 우리가 순간마다 선택했던 일이 쌓여서 만든 결과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의 복음을 되새기는 삶입니다. 오래 견디는 신앙은 복음의 가치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갈등과 고난을 함께 견디는 삶입니다.

깨어 견디는 교회를 향하여 이사야와 시편 기자가 우리의 대림절 신앙을 격려합니다. ‘자, 올라가라. 하느님의 산으로. 생명을 빼앗는 무기를 꺾어 생명을 먹여 살리는 도구로 만들라. 하느님의 평화, 샬롬의 세계를 만들라.”